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케이트 스페이스 Feb 14. 2018

아메데오 모딜리아니@반스 파운데이션


어스름이 깔리기 시작하는 차분한 저녁, 필라델피아 거리를 걷다가 반가운 고흐의 그림을 발견했다. 고흐의 그림은 어느 것 하나 멋지지 않은 것이 없지만 특히 이 그림이 난 참 좋다. 덥수룩한 턱수염에 붉은 뺨과 붉은 귀를 한 롤랑 아저씨를 보면 마음이 따뜻해지기 때문이다. [우체부 조셉 롤랑의 초상 The Postman Joseph Roulin,1889] 이란 이름의 그림은 고흐가 아를의 노란 집에 살 때 고흐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었던 아를역의 우체부이다. 물감을 살 돈도 꾸어야 할 만큼 가난하고 고독하고 절망스러웠던 고흐에게는 동생의 편지와 술이 유일한 희망이었는데, 그 두 가지 희망을 고흐와 공유한 고마운 이였다. 오늘날 여러 미술관에서 롤랑 부인을 포함하여 롤랑 가족들의 초상화를 많이 만날 수 있는 이유는 고마움의 표시로 고흐가 가족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려주었기 때문이다. 인근 필라델피아 뮤지엄에도 롱랑 가족의 초상화가 여러점 전시되어 있다. 아내 오귀스틴 롱랑은 7점으로 가장 많고, 아이들은 각 3점씩 그려주었다. 얼마전 개봉한 매혹적인 영화 [러빙 빈센트] 에서 따뜻했던 롤랑 가족을 만날 수 있다. 롤랑의 초상화는 조금씩 다르게 6점이 있는데 그중에서도 밝은 바탕의 이 그림이 참 좋다. 



빨리 가보고 싶은 마음을 누르고, 다음날 아침 일찍 반스 파운데이션을 찾아갔다. 멋진 건물에 눈이 소복이 쌓인 길은 걷는 것만으로도 설레어왔다. 모던하고 장중한 느낌의 입구를 통과해 실내로 들어가면 세련된 실내장식과 반가이 맞이하는 안내원들의 표정에서 안도감을 느끼게 된다. 입구에서 표를 구매하고 반대편에 마련된 코트 체크로 가서 코트와 가방을 맡기고 반스 파운데이션의 역사와 컬렉션을 간략하게 이해할 수 있는 다큐를 시청했다. 예술도 아는 만큼 보이기 마련이기에 뮤지엄 방문 시에는 미리 공부를 하고 가면 좋다.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뮤지엄에서 제공하는 영상물을 미리 시청하고 관람을 시작하면 더더욱 알차고 즐겁게 작품 관람을 하게 된다.



메인 전시장으로 들어가기 전 작은 갤러리에서는 '키퍼 로댕 특별전' 이 열리고 있었다. 지난봄부터 가을까지 파리 로댕뮤지엄에서 열린 특별전을 이어받은 것이다. 1917년에 세상을 뜬 로댕의 사망 100주기를 기념하는 행사들이 세계 전역에서 열리고 있는데 이곳도 예외가 아니었다. 안셀름 키퍼 Anselm Kiefer는 독일의 대표적인 설치 화가로 같은 독일 예술가 요셉 보이스 Joseph Beuys 의 작품이 있는 곳에서는 자주 만나게 된다. 필라델피아 뮤지엄에는 앤디 워홀이 그린 보이스 초상화도 있고, 키퍼의 작품도 있다. 키퍼는 돌, 바위, 대리석, 짚 등과 같은 독특한 소재를 좋아했고, 나치와 홀로코스트 같은 주제를 좋아했다. 특히 로댕의 조각들에서 큰 영감을 받아 로댕의 작품을 재해석하는 작품들을 구상했고 그 작품들을 이곳에서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어떤 작품들은 살짝 난해하기도 했지만 절로 감탄사가 흘러나오는 작품들이 많았다. 이해는 하지 못했을지언정 감동을 받았음은 분명했다. 언젠가 루이즈 부르조아 특별전에서 그런 글을 본 적이 있다. "예술은 설명되는 무언가가 아니다. 작품에서 무언가가 느껴지지 않는다면 설명할 도리가 없다. 만약 누군가가 내 작품에서 그 어떤 감동도 느낄 수 없다면 나는 실패한 것이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나는 감동을 받았으니 충분했다. 이곳에서 '키퍼 로댕' 전을 볼 거라고는 기대도 안 했는데 멋진 전시를 볼 수 있어서 참 기뻤다. 사진 촬영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어서 소심한 마음에 입구의 안내판 사진 한 장 찍는 것도 미리 물어보고 허락을 받았다.



시원하게 뚫린 길을 걸어 메인 뮤지엄으로 갔다. 입구에는 평상복 차림에 오렌지색 명찰을 단 여러 명의 안내원이 관람객 한 명 한 명을 붙잡고 뮤지엄 관람 수칙에 대해 일러준다. 꽤나 까다롭다. 뮤지엄 반스 파운데이션은 1922년 반스 파운데이션 설립된 지 3년 뒤에 오픈했다. 처음 자리 잡은 곳은  필라델피아 외곽 메리온의 반스 저택이었는데, 그곳에는 반스 파운데이션 식물원도 있다. 2012년 뮤지엄만 필라델피아 도심으로 옮겨오고 반스 식물원은 그 자리에 사계절 꽃이 피는 아름다운 정원으로 남아있다. 창립자 알버트 반스 Albert. C. Barnes는 필라델피아 출신 안과 의사였는데 1902년 획기적인 소독약 아지롤 Argyrol 로 엄청난 부를 거머쥔다. 그리고 바로 반스가 한 일은 전 세계 예술품을 사들이는 일이었다.



후기 인상파 화가들이 대거 활동하고 있던 예술의 본고장 파리로 건너가 거트루드 스테인이 운영하던 살롱을 방문했다. 당시 거트루드 살롱은 미국에서 건너온 헤밍웨이와 피츠제럴드 같은 문학가 뿐 아니라 마티스, 피카소 같은 예술가들의 아지트였다. 그곳에서 구입한 두 점의 마티스 작품을 시작으로 르누아르, 피카소, 드가, 피사로, 모딜리아니, 고흐, 고갱 작품들을 마구 사들였다. 1920년에는 피카소와 친분을 이어나가면서 피카소 작품을 구입하고, 모딜리아니나 생수틴의 작품을 구입한다. 그렇게 10년이 흐른 뒤 반스는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유명한 미술품 수집가가 되어있었다.


반스가 이토록 미술품에 열광하게 된 이유는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삶의 감사와 즐거움을 주고 싶다는 열망도 있었다고 한다. 그랬기에 반스는 처음 인가를 받을 때부터 뮤지엄이라기보다는 교육기관으로 역할을 하기를 바랐다. 인근 유펜과 뉴욕 컬럼비아 대학과 연계하여 교육 프로그램을 계발하고 콜롬비아에서 철학을 가르치던 존 듀이를 초빙해온다. 듀이는 실용주의와 경험철학을 주창하던 철학자로, '배움은 경험에서 나와야한다 Learning should be experiential' 라고 생각했다. 반스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학문은 경험이 기반이 되어야 하고, 예술작품도 그냥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직접 보고 느끼고 비평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듀이의 저술 가운데 가장 뛰어난 것으로 인정받는 [경험으로서의 예술 Art as Experience, 1934] 의 탄생에 반스 파운데이션의 역할이 컸다.



오늘날 반스 파운데이션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181점의 르누아르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그리고 마티스 151점, 세잔 69점, 피카소 작품은 46점, 드가 11점, 고흐 7점, 조르주 쇠라 작품 여섯 점 등 회화 2,000여 점을 포함해 총 4,000여 점에 달하는 예술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작품 배치가 아주 독특한데 중앙의 피카소 [곡예사와 젊은 광대 Acrobat and Young Harlequin, 1905] 주위로 르누아르 작품들이 걸려있다. 파란 옷을 입은 할아버지 그림은 피카소의 작품으로 [금욕 The Ascetic, 1903] 이고, 그 옆에 모딜리아니의 [파란 옷을 입은 여인 Young Woman in Blue, 1919] 도 보인다. 반스는 당시 피카소와 더불어 모딜리아니 작품도 상당수 구입했다. 모딜리아니는 1884년 이태리 토스카나 지방 리보르노라는 항구도시 태생으로 가장 잘 생긴 화가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열 네살에 그림을 시작했지만 얼마 안가 결핵에 걸렸고, 안타깝게도 서른 다섯 청춘에 세상을 떴다. 모딜리아니는 몽파르나스에 거주하면서 가난한 이들을 화폭에 자주 담았다. 1906년 파리 몽마르뜨에서 화가들과 교류하며 작품활동을 활발히 시작했고, 3년 뒤 몽파르나스로 옮겨가 조각을 시작하기도 했다. 



검은색드레스를 입은 작품은 모딜리아니의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빨강 머리 소녀 Redheaded Girl in Evening Dress, 1918] 모두 엽서나 책 표지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그림들이다. 그 옆의 파랑 옷을 이은 소년의 그림은 피카소 작품이다. 정장을 입은 턱수염의 남자는 모딜리아니 [레오폴드 즈보르스키 Leopold Zborowski, 1917]이다. 폴란드 출신 시인이자 미술애호가였던 즈보르스키는 소르본느에 유학 중일 때 모딜리아니를 만났다. 이태리에서 1906년 파리로 온 뒤 몽파르나스에서 만난 콘스탄틴 브랑쿠시의 조각에 매료되어 조각에 매달리던 모딜리아니에게 회화에 전념하도록 권했던 인물이다. 모딜리아니는 1915년부터 조각을 관두고 회화에 매달렸고, 1916년부토 즈로르스키와 전속 계약을 맺었다. 특히 모딜리아니가 누드를 많이 그리게 된 것이 즈보르스키의 요청에 의해서였는데 모델을 구하는 일부터 장소 섭외까지 즈보르스키가 떠맡았다. 1917년에는 에뷔테른과 동거를 시작하고 이듬해 니스에서 잔을 얻는다. 결혼식을 올리려 했으나 이루지 못하고 1920년 1월 24일 '그리운 이탈리아' 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는다. 더더욱 안타까운 것은 에뷔테른은 이틀 후 모딜리아니를 따라가기로 마음먹는다. 둘은 파리의 페르라세즈 묘지에 나란히 잠들어있다. 모딜리아니그의 사랑과 인생을 담은 영화도 여럿 제작되었다. 



엎드려 있는 그림은 [Reclining Nude from the Back, 1917], 모딜리아니 작품은 현재 이곳에 열여섯 점이 있다. 모딜리아니를 이야기할 때 아주 친하게 지냈던 러시아 유대인 출신 화가 생 수틴을 빼놓고 이야기할 수 없다. 모딜리아니가 세상을 떠날 즈음 즈브로스키에게 "나는 떠나지만 천재 화가 수틴을 남겨두고 가니 걱정말게나" 라고 했다는 말은 유명하다. 반스는 모딜리아니 작품들을 구입 한 뒤 폴 기욤을 통해 1923년 생 수틴의 작품을 접하고 그 자리에서 그의 작품 모두를 구입한다. 현재는 21점을 소장하고 있다. 수틴은 1893년 제정 러시아 유대인 마을에서 옷수선집을 운영하며 근근히 살아가던 가정에서 태어났다. "유대인에게 예술이란 지독한 사치다" 라는 말을 수도 없이 들어며 자란 수틴은1910년 미술학교에 입학해 정식으로 그림을 배웠고, 2년 파리로 떠났다. 생 수틴의 작품들은 파리 오랑주리 미술관에 모딜리아니 작품과 함께 감상할 수 있고, 파리 14구에는 생 수틴의 동상이 서있고, 몽파르나스 묘지에 잠들어있다. 현재 반스 파운데이션은 미국에서 생 수틴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한 뮤지엄이다. 생 수틴의 [Woman in Blue, 1919] 가 보인다. 모딜리아니의 [파란 옷을 입은 여인] 과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정면의 [담배를 들고 있는 여인 Young Woman Holding a Cigarette, 1901] 은 피카소의 작품이다. 그 옆은 마티스의 [중국 보석상자 Chinese Casket, 1922]



아래 큰 그림들은 자주 만나게 되는 르누아르의 작품으로 [컨서버토리를 떠나며 Leaving the Conservatory, 1876-77] 와 왼편 큰 그림은 피카소의 [염소와 소녀 Girl with a Goat, 1906]이다. 중앙 파란 옷을 입은 여자아이 그림은 [줄넘기를 가진 소녀 Girl with a Jump Rope, 1876]



가운데 아기와 손을 잡고 걷는 여인의 모습을 담은 [산책로 Prommenade, 1906], 두 여인의 모습을 담은 [티타임 Tea Time, 1911] 발가벗은 그림은 [목욕 후 After the Bath, 1911], [잔느 뒤랑 루엘의 초상 Portrait of Jeanne Durand-Ruel, 1876] 잔느는 당시 인상파 화가들 사이에 영향력 있는 화상인 폴 뒤랑 뤼엘의 딸이다. 뒤랑 뤼엘에게는 다섯 아이가 있었는데 르누아르가 아이들의 초상화를 자주 부탁했다. 



[바느질하는 여인 Woman Sewing, 1908], 그 사이로 보이는 초록 배경의 그림은 에두아르 마네 [정원의 여인 The Woman in a Garden, 1879]



마티스는 세 여인이 함께 들어 있는 그림들, 그리고 여인들의 책 읽는 모습을 자주 화폭에 담았다. [아프리카 조각과 세 자매 The Sisters with African Sculpture, 1917] & [회색 배경의 세 자매 Three Sisters with Grey Background, 1917] [장미 테이블과 세 자매 Three Sisters and the Rose Table, 1917], 가운데 [금붕어가 있는 스튜디오 Studio with Gold Fish, 1912] 옆에 두 개의 사이프러스 나무가 있는 그림은 모딜리아니의 [싸이프러스 나무와 집 Cypress Trees and House, 1919]. 모딜리아니는 풍경화보다 인물화를 주로 그렸기에 풍경화가 많지 않다. 그가 남긴 네 점의 풍경화 중 가장 아름답다다.



오른쪽 중앙의 큰 그림은 마티스의 [베니치안 블라인드 The Venetian Blinds, 1919]. 그 옆에는 [접시와 멜론 Dishes and Melon, 1906-07] 이 있다. 마티스 [붉은 마드라스 화관 Red Madras Headdress, 1907], 그림 외에 수많은 장식품, 문고리 등이 있다. 



맨 위 폴 세잔의 [The Large Bathers, 1906]이 뮤지엄은 폴 세잔의 [목욕하는 사람들' 시리즈를 다량 보유하고 있다. 작품 제목도 '세 명의 목욕하는 사람' '네 명' '다섯 명' '목욕하는 사람 그룹' '다수의 목욕하는 사람들' 들 다양하다. 조르주 쇠라의 [모델들 The Models, 1888] 아래 폴 세잔의 [카드놀이하는 사람들 The Card Player, 1890-92] 이 있다. 이 작품은 세잔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로, 오늘날 총 5점 연작이 있다. 파리 오르세 미술관, 런던 코톨드 미술관, 그리고 뉴욕 메트로폴리탄과 반스에 있고 나머지 한 점은 2011년 카타르 왕실에 2억5천만 달러에 매매되었다. '현대 미술의 아버지' 라 불리는 폴 세잔은 프랑스 엑상 프로방스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동네 친구 중에 에밀 졸라가 있었고 둘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도 제작되었다. 은행가였던 아버지는 그림을 좋아하는 아들을 억지로 법과로 보내지만 세잔을 경국 파리로 가서 그림을 그린다. 반스는 이 작품 외에도 세잔의 작품 69점을 소장하고 있으니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보다 많은 소장품을 보유하고 있다.



방마다 어마어마한 작품들이 이어진다. 어쩜 이렇게 방마다 빼곡히 전시를 해두었는지 새로운 방으로 이동을 할 때마다 놀라웠다. 입구에 들어올 때 코트와 아이의 백팩은 맡겼고, 나의 백은 굳이 맡기지 않아도 될 거라 생각해서 그냥 들어갔다. 그런데 직원이 가방 사이즈가 뮤지엄 측에서 정한 사이즈보다 조금 크다며 사이즈를 재보더니 맡기라고 했다. 만약 지갑이나 셀폰 등 휴대용 백이 필요하면 대여가 가능하다고 했다. 나의 핸드백 사이즈가 고작 A4 용지 정도였는데 그것도 맡겨야 하나 의아했는데 실내로 들어와서 관람을 하다 보니 왜 그런 규정을 만들었는지 충분히 이해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구나 이 뮤지엄의 특징은 사진촬영에 제약이 까다롭다. 들어올 때 직원들이 아주 철저하게 안내한다. 사진촬영은 오직 벤치가 놓여있는 방에서만 가능하다. 그리고 절대로 작품 가까이나 서서는 촬영할 수 없고, 벤치에 앉아서만 촬영이 가능하다. 그러다보니 사진들의 각도가 독특하고 사진촬영이 불가한 공간도 많기에 소개하지 못하는 작품들도 아주 많다. 게다가 보통 뮤지엄은 직원들이 한쪽에 가만히 서있거나 천천히 돌아다니며 문제시될만한 행동을 하는 관람객이 있으면 다가와 주의를 주는데 이곳은 아니다. 안내 직원이 누가 쫓아오는 것 마냥 잰걸음으로 방방이 분주하게 돌아다닌다. 그러다 작품 앞에서 사진을 찍는 사람이나 벤치에 앉지 않고 서서 찍는 사람들을 발견하면 가차없이 주의를 준다. 한 번은 서서 사진을 찍는 아저씨와 안내 직원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지기도 했다.


또한 사진촬영이 불가한 뮤지엄에서도 그림을 따라 그리는 것은 허용이 되는데, 이곳에서는 그것도 불가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방문이 까다로운 뮤지엄으로 소개를 하는 것 같은데, 그런 복잡한 규정이 전혀 거슬리지 않을 만큼 충분히 멋지고도 멋진 뮤지엄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런 안내원들의 노고가 감사하게 느껴졌다. 관람객들도 규칙을 잘 따라주어야 이런 박물관들이 잘 유지가 될 것이다. 반스는 예술가들 사이에는 까다로운 사람으로 이름나 있었고 세상을 뜰 때 아주 까다로운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작품들을 절대 뮤지엄 밖으로 가져갈 수 없으며, 관람객은 일주일에 오백 명으로 제한한다든가 하는 것들이었다. 그런 연유로에 반스 파운데이션은 재정난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나올 때 입구를 지키던 할아버지께서 "규칙을 잘 따라 줘서 고맙다"라고 웃으며 인사를 하셨다.


관람을 마치고 북 스토어와 기프트숍으로 갔다. 북 스토어도 아주 멋지다. 직원들이 어찌나 살갑고 친절한지 손님 한 명 한 명에게 어디서 왔느냐 여기는 처음이냐 그곳 날씨는 어떠냐 뮤지엄을 관람한 소감이 어떠냐 등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사고 싶은 물건들도 참 많았고 세일하는 책들도 많았다. '키퍼 로댕' 전은 사진을 전혀 못 찍었기에 두고두고 보려면 책이라도 살까 하다가 너무 무거워서 다시 내려놓았는데 지나고 보니 후회가 된다. 기프트숍 구경까지 모두 마치고, 로비 카페에서 커피와 쿠키 하나를 사 먹고 잠시 앉아 이곳의 수많은 명작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며 천천히 음미해보았다. 이런 보석 같은 뮤지엄을 이제서야 와보다니, 지금에서라도 와보게 되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데일 치훌리@뉴욕 보태니컬 가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