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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트 스페이스 Mar 14. 2018

잭슨 폴락@폴락 크래스너 하우스


뉴욕 롱아일랜드 바닷가 마을 이스트 햄튼은 수많은 예술가 문학가들이 자신만의 보금자리를 탐했던 가슴이 시릴 정도로 아름다운 마을이다. 잭슨 폴락과 그의 아내 리 크래스너도 마찬가지였다. 잭슨 폴락 (1912-1956) 은 미국의 대표적인 추상표현주의 화가이자, 물감을 뿌리는 드립 페인팅 화법 drip painting으로 우리에게는 잘 알려져 있다. 폴락은 와이오밍에서 다섯 아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나 캘리포니아와 애리조나에서 대부분의 유년시절을 보냈다. 미술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8살이 되던 1930년, 미술을 하던 형 찰스와 함께 뉴욕으로 와서 뉴욕 아트 스튜던트 리그 New York Art Students League 에 입학하는데 토마스 하트 벤튼 Thomas Hart Benton 이 그들의 스승이었다. 그림을 팔아 어렵사리 생계를 유지하던 중 그리니치 빌리지의 스튜디오에 살던 화가 리 크래스너를 만나면서 그의 인생에 서광이 비치기 시작한다. 그 둘의 사랑과 예술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역사적인 공간이다.



폴락의 생애에 대해서는 에드 해리스 주연의 [폴락]에 잘 나와있는데, 영화에 나온 집 그대로이다. 



집 안으로 들어가니 밝은 거실이 나오고, 커다란 원형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있다.



소파 위 하얀 책장에는 평소 그가 즐겨 읽던 책들이 빼곡히 꽂혀있다. 프란츠 카프카의 [아버지에게 드리는 편지]와 버지니아 울프의 [파도] [등대로], 사뮈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도 보인다. 딜런 토마스 시집도 보이고 제임스 조이스의 책도 있다. 허먼 멜빌의 [빌리 버드 Billy Budd] 도 있고, 심리학의 거장 알프레드 아들러의 [인간 이해 Understanding Human Nature] 도 있고, 알프레드 아들러와 함께 정신분석학을 공부한 심리학자이자 정신과 의사인 롤로 메이가 쓴 [자아를 잃은 현대인 Man's Search for Himself] 도 있다. 작년 여름부터 일 년 가까이 베스트셀러 자리를 내놓지 않고 있는 [미움받을 용기] 가 바로 알프레드 아들러의 이론에 바탕을 둔 작품이다. 



소파 테이블에는 잭슨 폴락을 세상에 널리 알린 인터뷰 내용을 담은 1949년 라이프 잡지 기사를 유리함 속에 보관하고 있었다. 폴락은 평생을 알코올 중독과 싸웠으며 리 크래스너를 만나기 전 그리니치 빌리지의 형네 집에 얹혀살 때는 가벼운 정신병 증세를 보였다. 또한 분노조절도 힘들어서 성격적으로 문제가 많아서 정신과 의사와 상담을 받으면서 정신분석학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로 인해 화풍도 바뀌어 추상화가로 방향을 전환하게 된 것이다. 



2층으로 올라가면 부부가 사용했던 마스터 베드룸이 나온다. 그 방에는 두 사람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잭슨의 그리니치 빌리지 시절, 그림에 대한 재능과 열정은 누구보다 뜨거웠지만 지독한 음주광에다가 헐값에 그림을 팔아 겨우 입에 풀칠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근처 스튜디오에서 살던 리 크래스너 Lee Krasner라는 화가가 작업실을 찾아와서는 그림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언제든 자신의 스튜디오에 놀러 오라는 말을 남기고 떠난다. 폴락은 크래스너의 스튜디오에 놀러 가서 그녀의 그림들을 둘러보고 그리니치 빌리지의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함께 밤을 보낸다. 가족들을 만난 뒤 폴락이 가벼운 정신병을 앓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재능 있는 화가인 폴락이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져 버릴까 아쉬웠던 그녀는 그의 지원자가 되기로 맘먹는다. 그 후부터 예술적 재능이 큰 빛을 발하게 되는데, 1943년 백만장자 상속녀이자 아트 컬렉터인 페기 구겐하임의 갤러리에 작품을 전시하게 된다. 그때 몬드리안은 폴록의 재능을 알아보고 구겐하임은 폴록과 계약을 하고, 자신 집 벽의 대형벽화를 의뢰한다. 몇 번의 그림전도 했지만 절망 속에서 술을 마시고 그렇게 무너져가는 폴락을 보다 못한 크래스너는 1945년 10월 결혼을 하고 이곳 이스트 햄튼 바닷가 낡고 한적한 집으로 이사를 온 것이다. 그때 다운페이를 빌려준 사람은 페기 구겐하임이었다.



복도에 그림들이 걸려있고, 전시회에서 잭슨 폴락의 작품을 설명하고 있는 리 크래스너의 사진도 볼 수 있다. 잭슨 폴락이 맨 처음 스튜디오로 사용했던 작은 방도 2층에 있다. 폴락이 작품을 완성하기에 공간이 협소하다고 하자 크래스너가 헛간을 개조해 사용해보라고 권한다. 



실내 구경을 마치고 밖으로 나가면 저 멀리 펼쳐진 풍경이 참 평화롭고 아늑하다. 끝에서 끝까지 천천히 걸어보았다. 강바람이 참 좋다. 



그리고 폴락이 사용했던 스튜디오로 들어갔다. 처음에는 방에서 그림을 그렸지만 공간이 너무 작아서 낡은 헛간을 개조해 스튜디오로 만들었던 곳이다. 오랫동안 버려진 집을 청소하고, 창고를 폴락의 작업실로 개조한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수염이 기다란 할아버지가 반갑게 맞아주셨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려면 고무 덧신으로 갈아신으라고 하셨다. 양말도 안되고 맨발도 안되고, 신발 위에 덧신는 것도 안된다고 하셨다.



한편에 마련된 좁은 헛간을 구석구석 돌아보았다.



폴락이 작업을 했던 마루로 들어가니 맞은편 창문에서 햇살이 가득 들어오고 있었다. 벽에 걸린 폴락의 사진과 작품, 그리고 물감들이 흩뿌려져 있는 마룻바닥을 보니 가슴이 뭉클해오며 전율 같은 것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벽에는 크래스너와 폴락의 사진들이 많이 걸려있다. 세계적인 화가이기 이전에 부부였던 두 사람을 생각해보았다. 절망적이고 가난했던 그리니치 빌리지 시절에서 탈피해 롱아일랜드로 들어와 생활도 안정을 찾아갈 즈음 폴락은 이제는 아빠가 되고 싶다고 말한다. 하지만 크래스너는 하루하루 먹고살 것을 걱정해야 하는 가난한 화가인 우리에게 아이는 가당치도 않다며, 오직 한 사람 폴락에게만 관심을 쏟고 잘 내조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고 말한다. 그 말에 폴락은 크게 실망하고 분노한다. 폴락의 전기를 보면 그의 정신병 증세 때문에 크래스너는 아이를 갖지 않고 싶었다고 말했다는 부분이 있다.   



어느 날 창고 작업실에서 그림을 그리다 물감이 마룻바닥에 뚝뚝 떨어지는 것을 보고 영감을 얻어 물감을 뿌리며 그림을 그리는 시도를 하게 된다. 1948년 뉴욕 파슨스 갤러리에서 새로운 시도로 완성한 작품을 선보인다. 그의 독특한 작품들은 처음에는 냉대를 받았지만  점점 뉴욕 갤러리 주인, 아트 컬렉터, 화가들 사이에 화제가 된다. 결정적인 계기는 라이프 매거진과 인터뷰를 하고, 그의 이름과 그림이 실리는 것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게 된다. 페기 구겐하임과 아트 컬렉터들도 창고로 찾아온다. 촉감을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어서 바닥을 조심스럽게 손으로 쓸어보기도 하고 눈에도 마음에도 가득 담고 싶어 오래 머물렀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겨우 옮겨 밖으로 나왔다. 가이드 할아버지는 우리에게 화가 부부냐고 물으셨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화가는 아니고, 그저 폴락의 작품을 좋아한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많이 좋아하는 것 같다며, 마룻바닥을 감상하는 사람들 표정이나 태도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셨다. 간혹 화가 지망생이나 예술가들 가운데는 마룻바닥을 조심스레 걸어 다니다 주저 앉아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해 눈물을 흘리는 이들도 있다고 하셨다. 우리는 예술가도 아니고 화가 지망생도 아니었지만 그 느낌이 어떤 것인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고무 덧신을 다시 바구니에 두고 나오려니, 아마 이 마룻바닥을 이렇게 계속 밟게 되지는 못할 거라고, 언젠가는 이곳은 개방이 안될 거라고 말씀하셨다.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리고 밖으로 나왔다. 스튜디오에서 바라본 집이 참 아담하다. 폴락은 상황이 좋을 때는 술을 끊었다가, 상황이 좋지 않으면 심한 알코올 중독에 빠지는 생활을 번갈아 했다. 크래스너와 갈등도 생기고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나는데, 크래스너는 이혼을 할 수 없다며 페기 구겐하임을 만나겠다며 베니스로 떠난다. 구겐하임은 1947년 뉴욕을 떠나 베니스에 자리를 잡았던 터였다. 크래스너가 떠나고 친구와 함께 집에 놀러 온 여자를 데리고 파티에 가던 도중 술에 가득 취한 채 차를 몰아 충돌한다. 즉사 헸는데 이 곳에서 아주 조금 떨어진 길에서였다. 그의 나이 마흔 넷이었다. 크래스너는 폴락이 그렇게 허무하게 세상을 떠난 뒤 28년 동안 그 집을 지키며, 폴락의 작업실에서 평생 그림을 그리며 폴락을 그리워했다. 폴락이 죽은 뒤 폴락과의 추억이 깃든 이 집과 폴락의 작품과 명예를 지키기 위해 애쓰던 크래스너는 이 집과 2 에이커에 달하는 땅을 기증하고 세상을 떠났다. 현재 이곳은 '폴락 크래스너 하우스 앤 스터디센터'라는 이름으로 유지 관리되어 개방되고 있으며, 1994년 국가사적지로 지정되었다. 이 뮤지엄을 스토니브룩 대학에서 관리 운영하고 있어 스토니브룩 학생과 교수들에게는 무료로 개방이 된다. 



가이드 할아버지가 주신 지도를 들고 그린 리버 세미트리로 향했다. 그곳으로 가는 길에 폴락이 진 빚 $56 대신 그림을 가져다준 마을 입구 식료품점도 그대로 남아있었다. 폴락의 집에서 차로 5분 정도면 도착한다. 나무 사이로 폴락과 크래스너의 묘가 보인다.



뒤쪽의 거대한 바위가 있는 묘가 폴락의 것이고 앞쪽에 있는 작은 돌무덤이 그의 아내 크래스너의 묘이다. 보통 부부처럼 나란히 누워있는 것이 아니라, 폴락이 살았을 때처럼 저 세상에 가서도 흔들리고 방황하던 남편을 지켜주려는 듯, 앞자리에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는 아내의 묘를 보니 가슴이 시려오면서 코끝이 시큰해져 왔다.



가이드 할아버지 말씀이 이 세미트리는 동네 사람들이나 알던 곳이었는데 잭슨 폴락이 이곳에 묻힌 이후로 수많은 예술가들이 같은 곳에 묻히길 희망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참 특이한 묘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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