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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와, 스틸레토 힐은 처음이지?

범위를 넓히는 일의 짜릿함

by 아드리셋


오랜만에 아웃렛에 갔다. 1월 어느 날, 중요한 결혼식이 생겼는데 집에 있는 아이템이라곤 목 늘어난 맨투맨티, 때 탄 운동화, 더 때 탄 롱패딩뿐이었기 때문이다.

쇼핑을 하자.

쇼핑을 좀처럼 하지 않는 나에겐 큰 결심이었다. 그날 난 롱코트, 그 안에 받쳐 입을 검정 폴라티와 검정 시폰 스커트, 그리고 스틸레토 힐 한 켤레를 샀다. 큰맘 먹고 물건을 잔뜩 샀다는 것 자체보다, 이날의 쇼핑이 두고두고 기억될 이유는 따로 있었다.




롱코트도 폴라티도 스틸레토 힐도 시폰치마도, 다 내가 '한 번도' 입어 보지 않고 신어 보지 않았던 아이템이란 거다.

'롱코트'는 키가 작아 입기 싫었다. 비율도 안 좋은 다리 짧은 160이 입으면 키가 더 작아 보일 게 뻔했다.

'폴라티'는 어좁이인 내가 입기엔 머리가 너무 커 보일 거라 생각했다. 폴라는 그래서 중학생 이후로 입지 않았다.

'스틸레토힐'은 한창 젊고 예쁠 20대 때도 신지 않았다. 앞코가 뾰족한 게 무슨 광대 같았고 왠지 내 몸에 안 맞는 걸 걸치는 느낌이었다.

'시폰치마'는 위에 것들과는 좀 다르다. 싫어서 안 입은 게 아니라, 뭐랄까, 입어보고 싶은데 부끄러웠다. 예쁘긴 한데 으악, 내가 저런 걸 어떻게 입겠어! 은밀하게 욕망하고 있었지만 드러내지 않고 살았다.

근데 사버렸다. 무려 저것들을 한꺼번에!

처음 용기를 내서 입어보는 순간이 힘들지, 입고 거울 앞에 섰을 때 내 머릿속 이미지보다 나쁘지 않단 걸 깨닫게 되면 장벽이 하나 무너져 내린다.


160이 롱코트 입는다고 어떻게 되지 않았다. 오버핏 코트는 어벙해서 싫어! 했지만 생각만큼 이상하지 않았다. 한 번 걸쳐보지도 않고 여태 그렇게 생각만 했을 뿐이다.

폴라티를 입었지만 큰 바위얼굴 되지 않았다. 머리가 작아졌을 린 없는데... 이 집이 폴라티 맛집인가? 오히려 모카색 코트와 까맣고 복닥복닥한 폴라가 잘 어울려서 공식 겨울코디로 지정해두고 싶어졌다. 내가 폴라 입은 모습을 한 번도 본 적 없는 남편은 놀란 토끼눈을 했다.


"니가 안 입어서 몰랐는데 폴라티 잘 어울리네?"


광대힐... 아니, 스틸레토힐은 탈의실 안에 놓여있던 임시 신발에서 시작되었다. 그걸 신고 옷들을 입어보다가 남편과 나는 같은 생각을 한 거다.


' 뾰족한 신발 생각보다 괜찮네. 이따 신발은 스틸레토힐을 사보자!'


욕망치마... 아니, 시폰치마는 '이래서 싫어 저래서 싫어' 한 게 아닌, 내가 (비밀스럽게)좋아하는 스타일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기 때문에 입어보는 것에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왠지 너무 부끄러웠는데 거울 앞에 막상 서고 나니 생각이 바뀌었다.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왜 진작 입지 않았을까!



절대 안 입어, 안 신어, 안 먹어, 안 해...

이런 말은 하고 사는 편이 나을 것 같단 생각을 스틸레토힐 때문에, 롱코트 때문에, 시폰 치마 때문에 해본다. 막상 해보면 내 생각과는 다른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앞코가 뾰족한 구두처럼 내 취향 아니라고 못 박은 것들, 하늘거리는 레이스 치마처럼 실은 욕망하지만 나 같은 사람이 저걸 어떻게... 하며 밀어내는 것들.

전자든 후자든 시도해보고 용기 내봐야 안다. 오직 그 순간에만 새로운 세계를 맛볼 기회를 얻는다.

영 아니면 어때. 아니면 그만이지 뭐!



몇 년 전, 맨날 베이지색, 회색만 입는 친정엄마가 민트색을 니트를 입고 나타난 적이 있었다. 웬일로 민트색을 샀냐 물었더니, 교회분이랑 같이 옷가게에 들렀는데 그분이 민트색 참 잘 어울리겠다며 추천을 했다는 거다. 역시. 그런 친구가 옆에 있어야 해. 거봐 엄마, 이런 색도 막상 입으면 괜찮을 거라 했잖아, 잘샀어 했는데... 정작 나도 엄마랑 다를 바가 없었네!(누구나 안 익숙한 것에 도전하는 건 힘들긴 하지.)

엄마! 좁은 범위에 우리를 가두지 말자.



스스로를 좁고 익숙한 곳에 가두는 게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범위를 넓혀가는 일이 얼마나 짜릿한 건지 이렇게 피부로 깨달으면서도 여전히 난 오늘도 관성대로 '절대 안 해'를 외치며 살고 있긴 하다....


수영 그런 거 절대 안 해.

굴 그런 거 영원히 안 먹어.


그래, 사람이 뭐 구두 하나로, 치마 하나로, 글 하나로 바뀌나? 천천히 변하는 거다. 나는 변해가고 있다. 내 세계는 아주 조금씩 넓어지고 있다.



스틸레토 힐과 레이스 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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