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세가 가져다준 유익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에이미 커디는 저서 <<프레즌스>>에서 '원더우먼 자세' 하나만으로도 삶에 성공을 불러들일 수 있다고 말한다. 어깨를 뒤로 젖히고 가슴을 활짝 펴고 턱을 치켜드는 자신감 있는 자세. 두 발을 당당하게 벌려 땅에 두고 허리에 손을 얹어 원더우먼 같은 포즈를 취해보라고 한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한 거라는 말을 흔하게, 대수롭지 않게 듣는다. 어떤 드라마를 보면서는 이런 생각도 했다. 남주가 처음에는 여주(질려버린 아내)를 가짜로 사랑하는 척하고 억지로 잘해주었는데 그러다 보니 점차 여주가 새롭게 보이는 경험을 했을 때. 그건 단순 로코물의 루틴이 아니라 어쩌면 사랑은 정말 애쓰는 '행위'가 먼저인 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
에이미 커디의 말을 비슷한 맥락으로 받아들였다. 웃어서 뇌를 먼저 속이는 것처럼, 당당하고 자신감 있는, 쫙쫙 늘리고 펴는 원더우먼의 자세를 하다 보면 정말로 마음속 자신감이 상승된다는 거다. 웅크린 자세, 쪼그라든 자세를 자주 취하는 사람과는 행동의 결과가 다르다는 거다. 자세와 몸짓, 얼굴과 몸의 모양이 사람의 마음과 행동의 결과까지 결정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오버 아닌가 싶지만, 실제로 원더우먼 자세를 취했던 집단은 테스토스테론 호르몬 수치가 높아지고 스트레스 호르몬인 코르티솔 수치가 떨어진다는 유의미한 실험결과가 책에 제시되어 있다.
너무 진지하게 이런 얘기를 꺼냈는데 사실 독서감상문을 쓰려는 건 아니고, 이 얘길 꺼내지 않고는 어제의 운전연습 얘기를 꺼낼 수 없어서 그만...
나는 초보 운전자다. 차선 변경은 언제까지 이렇게 어려울 건지, 뒤차는 언제까지 나보고 이렇게 뭐라고 할 건지(사실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는데 백미러로 보이는 뒤차의 라이트가 꼭 나를 노려보는 두 눈 같아서 혼자 자꾸 죄인모드가 되곤 한다.), 비상등 켜는 거 말고 증강현실 기술 같은 걸로 차 지붕 위에 '정말 죄송합니다', '이 은혜 잊지 않겠습니다' 이런 말풍선 띄우는 기술은 대체 언제 개발될 건지를 매일 궁금해하는 초보 운전자.
그래도 별 수 있나. 해야지. 여기 이 작은 도시 살 때 연습 많이 해놔야 나중에 엄마가 있는 서울에 가도 운전할 수 있지, 마음을 다잡으며 매일 겁먹은 거북이가 되어(느려서 거북이인 것도 있지만 목을 앞으로 쭉 빼고 겁먹은 채로 운전해서 거북이이기도 하다...) 조금씩 도로를 경험하고 있다.
어제는 집에서 10km 떨어진 도서관에 가야 했다. 마침 기름도 똑 떨어져서 주유를 하지 않곤 다녀오기가 힘들었다. 겁이 났다. 여러모로 왠지 운전을 미루고 싶어 지던 찰나, 에이미 커디의 원더우먼 자세가 생각났다. 물론 내가 취할 자세는 정확히는 커디 교수가 말한 원더우먼 자세는 아니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나는 뭐랄까? '운전 고수'인 척을 해보기로 했다.
운전석에 앉았다. 의자를 거진 직각으로 세워 목을 쭉 내밀고 어깨를 움츠리고 미간을 찌푸리며 쫄아서 가는 게 아니라 좀 편안해져 보기로 했다. 실상은 하수지만 제법 고수처럼 굴어보기로.
그렇다고 창문 밖으로 왼팔 하나를 척 걸친다거나, 핸들을 한 손으로 슥슥 돌린다거나, 왼다리를 가부좌 틀겠단 건 아니다. 그러다간 도서관 가기 전에 저승 먼저 갈지도 모른다. 그저 시트를 좀 넉넉하게 뒤로 젖히고(눕진 않았다) 목베개를 딱 좋은 곳에 고정시켜 최대한 목을 뒤로 기대는 것. 어깨 넓은 척을 하는 것. 거북목을 없애고 시선은 애써 넓고 여유롭게 두는 것. 그 정도를 했다.
좋아하는 노래 중 비트가 너무 산만하지 않은 곡을 골라 틀었다. 음악에 맞춰 손가락을 가끔 까딱거리며 달리다가 문득 생각했다.
아니, 나 왠지 운전 좀 잘하는 사람이 된 거 같은데?
웃긴 건 주유소에서도 그랬다는 건데...
항상 어버버 주저주저 혹여라도 누가 보고 비웃을까(당연히 아무도 비웃지 않고 아무도 남의 주유에 관심 없음) 움츠러든 채로 주유를 했다. 특히 주유구에 노즐 집어넣고 나서 '딸각' 고리 걸어 고정하는 거, 그게 너무 무서워서(매번 잘 안 걸린 거 같아서 내가 손을 놓는 순간 노즐이 팡 튀어나가 휘발유 분수 파티가 일어나는 상상을 한다) 맨날 엉거주춤 서서 손잡이 꽉 잡고 요상한 자세로 서 있었다.
오늘은 차에서 내릴 때부터 경력자처럼 해보기로 했다. 머뭇거리지 말자. 주유구 대충 맞춰 차 세우고, 시동 딱 끄고, 뚜껑 오픈 버튼 누르고, 휘리릭 내려서, 거침없이 액정을 눌렀다. 차 밥 먹이는 건 애 밥 먹이는 일과 다를 바가 없다는 바이브로!!
두리번두리번 사장님이 있나 없나 눈알도 도르르 굴리지 않고, 미련 없이 노즐 고정. 시크하게 고리를 탁 걸고 허리를 폈다. 이 고리는 네 생각과 다르게 항상 잘 걸려 있어, 휘발유 분수 파티 같은 건 없어, 하며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5만 원 다 찰 때까지 시간이 있는데 내친김에 바지 주머니에 손까지 찔러 넣어볼까? 여유롭게 주유하는 내 모습에 치얼스...
주행도 주유도 다른 날보다 한결 편했다. 운전 연습 때마다 두통도 자주 있었는데 이번엔 두통도 없었다. 아무도 없는 차 안과 주유소에서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를 외치면서 '말의 힘'에 의지할 수도 있었지만, 이런 '자세의 힘'이랄까 동작의 힘이랄까 행동의 힘이랄까, 이걸 느껴보는 게 굉장히 새로웠다. 맨날 우리 집 남자들한테 '허세 좀 고만 부려'라고 하는데, 약간의 허세로운(?) 자세가 뜻하지 않은 유익을 가져다주는 것도 같다.
내 목도 목이고 내 어깨도 어깨지만 또 아이들한테 잔소리를 한다. 더이상 물리적 거북목이 걱정되어 하는 말이 아니게 되었다. 움츠러든 목, 오그라든 어깨. 겉으로 보기에 안 예쁜 건 차치하고, 체형 문제도 뒤로 두고. 매사에 자신감이 부족하고 소극적인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한 번이라도 더 '할 수 있다'는 마음을 갖길 바라는 엄마. 그 마음으로 오늘도 허공에 흩어지는 잔소리를 한다.
"어깨 펴."
"목 위로 뽑아."
"당당하게."
필라테스 학원인 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