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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기억의 뿌리를 사회적 집단 기억으로

아니 에르노 <단순한 열정>

<단순한 열정>의 저자 아니 에르노는 1940년 노르망디의 소읍 이브토에서 태어났다. 노동자에서 상인이 된 부모 아래에서 성장하며 프랑스 사회의 계급 구조를 피부로 체득했고, 이후 루앙 대학교에서 문학을 공부한 뒤 오랜 시간 교육자로 활동했다. 그녀는 자신의 삶과 주변 여성들의 경험을 글로 풀어내며 '자전적 글쓰기의 선구자'로 불리게 된다. 202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아니 에르노를 선정한 심사위원회는 “개인 기억의 뿌리를 사회적 집단 기억으로 끌어올리는 탁월한 능력”을 그녀의 문학적 공로로 꼽았다.

<단순한 열정>은 제목 그대로, 한 여성이 겪은 단순하지만 치명적인 사랑의 열정을 기록한 짧고도 강렬한 작품이다. 화자인 ‘나’는 어느 날 불쑥 시작된 외국인 유부남 A와의 연애에 빠진다. 그는 정해진 시간에 전화하거나 집에 잠시 들르는 식으로만 그녀의 삶에 개입한다. 하지만 ‘나’는 그가 올지 모를 시간에 모든 일상을 유보한 채 기다리고, 숨 쉬듯 그를 갈망한다. 외출은 물론이고 진공청소기나 헤어드라이어 소리조차 꺼두며 전화벨 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쓴다. 결국 그녀는 그를 기다리는 일을 중심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책의 초반부에서 작가는 이렇게 고백한다.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 약속 시간을 알려올 그 사람의 전화 외에 다른 미래란 내게 없었다."(p.11)


이 고백은 연애를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경험했을 법한 '기다림'의 본질을 날것 그대로 들춰낸다. 사랑에 사로잡힌 여성이 어떤 방식으로 일상을 포기하고 감정에 침식당하는지를, 작가는 숨김없이 적는다. 일상적인 활동조차 그 사람을 기다리는 행위에 흡수되고, 감상적이고 진부한 대중가요마저 위로가 되는 시간들. ‘사랑’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비이성적이며 때로는 자기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 사람과 사귀는 동안에는 클래식 음악을 한 번도 듣지 않았다. 오히려 대중가요가 훨씬 마음에 들었다. 예전 같으면 관심도 갖지 않았을 감상적인 곡조와 가사가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런 노래들은 솔직하고 거리감 없이 열정의 절대성과 보편성을 말해주었다. 실비 바르탕이 노래한 <사람아, 그건 운명이야>를 들으면서 사랑의 열정은 나만이 겪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대중가요는 그 당시 내 생활의 일부였고, 내가 사는 방식을 정당화시켜주었다.(p.23)


그러나 이 책은 단지 감정의 나열로 끝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고 사랑은 끝나지만, 그녀는 이 경험을 통해 자신을 더 깊이 들여다보고, 삶의 본질에 다가선다. 글쓰기란 그 욕망의 기록이고, 이 기록을 통해 '나'는 세상과 더욱 굳게 연결된다. 그녀는 말한다.


“나는 내 온몸으로 남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그녀에게 사랑이란, 단지 관계의 완성이나 결과를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욕망에 솔직해지는 경험이고, 삶을 오롯이 살아냈다는 증거다. 그리고 에르노는 그 욕망을 기록함으로써 한 여자의 시간이 얼마나 깊고, 절박하고, 진실했는지를 보여준다.


"그 사람이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지금은 그 모든 일들이 다른 여자가 겪은 일인 것처럼 생소하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p.65)

그러나 그 사람덕분에 나는 남들과 나를 구분시켜주는 어떤 한계 가까이에 어쩌면 그 한계를 뛰어넘는 곳까지 접근할 수 있었다.(p.66)


<단순한 열정>은 억눌림 없이 사랑에 휩쓸렸던 기억을 가진 모든 이들을 위한 책이다. 그리고 사랑의 깊이만큼이나, 그 부재의 어두움까지도 포착해낸 이 얇은 책은 단순히 ‘한 여자의 이야기’를 넘어, 인간 존재의 깊은 진실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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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독서토론을 했다. 책에 대한 별점은 역대급으로 낮았지만, (1.5점~4.0 사이) 두 시간 토론 이후에는 별점을 올리겠다는 샘들이 늘어나서 상당히 고무적이었다.


"왜 이런 작품이 이토록 주목 받는가? 지하철에서 펼치고 읽다가 초반부터 너무 적나라한 표현에 깜짝 놀라 슬며시 표지를 감췄다. 결핍과 상처 많은 여자의 자기고백처럼 느껴져서 불편했다." 등의 부정적 의견이 쏟아졌다. 또 한편으로는 "유부남과 사랑에 빠진 자신의 감정과 상태를 이토록 솔직하고 생생하게, 도덕적 자기검열 없이 그야말로 '단순한 열정' 그 자체로 묘사할 수 있다는 점이 놀라웠다. 개인적 서사를 어디까지 오픈할 수 있는지 자전적 글쓰기(오토픽션)의 한계를 넘어선 것 같다." 등의 호평도 있었다.


논제를 중심으로 하나하나 토론해나가다보니, 아니 에르노의 범상함을 새롭게 발견할 수 있었다. '용납'할 수는 없지만 '이해'할 수는 있겠다고 말한 샘도 있었다. 이처럼 책모임을 통한 토론은 우리의 선입견과 편견, 도덕적 잣대와 속단을 내려놓고 사람과 작품 그 자체를 바라보게 하고 타인을 이해하게 한다는 점에서 언제나 감동적이다. 선택논제에서 아니 에르노가 말한 '사치'의 개념에 공감 여부를 묻자 대부분이 '공감'을 선택할만큼 그녀의 생각에 어느 정도 설득되기도 했다.


어렸을 때 내게 사치라는 것은 모피 코트나 긴 드레스, 혹은 바닷가에 있는 저택 따위를 의미했다. 조금 자라서는 지성적인 삶을 사는 게 사치라고 믿었다. 지금은 생각이 다르다. 한 남자. 혹은 한 여자에게 사랑의 열정을 느끼며 사는 것이 바로 사치가 아닐까.(p.67)


책 후반에 실린 해설부분을 읽다가 ‘아비투스(habitus)’라는 용어를 만났다.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성장한 에르노가 학업에 몰드해 사회적 신분상승을 이루었으나 '아비투스'를 떨쳐버리지 못했다는 대목이 나왔다. '아비투스'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제시한 개념으로, 개인의 사고방식, 감각, 행동 양식 등을 형성하는 내면화된 습성 또는 사회적 체화를 의미한다고 한다.


‘아비투스’는 우리가 자라온 환경, 교육, 계급, 경험 등을 통해 몸과 마음에 배어든 행동과 사고의 경향성을 뜻한다. 즉, 우리가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하고, 느끼고, 행동하게 되는” 방식이다.

예를 들면,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아이는 미술관이나 음악회 같은 문화생활을 자연스럽게 접하며, 그런 경험이 몸에 밴 문화적 감각과 태도를 형성하는 반면, 노동자 계급에서 자란 사람은 실용성과 생존 중심의 사고방식을 체득하게 되며, 이는 아비투스로 작용해 그의 선택, 취향, 가치관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아비투스는 “나는 왜 이런 선택을 하지?”라는 질문에 대한 깊은 사회학적 답변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 에르노가 자신의 출신성분을 벗어나고자 애쓰면서도 마치 '딴 세상에 유배된 망명객'같은 느껨을 안고 살았다고 하는 표현이 무슨 의미인지 알 것 같았다. 해설부분에 언급된 '아비투스'관련 원문은 다음과 같다. 그녀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게 하는 중요한 키워드라는 생각이 들었다.


열세 살에 학업을 멈춘 아버지는 물질적 자산뿐 아니라 상징 재산의 축적에서도 빈곤을 면치 못했음을 눈치챈 작가는 설령 빈곤에서 벗어나도 부모의 몸에 밴 습관이나 가치관, 즉 사회학 용어를 빌리자면 '아비투스'를 떨쳐버릴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부모 세대에 한정된 진리가 아니라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고통과 수치의 근원이 된다. 부엌에서 몸을 씻고 취객의 저속한 농담을 감수하며 마당 구석의 변소를 사용하고 술집 다락방에서 추위에 떨며 자야 했던 작가는 대학 기숙사에서 처음 샤워기와 수세식 변기를 만나고 음식, 옷차림에서부터 음악, 연극에 이르기까지 부모의 취향과는 전혀 다른 생활세계로 진입한다. 이후 교수 자격시험에 합격하고 결혼을 통해 시부모로부터 반듯한 대접을 받으며 비로소 세련된 중산층 지식인이 된 것에 자부심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남편과 시부모의 친절과 예의범절이 중산층의 위선과 가식에 불과하다는 사실도 부차적으로 깨닫게 된다.

'출신 성분과 고향을 버리고 딴 세계에 유배된 망명객'이라는 자의식은 그녀의 작품에서 집요하게 반복된다.(p.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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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에르노 #단순한열정 #2022노벨문학상수상자 #아비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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