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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드리셋 Jun 27. 2022

남편의 당뇨 진단과 나의 과부하

심란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고



당뇨 진단을 받은 지 5일째다. 술도 안 마시고 단 음식을 좋아하긴 하지만 딱히 자주 먹진 않는, 마흔 살도 안 된 내 남편 얘기다. 유전이니 언젠간 남편도 당뇨가 오겠지, 그렇지만 아직은 아니겠지 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은 아니었지만 그저 남의 일이었던 것이 생각보다 빨리 왔다.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심란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당뇨가 상당히 진행된 것도 아니고, 요즘은 젊은 사람 당뇨도 많고, 시한부 선고도 암 선고도 아닌데 웬 유난이냐 할 수 있지만 아니, 배우자의 상황이라는 게 입장이라는 게 감정이라는 게 또 있는 거잖아요...






번외 이야기부터 하자면, 사실 나를 더 황당하고 막막하게 했던 건 진료를 담당한 동네 내과의사의 태도였다. 결과지를 보면서, '이 정도면 당뇨죠'라는 한 마디와, '췌장이 피곤하겠죠'라는 말에 어리둥절해하는 우리 부부에게 '인슐린이 호르몬인 건 아시죠? 인슐린이 췌장에서 만들어지는 건 아시나요?'라는 무시인 듯 무시 아닌 무시 같은 한 마디 정도를 끝으로 별 말을 해주지 않았다. 정밀검사라든지 당장 실행에 옮겨야 할 식단 조절 같은, 다음에 밟아야 될 단계가 궁금했을 뿐인 나에게, 집 결과지 도착하면 알아서 결정하라고(내가 그걸 알아서 결정할 거 같으면 의사를 하지 왜 이러고 있겠냐) 말했다. 그리곤,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몰라서 못 하는 거 아니지 않냐고, 아는데 하기 싫은 거 아니냐고, 아는 거 하라고 퉁명스럽게 대답했다.(아.. 뉘예뉘예..)


이렇게 환자와 환자의 배우자는 인터넷에 의지한다(환자 본인보다 내가 더 공부하는 듯. 이유가 뭐지??). 당뇨가 어떤 병인지, 인슐린과 췌장과 혈당과 뭐 어떤 관계가 있는지, 저 의사보다 상세하고 친절히 설명는 글들을 찾아 읽고, 어느 병원에서 재검을 받을지 당뇨 전문 내과에 갈지 대학병원에 갈지 고민을 하고, 당뇨인들이 모인 카페에 가입을 하고... 당장의 저녁거리부터 바꾸려고 잡곡과 채소를 사러 시장에 가고.


세 아이가 잠든 후 밤에 혼자 기진맥진한 몸으로 거실에 누워 있자니 비로소 부정적 감정들이 몰려왔다.

결혼 전에도 그랬다. 결혼 준비랍시고 한창 유행했던 레몬땡땡 카페에 하루가 멀다 하고 들어가선, 하라는 준비는 안 하고 결혼생활에 관한 온갖 부정적인 이야기만 잔뜩 읽어댔다. 결혼까지 갈 것도 없고 연애를 할 때도 그랬다. 시작도 하기 전에 서로 몇 개 월 못가 질리게 될 거라는 생각, 권태기가 금방 올 거라는 생각부터 했다. 언제나 끝을 먼저 생각하는 못된 습관이 남편의 당뇨 소식이라고 가만히 숨어있을 리 없다. 뭐든 해보면 되지! 하는 파이팅 넘치는 낮의 생각과는 달리, 밤까지 이어진 긴 검색은 점점 나를 실체도 없는 구렁텅이로 몰아갔다.

 

친구 한 명은, 요즘은 젊은 사람도 당뇨로 고생한다지인 중에 누가 합병증으로 발가락을 절단하고 실명을 했다는 이야길 했다. 또 다른 친구는, 부모님이 당뇨로 고생하셔서 다른 질병으로 수술이 급박할 때도 당이 안 잡혀 수술 시작이 힘들었다는 이야길 했다.(걔네는 죄가 없다. 내 걱정에 해준 말일뿐이다.) 카페를 둘러보니, 자다가도 혈당 혈당.. 숫자에 집착해서 스트레스가 악화되어 수면 장애까지 온 얘기, 배우자만 발 동동거리고 본인은 정작 음식 절제 못 하고 아내 몰래 라면 먹고 케이크 먹고 하다가 결국 둘의 관계까지 망쳐버린 이야기 등 오만 좋지 않은 장면들이 가득했다.


5일째 검색을 하고 또 하고, 찾아보고, 이해하고, 식단을 고민했다. 그리고 유난히 기운 없어 보이는 남편을 보고 있자니...


과부하가 온다.

가뜩이나 일의 순서를 잘 정하지 못하고, 이것도 잊고 저것도 잊고, adhd인지 우울증인지 1인분의 삶을 잘 살아내기도 벅찬 인간이 어쩌다 애는 또 셋이라 하루하루가 소란 내지는 소용돌이인데. 어린이집은 어린이집대로 고학년은 고학년 대로 저학년은 저학년대로 챙길 것들이 넘친다. 학원도 제대로 정하지 못해 문제집이라도 풀리려 이걸 사나 저걸 사나 열심히 찾고 알아보고 채점도 밀리고... 그러다가 검색의 메인 테마가 순식간에 바뀐 것이다. 막 1학년이 된 둘째 역시, 교회에서도 피아노 학원에서도 집에서 어머니가 이것 좀 봐주세요 저것 좀 봐주세요, 그 와중에 친구랑 밖에서 놀겠다는 시간도 맞춰봐야 하고, 보이 티 나는 노동이면 차라리  억울하지, 살림과 돌봄 보이지 않는 티 안 나는 노동에 과부하가 걸려버렸다.


부담이다.

완치가 없는 '평생'이라는 꼬리가 부담스럽다. 아이돌도 아니고 뭣도 아니면서 평생 몸을 관리해야 한다니. 뭐 좋게 생각하면 이렇게 된 김에 꾸준히 식단 조절하면서 규칙적으로 운동하면서, 타의이긴 하지만 경각심 갖고 살아가면 되지 싶지만, 어쨌든 환자가 되어버린 건 또 다른 문제다. 살 뺄 거야, 몸 만들 거야, 이 차원이 아니니까. 먹고 싶은 거 마음껏 못 먹는다니 본인이 제일 딱하지만, 먹고 싶어 하는 걸 보고 있, 먹으려는 걸 막아야 하는 내 맘도 편하지만은 않다. 퇴근 후 한 끼 먹는 집밥 주면서 양을 팍 줄여서 줘야 하는 것도 못할 짓이다. 아이들 때문에 스트레스 많이 받은 날 둘이 티비 보면서 치킨 한 마리 뜯는 거, 그 자극적인 맛과 기분과 시간을 가끔 즐겼었는데. 평일 뭐 대단한 건 아니어도 그래도 있는 힘 쥐어짜내서 열심히 집밥 해 먹고 주말 한 끼는 세상 편한 마음으로 배달이나 식당 음식을 건강하지 않게 즐기곤 했는데. 뭔가 더 퍽퍽해질 거 같은 기분에 괜히 쪼그라든다.


아이들은 세 명 모두 성장부진에 체중미달이다. 백미든 밀가루든 탄수든 기름이든 당이든 신경 쓰지 말고 잔뜩잔뜩 해 먹이라는 성장센터 선생님 말에 그래 뭐든 먹이자며 가리지 않고 이것저것 주고 있는데, 식단관리가 8할인 이 병에 나는 이제 밥상을 어떻게 차려야 하는가 끼니를 어떻게 때워야 하는가! 주부9단도 아니고 손도 느린 나는 이걸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머리가 아파다. 애들이 잘 안 커도 내 탓이 되고, 남편의 당수치가 높아져도 내 탓이 되는 미라클...!

한숨 푹푹 쉬다가도, 자기 몸은 자기가 챙겨야지 싶다가도, 내가 병 얻었을 때 남편이 옆에서 한숨만 쉬고 나보고 알아서 챙기라 하면 난 또 서럽고 서운할 텐데? 우린 너무 부부라는 배를 타버렸는 데 그러면 안 되지 싶다가, 또 문득 주부 엄마라는 이유로 너에 비해 압도적으로 내 탓이 될 일들이 많아지는 거 같아 억울했다가.

양가 부모님들껜 당분간 말하지 않기로 했다. 어른들 목소~~리가 들려~~~ 잘 챙겨 줘라, 부추를 줘라, 돼지감자를 삶아줘라, 니가 엄청 신경 써야 한다, 잘 챙겨줘야 한다...









어떤 처방도 지시도 없이 그저 검사결과지가 집에 도착하기만 기다리고 있다. 최근 유독 많이 피곤해하던 그는, 진단을 받은 뒤 식단 조절로 배가 고프고 허하니 늘 더 축축 쳐지고 기분이 가라앉는 것 같다. 나도 덩달아 기운이 빠진다.


근데 또 별 수 있나.

나와 비슷한 사고 과정을 거친 당뇨인 아내 2년 선배는 내게 말했다.

"야. 죽으라는 법은 없더라구!"

이러니 저러니 부담이니 걱정이니 해도, 멀리 보지 말고 그냥 늘 할  생각하는 수밖에 없다. 계란을 삶고 현미와 보리를 사와 밥을 짓고 소분하고. 평소 적게 사던 야채를 좀 더 많이 사고, 애들 거 따로 남편 거 따로 못 하겠으면 한 큐에 끝낼 수 있는 저녁 메뉴를 고민해보고. 장 볼 걸 메모한다.  단순한 마음이 얼마나 갈까, 그래도 아직은 괜찮은 기력이 얼마나 갈까, 다음 주엔 될까, 모든 게 최악인 생리 1주일 전 주간엔 어떨까, 하루하루에 집중하며 매일 지낼 수 있을까 이런 염려들이 관성을 버리지 못하고 간간이 좀 섞이긴 하지만.

부담 갖고 걱정하고 과부하가 오는 모든 건 다 사랑하기 때문이 아닐까. 사랑하니까, 오래오래 건강하게 함께하고 싶으니까. 오늘은 과일가게에 들러 예약해놓은 블루베리를 찾고, 수육을 삶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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