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에게나 그때로 돌아가는 급행열차가 있다
젤리라면 사족을 못쓰는 남자애 셋을 키운다. 어제도 젤리 가지고 싸우는 걔네들을 보면서 남편한테 귓속말했다.
"젤친놈들..."
젤리가 초콜릿이나 사탕보다 이를 제일로 많이 썩게 한다고 믿는 나는(실제로 치과 선생님도 그러셨다. 이 사이사이에 잘 들어간다고.) 애들이 젤리를 좋아하는 게 못마땅하다. 난 젤리는 좀 별로다. 회사 다닐 때 서랍에 곰젤리를 가득 담아두고 수시로 꺼내 먹던 옆친구를 신기한 듯 봤다.
그런 내가 딱~~ 정말 딱~~ 하나 무장해제 되어버리는 유일한 젤리가 있다. '사우어 젤리'다.
Sour. 맞다. 그 시큼달달한 젤리. 사우어 젤리라면 지렁이 모양도 그냥 콩알만 한 조그만 것도 다 맛있다. 주로 형광색에 흰 설탕가루가 그득그득 묻어있는, 입에 넣으면 바로 까슬거리면서 새콤달콤해져 버리는 사우어젤리!
사우어젤리만이 나의 유일한 맛젤리(?)가 되어버린 건 스무 살 시절 덕분이다.
매주 일요일, 친구들이랑 왁자지껄 점심을 먹고 늘 성가대 연습을 하러 갔다. 대학부 예배는 늦은 오후 시간이어서 성가대 연습도 점심시간이 지나서 시작됐다. 스무 살, 모든 게 신나고 들뜨고 파릇파릇했던 우리는 무슨 볼 안 쪽에 식량 숨겨놓는 다람쥐처럼 항상 주머니에 꽁깃꽁깃 주전부리를 구겨 넣고 연습에 갔다. 한창 졸리던 그 시간. CU의 조상님인 '패밀리 마트'는 우리의 참새방앗간이었다.
하루는 친구가 편의점 진열대 그 수많은 씹을 거리 중에서 왕꿈틀이도 마이구미도 아닌 영어로 뭐라 쓰인 화려한 지렁이젤리를 들고 말했다.
"야. 이거 진짜 맛있는 거 아냐 모르냐."
까만 테투리의 패키지에 담긴 '트롤리 사우어 웜즈'였다. 요즘 이것저것 사우어젤리가 많지만 이것만이 내 기억 속의 '원조' 사우어 젤리다! 형광지렁이를 첫 입 베어 물고 혓바닥으로 설탕을 녹이는 순간 느꼈다.
'좋아하는 젤리 하나 정도는 생길지도 모르겠어!'
그렇게 1년, 2년... 우리는 사우어지렁이를 마치 영혼의 디저트처럼, 자주 주머니와 가방에 넣고 연습에 갔다. 연습은 늘 즐거웠다. 수업시간에 몰래 쪽지를 주고받는 중고등학생 여자애들처럼. 지휘자 집사님의 눈을 피해 지렁이 하나를 입에 넣고 그 상콤함에 빠져드는 짧은 시간. 1분의 씹는 시간. 졸음을 쫓는 달달한 시간.
세월은 빠르게 흘러 우리는 대학을 졸업했고 누구는 취업을 하고, 누구는 결혼을 하고, 누구는 여행을 다니고... 여러 모양으로 각자의 사정이 생기면서 우리의 성가대생활도 자연스럽게 끝이 났다.
그렇게 오래도록 친구들과 멀어져 내 삶을 사는 중에 어쩌다 이 새큼한 사우어 젤리를 만나게 되는 날이 있다.(사실 젤리도 잊고 지냈는데 어쩌다 젤친놈들의 엄마가 되고 나서 재회했달까?) 그런 날엔 언제나 20대 시절의 성가대 연습실로 휘리릭 돌아갔다. 패밀리 마트 계산대 앞에 줄 서던 친구들 얼굴이 떠올랐다.
영화 <<라따뚜이>>에서 레미가 만든 라따뚜이 한 입에 어릴 적 엄마의 식탁을 떠올렸던 안톤이고처럼. 사우어젤리 봉지만 봐도, 그 안의 설탕만 봐도, 그리고 기어이 봉지를 뜯어 하나 입에 넣고 혓바닥에 새큼한 맛이 감돌면 나는 여지없이 스무 살 언저리로 돌아간다.
나는 젤리를 좋아했던 걸까, 일요일의 그 시간을 좋아했던 걸까.
아니면 그 시절이 너무 좋아서 나이들어 이 젤리가 괜히 더 좋아져 버린 건 아닐까?
일요일 한낮의 장면들. 사우어젤리, 아이스 브레이커, 피치맛 이클립스 하여간 나른함을 물리칠 수 있을 거 같은(그러나 결국은 입에 털어 넣고 졸곤 했던) 아이템을 하나씩 가방에 집어넣고 깔깔거렸던 시간들. 신실한 신앙으로 찬양을 해서 행복한 게 아니라 주님께는 죄송하지만, 그냥 그 시간 자체로 행복했던 기억들. 100원이라도 더 싸게 젤리를 사기 위해 편의점은 절대 안 들어가는 아줌마가 된 지금, 그 시절 거침없이 편의점에 들어가 간식거리를 사던 걸 회상하면 참 새삼스럽다.
오늘은 트롤리 사우어웜즈 대신 하리보 사우어웜즈를 샀다. 막내에게 약속한 젤리가 있어서 어쩔 수 없이 하나를 사려는데 2+1 이란다. 지렁이 두 봉을 더 집어 들었다.
"이거 봐라. 하난 막내 거고 두 갠 내 거다!!"
약 올리며 지렁이 하나를 입에 넣었더니 애들이 치사하게 엄마 거만 사냐며 나눠먹자고 성화다. 내 특별히 나눠준다며 아주 생색을 내면서 새콤달달한 지렁이를 나눠먹었다.
젤리를 씹는 건지 추억을 씹는 건지 모르겠지만, 뭐 어떤 것도 나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