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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트 스페이스 Nov 17. 2017

에드워드 호퍼@호퍼 하우스 앤 아트 센터


호퍼의 특별전에 가기로 한 날, 호퍼의 고향인 뉴욕 나이약에 숙소를 잡았다. 무리해서 돌아올 수 있었지만, 그래도 나만의 여유를 즐기고 싶었다. 일이든 여행이든 많은 호텔들을 돌아다니다 보니 꼭 맘에 드는 호텔들은 메모를 해두는데, 이곳에 좋아하는 타임 호텔이 있다. 맨해튼에 있는 타임 호텔보다 규모는 작지만 분위기는 더 세련되고 편리하다. 그리고 무엇보다 허드슨 강이 바로 보이는 뷰가 좋다. 혼자 숙박하므로 루프탑의 방을 예약했는데, 체크인을 하면서 호퍼가 잠든 오크힐 세미트리 뷰 쪽으로 방을 줄 수 있느냐 물었다. 그러겠다고 했다. 룸으로 가는 복도 장식도 아주 독특하다. 소소한 디테일 장식이 맘에 든다.



창밖으로 바로 보이는 오크힐 세미트리, 바로 저곳에 호퍼가 잠들어있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그의 부인 조세핀, 부모님, 여동생 매리언과 함께 잠들어 있다. 드넓게 드리워진 평원과 언덕에서 멀리 허드슨강을 바라보게 디자인되어 너무나 아름다운 곳이었다.



호텔에 짐을 풀고, 일을 마치고, 뉴저지에 사는 친구와 잠깐 만나 수다를 떨고 밤늦게 호텔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와인바가 있는 로비로 내려갔다.



BV's Grill 음식도 아주 유명하다. 특히 이곳에서 맛볼 수 있는 락커펠러 오이스터가 참 맛있다. 이제껏 먹어본 가장 맛있는 프렌치 어니언 숩, 오래도록 그 맛을 잊을 수 없었다.



든든히 속을 챙기고 에드워드 호퍼 하우스로 갔다.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한다는 화가 에드워드 호퍼, 그의 집이라고 하면 대부분 그가 첫 그림을 판매했던, 1913년부터 1967년 세상을 뜰 때까지 살았던 뉴욕 맨해튼 워싱턴 스퀘어에 있는 호퍼 스튜디오를 떠올리지만 개인적으로 이 곳에서 진짜 호퍼를 만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성공한 화가로서의 에드워드 호퍼보다는, 수줍음 많고, 외로움에 떨고, 생각이 많고, 수심에 가득 차기도 했던, 인간 호퍼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호퍼의 네덜란드인 조상이 미국 땅에 첫발을 디딘 것은 1652년이었고 호퍼의 할아버지가 이 집을 지은 것은 1858년이었다. 그리고 1882년, 바로 이 집에서 호퍼가 태어났다.


이 집의 이름은 "호퍼의 소년 시절의 집 Hopper's Boyhood House"이라는 이름이 붙어있지만 실제 호퍼는 이 집에서 28세까지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호퍼와 여동생 대에서 대가 끊어졌기 때문에 이 집은 호퍼 가족만이 대대로 거주했던 진짜 Hopper's House 였다. 1967년 호퍼가 세상을 떠나자 시에서는 이 집을 허물고 아파트를 짓기로 결정을 했다. 그러자 주민들은 반발을 하고 너나 할 것 없이 개인 수표를 써서 기금을 모으고 망치와 연장을 들고 이 집을 직접 복구하는 데 앞장섰다고 한다. 그 주민들의 단결된 힘으로 이 집은 현재 아트센터로 관리가 되고 자원봉사자들이 나서서 집을 관리하고 센터를 운영해오고 있다.   



입구로 들어가 바로 특별전시실로 향했다. [Hopper Meditation]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전시는 뉴욕 출신 그래픽 디자이너 Richard Tuschman 의 작품들로 구성이 되어있다. 리처드는 건축과 사진을 동시에 공부한 그래픽 디자이너로, 직접 미니어처 가구들을 꼼꼼히 제작했다. 그렇게 작품의 배경을 만든 다음 실제 인물들을 촬영하고, 그 둘을 정교하게 합성하는 독특한 방식으로 이 작품들을 완성했다고 설명이 되어있었다. 뉴욕 출신인 그는 뉴욕을 너무나도 사랑했고, 미국과 뉴욕을 대표하는 화가인 에드워드 호퍼의 작품들을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그리 넓지 않은 공간에 사람들이 점점 많아졌다.



영구 전시가 있는 공간으로 이동해 꼼꼼히 둘러보았다.



엄마에게 그림과 함께 써 보낸 엽서가 전시되어있다. 무뚝뚝했다고 하지만 참 스위트 한 아들이었던 것 같다. 부유한 가문의 딸로 어려움 없이 자란 그의 어머니는 그림을 즐겨 그렸는데 당시 여성들이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등은 전혀 인정을 받지 못한 시기여서 이 어머니 또한 빛을 보지 못하고 그저 취미로 그림을 그렸다. 그 어머니는 아들이 그린 이 그림을 보고 아들의 천재성을 직감했고 아들을 근처 문구점에 데리고 가서 물감이며 스케치북이며 붓이며 맘껏 고르라고 했다고 한다.  



미술교육을 전혀 받지 않은 소년 호퍼가 그린 그림들이 많다. 천재는 이렇게 타고나는 건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에서 [Little Boy Looking at the Sea, 1891] 호퍼가 9살 나이에, 학교에서 받은 성적표 뒷장에 그린 그림, 언제 봐도 감탄이 절로 나온다. 특히 이 그림에 대해서 설명을 많이 해주셨는데 이 그림은 당시 아홉 살이던 호퍼가 성적표를 받아 들고 집에 오는 길에 성적표 뒷장에다가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뒷짐을 지고 바다를 보고 있는 작은 소년.. 외로움과 쓸쓸함이 그대로 느껴졌다. 생을 통해 호퍼가 절실히 표현하고자 했던 인간 본연의 외로움, 단절, 소외, 메마름이 단적으로 느껴지는 듯했다.  호퍼 전문가들은 이 그림에서 훗날 침묵을 사랑하고 깊은 사색을 즐겼던 호퍼를 만날 수 있다고 말한다.



호퍼가 열다섯 살에 그린 자신의 다락방 그림도 있다. 호퍼는 이곳 나이 약 하이스쿨 재학 시절 다른 학과목 공부는 크게 우수하지 못했지만 그림과 수학, 특히 기하학은 우등반에 있었는데 그렇게 기하학에 재능이 있었던 것이 그의 그림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설명을 해주었다. 특히 이 그림이 그 점을 잘 드러내 준다고 말했다.  특히 이 다락방은 호퍼가 그림을 그리게 되고 자신의 스튜디오를 만들기 전까지는 이렇게 운동기구들로 가득 차 있었는데 그 이유는 키가 무지 컸지만 말수가 워낙 없고 아이들과 어울리지를 못해 따돌림을 받던 아들을 위해, 아버지는 운동을 많이 해서 체력을 기르길 원해서였다고 한다. 당시 아이들이 호퍼를 놀리면서 불렀던 별명이 그의 이름을 따서 "GrassHOPPER, 메뚜기" 였다고 한다. 그의 인생 2막이라고 불리는 에칭을 시작하면서 그린 그림들도 전시되어있다.



호퍼가 자전거도 전시되어있는데, 호퍼가 이곳에서 맨해튼에 있는 현재 파슨스의 전신이던 뉴욕 아트스쿨 New York of Art and Design을 다닐 때 기차역까지 통학용으로 타고 다녔던 자전거였다. 대부분 학생들이 당시 맨해튼에 집을 얻어 생활을 했지만 수줍고 친구도 없었고 말 수도 없었던 호퍼는 익숙한 집을 떠나기를 거부했다. 그래서 매일 새벽 집을 떠나 이 자전거를 타고 인근 기차역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페리 역으로 갔다. 당시 다리가 놓이기 전이라 페리를 타고 맨해튼에 내려, 또 엘리베이터 기차를 타고 학교로 도착하는 생활을 매일같이 했다고 한다. 호퍼의 손때 묻은 물감통도 있다.



이층으로 올라가 봤다. 호퍼의 방부터 들어가 보니 그전에 있던 커다란 테이블이 없어지고 침대가 들어오고 새 단장되어있다. 그의 방에 들어서면 두 개의 커다란 창이 바로 보인다. 햇살이 눈부시게 들어오고 있었다. 빛을 사랑하고 강조한 호퍼의 그림이 이 곳에서 시작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원래는 가구들이 많았는데 이 집을 지키기 위한 기금 마련을 하기 위해 많이 판매를 했고 몇 가지만 남아있다고 했다.



 호퍼는 소설과 시도 아주 좋아했고 책에 탐닉하는 문학소년이기도 했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랄프 왈도 에머슨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하기도 했다. 부인 조세핀과도 불어로 된 시를 낭독해주는 것을 즐겨했다고 한다. 호퍼의 어린 시절 하이체어도 있다.  



특히 이 널찍한 책상은 호퍼가 직접 만든 것이라고 했는데 만져볼수록 탐이 났다.



어린 시절 호퍼의 문구류 등도 전시되어있다. 기다란 붓과 "Edward Hopper will be a painter 에드워드 호퍼는 장래 화가가 될 거야"라고 삐뚤빼뚤 새겨진 나무 필통을 보니 가슴속에 파고드는 외로움을 말없이 그림으로 표현하고자 했던 어린 소년의 마음이 전해지는 것 같아 눈물이 핑 돌았다. 더불어 소년의 가슴속에 불같이 타오르던 빛나던 꿈과 열정 또한 느낄 수 있어서 가슴 뭉클했다. 그의 방에서 내려다보이는 허드슨 강과 그곳에서 보트를 타던 어린 호퍼가 있다. 그가 1913년 뉴욕 아모리 쇼 New York Amory Show에서 생애 처음으로 $250 (현재 $6,000 정도)을 받고 판매했던 그림도 [Sailing, 1911]이라는 보트 그림이었다.



호퍼의 인생 3막은 42세에 조세핀을 만나 결혼을 하면서부터인데 둘 사이에는 자녀도 없었고 성격도 많이 달라 결혼생활 자체는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호퍼는 말이 지나치게 없었고, 조세핀은 말이 지나치게 많았다. 가이드 할아버지는 "He never talks, and she never stops"라고 표현하셨다. 호퍼는 말을 하지 않고 조세핀은 그칠 줄 모르고.. 호퍼는 말보다는 그림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싶어 했다. 아내 조세핀은 고양이를 좋아했다. 호퍼는 동물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지금껏 그림 780점 정도의 그림 가운데 동물이 등장하는 그림은 단 한 점, 아이가 나오는 그림은 단 하나도 없다고 한다. 그리고 그림 속 인물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그림은 그의 어머니를 그린 단 두 점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들을 환상의 커플이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사람들과 소통하는 방법을 몰랐던 호퍼는 42살이 되도록 단 한 점의 그림만을 팔 수 있었다. 그것도 친구가 대신 출품해준 작품으로.. 하지만 희대의 마당발 아내 조세핀을 만나고 나서 그의 그림은 불티나게 팔리기 시작했고 그의 그림의 가격은 천정부지로 올랐고 그의 이름은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호퍼가 말을 하지 않고 자신의 불만을 이렇게 그림으로 표혔했다. 아마 아내가 밥을 잘 차려주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난번 방문 때는 잠겨있던 공간들이 몇 곳 오픈되어있었다. 2층 화장실도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일층으로 다시 내려와 아담한 기프트샵과 북스토어를 구경했다. 샵이라고 할 것도 없이 아주 아담한 공간인데도 구경할 것도 사고 싶은 물건도 꽤 많다.



 뒷마당에 마련된 아담한 조각공원도 좋다. 천천히 걸으며 조각품마다 쓰인 글씨들을 읽어보는 것 자체로도 편안한 힐링의 시간이었다.



조각품이 많지는 않지만 천천히 돌아보고 의자에도 앉아 보았다. 아무도 들어오는 사람이 없어 한참을 앉아 있었다. '어떤 뮬질, 어떤 생각을 아무 방해없이 공간 속애 옮겨 놓는 것, 그것이 조각이다" 라고 했던 이사무 노구치의 말이 생각났다. 



호퍼는 맨해튼 워싱턴 스퀘어에서도 만날 수 있다. 그 스튜디오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그 당시) 4층짜리 건물의 맨 꼭대기였고 히팅이 되지 않아 겨울에는 석탄을 짊어지고 75개의 계단을 올라가야 했고, 화장실도 따로 없어 공용화장실을 사용해야 했으며 주방은 마치 작은 팬트리만 한 사이즈였다고 한다. 부유한 집안의 외동아들이었고 한 점에 몇만 불을 호가하는 그림들을 수백 점 그린 호퍼가 그런 생활을 고집한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맨해튼에 있는 스튜디오는 예전에는 건물 담당자에게 전화를 해서 약속을 잡으면 방문이 가능했는데 지금은 개별 방문은 허락되지 않고 일 년에 두 번 Open House New York이라는 행사 때 대중에게 오픈이 된다.



호퍼 하우스를 나와 메인 스트릿으로 갔다. 차를 타면 5분 정도이고, 걸어가도 멀지 않다. 거리페스티벌을 구경하고 파머스마켓도 들렀다. 아기자기 많은 갤러리와 헌책방, 인테리어샵 등 한참 돌아다니다 보니 허기가 졌다. 예술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오는 이곳 나이약의 사랑방이라 불리는 아트카페에 들렀다. 30분 정도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그 정도는 예상했기에 이름과 전화번호를 알려주고 나와서 바로 옆 라이브러리로 갔다.



1879년부터 시작된 오랜 역사를 가진 곳이고, 당시 앤드류 카네기가 $15,000을 기증해서 도서관 건물을 짓게 되어 카네기 룸이라 이름 지어진 도서관 공간은 그대로 보존이 되어있다고 한다. 입구에 들어서면 앤드류 카네기의 도움으로 1903년 빌딩이 세워졌다는 내용이 적혀있다. 분위기가 고풍스럽고 아늑하다.



그리고 한편에 마련된 벽난로 위에 호퍼의 그림이 걸려있다. 호퍼가 자신이 어린 시절 자주 다녔던 동네 도서관에 자신의 그림을 기증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



퍼 그림 외에도 좋은 그림들이 참 많다. 책과 그림이 함께 어우러진 도서관, 참 멋지다.



도서관 곳곳을 둘러보고 있으니 아트카페에서 테이블이 마련되었다는 연락이 왔다. 자리를 잡고 이카페에서는 꼭 먹어봐야한다는 카푸치노를 주문했다. 역시 사람들의 입맛은 비슷한가보다. 아메리칸 브랙퍼스트를 주문했다. 든든히 속을 채우고 다시 나이약 거리 속으로 걸어갔다. 삶이 고단하고 단조롭다 느껴질 때, 왠지 센치해져 하루의 달콤한 행복이 필요할 때, 걸을 수 있는 두다리가 있고 볼수 있는 두 눈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함을 느끼고 싶을 때 호퍼가 사랑한 정겨운 나이약 거리가 생각날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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