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해리포터... 말고, 우리 집 비밀의 방

못 버리는 사람의 최후

by 아드리셋


우리 집엔 '비밀의 방'이 있다. 출입금지이기도 한 이 방에는 온갖 것들이 쌓여있다. 조그마한 내 작업용 책상과, 남편이 결혼 전부터 쓰던 20년 넘은 행거, 행거에 무질서하게 걸려있는 아이들 겨울 외투, 여기저기서 받아온 온갖 에코백, 오래됐지만 멀쩡한 롱패딩, 12년 된 대형 결혼사진 액자 등등 다 말할 수 없지만, 가장 많은 지분을 차지하는 묵은 짐 중의 최고봉은....(막상 말하려니 매우 창피하다.) 그래도 많은 사람이 읽는 글은 아니니까 솔직하게 써본다. 최고봉은....


바로 잔뜩 쌓아놓은 아이들 교과서와 문제집이다.






첫째가 6학년이 되던 시점. 그 방엔 첫째의 초등 5년 동안의 역사...라고 하면 다소 오버스럽지만 오버가 아닌 것도 같고. 아무튼 5년 치의 교과서와 문제집이 있었다. 글로 쓰니 더욱 미친 사람 같다. 그때 둘째는 3학년이 되었을 땐데, 개는 아직 문제집 푼 게 딱히 없어서 첫째 거만큼 많진 않았지만 걔 거 역시 교과서며, 피아노 학원 교재며 하여간 비밀의 방에 아주 성실하게도 쌓아두었다.



'혹시 쓸데가 있지 않을까?'

'첫째 거 남겨놓으면 나중에 둘째 거랑 비교해 보는 재미가 있지 않을까?'

'나중에 둘째 예습이라도 필요할 때 첫째 교과서를 참고하게 되지 않을까?'

'문제집은 버려도 될 거 같은데 열심히 한 흔적들을 버리기는 너무 아까비...'


한 학기가 끝나고 교과서를 가져올 때마다, 방학 때 문제집을 한 두 권씩 해치울 때마다 이런 생각들을 했다. 그러곤 다 쓴 책을 무념무상으로 툭, 마치 재활용장에 쓰레기 버리듯 그렇게 비밀의 방 한 구석에 던져 놓았다. 던져놓는 건 참 쉬웠다. 1화에도 청소 이야기를 했지만 그래도 우리 집, 쓰레기장 정도는 아니다.(진짜다.) 꼼꼼한 살림꾼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사람 사는 집처럼은 유지하며 사는데... '이름을 부르면 안 되는 그 자'처럼 '그 방'은, 그 방만큼은! 가히 '비밀의 방'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더럽고 은밀하게 유지되었던 것이다.


절대 오픈되지 않을 것 같던 그 비밀의 방이 작년 겨울의 어느 날, 봉인해제 되었다. 세 아들의 수면방을 만들기 위해 침대 세 개를 주문했기 때문이다! 그러려면 수면방으로 쓸 방에 있던 책상 두 개를 다른 데로 빼야 하는데 공간이 마땅치 않았다.

비밀의 방. 거기뿐이었다. 그렇게 남편과 나는 아침부터 반나절이 넘게 쉬지도 않고 그 방을 비워냈다.


남편은 오래된 행거를 해체했다. 나는 손 안 갔던 옛날 옷들, 이미 너무 작아진 아이들 겨울 외투 같은 걸 싹 정리했다. 행거에 가려져 안 보였던 군데군데 있는 벽의 먼지와 곰팡이를 닦아냈다.

결혼액자 프레임도 다 뜯었다. 분리할 수 있는 작은 사진만 분리했다. 이 와중에 또 '사진은 버릴 수 없지 않아?'라며 '버리지 못하는 사람'의 면모를 드러냈는데... 같은 사진이 앨범으로 있지만 굳이 또 뜯어서 챙겼다.

비밀의 방에 딸린 콩알만 한 팬트리에 처박혀 있던 베베블록도 버렸다.(셋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했는데 베베블록이 아직까지 집에 있다니 이게 무슨.)


그리고 대망의 교과서와 문제집. 이건 마치 숨참고 러브 다이브 아니고 눈감고 트렁크 다이브. 여행용 트렁크 세 개에 나눠 담아 남편이 열심히 재활용장으로 날랐다.(세 개로 끝났다고는 안 했다...)

못 버리는 사람은 하나씩을 남긴다. 아이들 일기장이랑, 첫째가 고학년 되면서 제법 사람답게 쓴 글쓰기 노트는 차마 버리지를 못했다. 귀엽게 쓴 알림장도 남겨두고 싶었지만...(아, 나 정말 어뜩하지?).


"오빠. 나 이건 갖고 있을래."

"그래. 평생 갖고 있지 그러냐, 평생."



그렇게 방의 절반을 비우고 거기에 책상을 옮겨다 놓으니, 이건 뭐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간단 말로도 모자라고, 묵은 떼를 벗겨내는 기분이란 말로도 모자라고. 뭐라 해야 할까. 이건 정리도 아니고 대청소도 아니었다. 과장 조금 보태서 '반 이사'였다. 숙원사업을 해치운 나 자신과 남편에게 짜장면을 선물하기로 했다.


"나 힘들어서 저녁 못하겠어."

"짜장면이나 먹으러 가자. 원래 이사한 날은 짜장면 먹는 거잖아."



그렇게 우리 집에서 비밀의 방이 사라졌다. 묵은 짐과 이별하던 날이 한겨울이었는데, 창문 열고 청소했더니 안 그래도 춥던 방이(비밀의 방답게 냉골로 두는 날이 많았다.) 더 추워져서 오랜만에 난방도 돌렸다. 바닥이 비워져서 그런가 훈기도 더 잘 올라오고, 쾌적하고, 막 또 들어가고 싶고. 그날 밤 그 방에 들어가서 블루투스 키보드를 켜고 일기를 썼다. 글이 아주 술술 써졌다.(그날의 일기가 이 글의 초고라고 할 수 있겠다.)


아, 둘째 교과서와 첫째 교과서를 비교해 보면 재미가 있고 어쩌고, 예습할 때 참고하면 좋고 어쩌고는 다 허황된 꿈이었다. 비교는 무슨 비교, 예습은 무슨 예습. 같은 교과서 두 개 펼쳐놓고 깔깔거릴 마음의 여유도 없고, 예습이 다 뭐냐 숙제나 잘 해가 제발....




비밀의 방 빙산의 일각


keyword
이전 01화청소가 낫냐 요리가 낫냐 물으신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