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맹 가리의 자전적 소설 <새벽의 약속>
자식의 입신양명을 위해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했던 동양의 어머니들이다. 그런데 그들과 견주어 전혀 밀리지 않는, 대단한 서양 어머니 한 명을 책 속에서 만났다. 바로, 프랑스 작가 로맹 가리의 어머니이다. <새벽의 약속>은 로맹 가리가 마흔네 살에 자신의 초반 30년의 삶을 회고하며 쓴 자전적 소설이자, 이제는 세상에 없는 어머니에 대한 진한 그리움을 담은 '사모곡'이기도 하다. 2018년에 프랑스의 국민 여배우인 샤를로뜨 갱스부르 주연의 동명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영화 <새벽의 약속> 감독 에릭 바르비에 출연 샤를로뜨 갱스부르, 피에르 니네이, 디디에 보우돈, 장 피에르 다루생, 캐서린 맥코맥, 피네건 올드필드 개봉 2018.11.22.
로맹 가리의 어머니는 그야말로 '긍정 확언'의 대가이다. 어머니가 로맹의 어린 시절에 로맹을 향해 선포한 원대한 비전은 현실에서 그대로 다 이루어졌다. 어머니는 자기 계발서 수십 권을 이미 섭렵하신 듯하다. '끌어당김의 법칙', '시크릿', 'R=VD', 조셉 머피의 '잠재의식의 법칙'을 다 간파한듯한 진격의 행보를 보인다. 러시아 태생의 유대인이었던 어머니는 미혼모로 로맹을 낳아 홀로 키웠다. 폴란드로 건너와 월세도 제때 내지 못할 만큼 빈한한 살림이었지만 아들 로맹을 미래의 프랑스 대사로,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훈자로, 위대한 작가로, 대중 앞에서 당당하게 선포하는 어머니의 모습은 놀라움 그 자체다. 그리고 매일 로맹에게 그가 싸워야 할 세상의 부조리한 존재들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번도 아들 앞에서 힘든 내색을 하지 않았고, 자신의 운명과 맞서 삶을 헤쳐나갔다. '자녀 비전 코치'로 로맹의 어머니 보다 더 강력할 수 있을까 싶다.
폴란드 월노에 임시로 정착해서 살 무렵, 다세대 주택의 이웃 주민들은 러시아에서 온 어머니를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고 뒤에서 비방하기까지 했다. 수모를 당한 어느 날 어머니는 집집마다 벨을 누르고 계단으로 사람들을 불러낸 다음, 여덟 살짜리 아들 로맹을 앞에 세우고 큰소리로 선포한다.
"더럽고 냄새나는 속물들아! 감히 너희들이 누구와 이야기하고 있는 줄이나 아는 게야? 내 아들은 프랑스 대사가 될 사람이야.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을 것이고, 위대한 극작가가 될 거란 말이야. 입센, 가브리엘레 단눈치오가 될 거라구! "
로맹은 어린 마음에 상처가 될 수 있었던 그날의 풍경을 평생 잊지 못한다. 그리고 그에게로 쏟아지던 비웃음과 폭소가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점을, 그 웃음 덕분에 오늘날의 자신이 되었음을 고백한다. 죽고 싶을 만큼 수치스러웠던 그 순간을 동력 삼아 치열하게 싸웠고, 어머니의 꿈이 한낱 조롱거리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어머니의 인생이 해피엔드가 되게 하기 위해 평생 고군분투했다고 말한다.
나는 믿는다. 어떤 사건도 그랑드 포윌랑카 16번지, 윌노의 낡은 집 층계에서 내게로 쏟아지던 그 폭소보다 내 인생에 더 중요한 역할을 하진 못했다고. 그 웃음 덕에 나는 오늘날의 내가 되어 있는 것이다. 가장 나쁜 점에서도, 가장 좋은 점에서도 그 웃음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어머니는 나를 꼭 끌어안고 웃음의 광풍 아래 머리를 쳐들고 꼿꼿이 서 있었다. 어머니에겐 단 한 점의 무안함이나 창피스러운 기색도 없었다. 어머니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p.51)
놀랍게도 어머니의 예언은 로맹 가리의 인생에서 거의 대부분 이루어진다. 프랑스 총영사이자, 영토 해방의 용사로서 레지옹 도뇌르 수여자가 되었고, 그의 데뷔 소설 <유럽의 교육>으로 최고 비평가상을 수상한다. 훗날 공쿠르 상을 두 번이나 수상하는 작가가 되기도 한다.
어머니는 그 어떤 비루한 현실 앞에서도 주눅 들거나, 비관하거나, 좌절하는 법이 결코 없었다. 2차 대전에 참전한 아들과 헤어져 있는 동안 오랜 지병으로 죽음을 예감한 어머니가 선택한 행동은 독자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우리가 헤어진 지 어언 여러 해가 지났구나. 난 이제 네가 날 보지 않는 데 길이 들었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결국 난 영원히 있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내가 너를 한 번도 의심해 본 일이 없음을 명심해라. 네가 집으로 돌아와 모든 것을 알았을 때 나를 용서해 주기 바란다. 나는 달리할 수가 없었단다'(p.403)
어머니를 괴롭히는 세상의 부조리한 신들과 맞서 승리의 월계관을 어머니에게 드리기 위해 투쟁했던 로맹의 삶, 결코 쉽지 않은 여정이었지만 마침내 그는 살아냈다. <새벽의 약속>은 유난히 발췌할 문장이 많았고, 곱씹어 생각해야 하는 표현이 많았던 작품이었다.
로맹 가리의 작품을 사랑하는 독자라면, 그의 작품 면면에 흐르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근간이 무엇인지 궁금한 독자라면, 극한의 고통 속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배경이 알고 싶다면, 무엇보다 에밀 아자르, 샤탕 보가트, 포스코 시니 발디 등 무수한 가명이 필요했던 로맹 가리의 특이한 삶의 이유가 궁금하다면, 그의 자전적 소설 <새벽의 약속>을 꼭 한번 읽어보길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