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필사노트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yura Sep 28. 2019

당신이 옳다 - 정혜신 01

2019.04.20 필사

한 사람이 제대로 살기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할 스펙이 감정이다. 감정은 존재의 핵심이다. 한 사람의 가치관이나 성향, 취향 등은 그 존재가 누구인지 알려주는 중요한 구성 요소들이지만 그것들은 존재의 주변으로 둘러싼 외곽 요소들에 불과하다. 핵심은 감정이다. 내 가치관이나 신념, 견해라는 것은 알고 보면 내 부모의 가치관이나 책에서 본 신념, 내 스승의 견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감정은 오로지 ‘나’다. 그래서 감정이 소거된 존재는 나가 아니다. 희로애락이 차단된 삶이란 이미 나에게서 많이 멀어진 삶이다.


다 가진 자는 금은 넘쳐나는데 쌀은 한 줌도 없는 이상한 기근을 겪는다. 금이 없어도 쌀이 있으면 살 수 있지만 금이 산더미같이 있어도 쌀이 없으면 살 수 없다. 존재에 대한 주목이 삶의 핵심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질주하다 보면 현실에선 아무 쓸모없는데 사이버 세상에선 떼부자인 다 가진 자처럼 되기 십상이다. 다 가진 것 같지만 금괴 더미 안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쓰러진다.


고급 정장에 계급장이나 보석을 주렁주렁 달고 있을 때 나를 주목하고 인정해 준 사람보다 내가 맨몸이었을 때 나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극진히 보살펴 준 사람은 뼛속에 각인된다. 내 존재 자체에 반응한 사람이니 그 사람만이 내 삶에 의미 있는 사람이 된다. (..) 그런 사람을 만나야만 사람은 존재의 근원적인 외로움에서 벗어나고 존재의 근원적 불안에서 자유로워진다. 그래야 살아갈 힘의 최소한의 안정 기반을 만들 수 있다.


우울은 삶의 보편적 바탕색


일상의 외주화로 인한 결과는 어떤 모습일까. 예를 들어 내 삶의 고통과 외로움이 우울증이라는 의사의 진단 영역으로 한계가 지어지는 순간 나의 존재 자체는 다시 소외되고 우울증 환자 일반으로 대상화되기 쉽다. 고통으로 피폐해졌을 때 사람은 무엇보다 정서적 공급이 시급한데, 그런 순간에 결정적으로 정서적 소외가 일어나는 것이다.


질병이 아닌 일상의 영역에선 사람에 대한 자연스럽고 상식적인 반응이 때로 가장 효과적인 치유다. 그것이 사람 마음에 더 빠르게 스미고 와 닿는다. 그런 일의 위력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탁월한 치유자가 된다. 어떤 고통을 당한 사람에게라도 그 고통스러운 마음에 눈을 맞추고 그의 마음이 어떤지 피하지 않고 물어봐줄 수 있고, 그걸 들으면서 이해하고, 이해되는 만큼만 공감해 줄 수 있다면 그것이 가장 도움이 되는 도움이다,


드러난 증상들은 비슷해 보여도 거기에 다다르기까지 개인의 역사, 주변 환경과 인간관계 같은 개별적 맥락들은 다 다르다. 하지만 우울증이라는 강력한 의학 규정 아래로 편입되면 개별적 맥락은 모두 휘발되고 우울증이라는 형해만 남는다. 우울증이란 진단명은 나의 개별성을 뭉갠다. 우울증 환자라는 획일적 존재로 간주되고 우울증의 원인 또한 뇌신경 전달 물질의 불균형이라는 생물학적 원인으로 일축된다.


자기 소멸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에 휩싸인 사람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방전에 저항한다. 자기 존재 증명을 필사적으로 시도한다. 몸을 던진다, 생의 마지막 본능이다. 3퍼센트 남은 에너지로 30퍼센트의 힘이 필요한 새로운 계획이나 시도를 하기도 한다. 그래서 마지막 남은 3퍼센트를 순식간에 다 태워버리고 재가 되어버리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난다.


영영 주목받지 못할 존재에게 살아보라는 말은 산소 없는 곳에서 숨 쉬고 살라는 말과 다르지 않다. 생존이 불가능하다. 실력이나 재능이 뛰어나지 않고 비상한 머리, 출중한 외모가 없어도 그것과 상관없이 존재 자체만으로 자신에게 주목해 주는 사람이 한 명은 있어야 사람은 살 수 있다. 생존의 최소 조건이다. 이해관계없이도 무조건 나를 사랑하고 지지해 주는 가족 같은 관계, 최소한 나를 의식이라도 하는 사람이 세상에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다.


죄의식과 무력감은 겉보기엔 자신만 갉아먹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감정으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았다. 유사 이래 가장 강한 위력을 내포한 사회적 힘을 이끌어냈다, 죄의식과 무력감의 연대가 해낸 일이다. 우리가 살면서 겪는 모든 감정들은 삶의 나침반이다. 약으로 함부로 없앨 하찮은 것이 아니다. 약으로 무조건 눌러버리면 내 삶의 나침반과 등대도 함께 사라진다. 감정은 내 존재의 핵이다.


심리적으로 힘겨운 상황에서도 다시 의욕을 불태우며 분주하게 움직이던 사람이 갑자기 삶은 저버렸다는 얘기가 들려오면 사람들은 믿기 어려워한다. 혼란과 충격에 빠진다. 삶의 의지가 얼마나 충만했던 사람인데, 새로운 계획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 행동만 보고는 전혀 짐작할 수 없는 것이 하나 있다. ‘나’가 위축되면 될수록, ‘나’가 희미해질수록 사람들은 그만큼 더 크고 더 우뚝하고 더 강한 ‘나’를 구축하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붓는 경우가 있다. 목숨을 걸 정도로.


내 직장 이야기보다 직장에 대한 나의 느낌이 더 나에 대한 이야기에 가깝다. 내 취향이나 기호도 내 존재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그것도 내 몸에 걸친 옷이나 액세서리에 해당하는 것이다. 내 견해나 신념, 내 가치관도 그렇다, 내 견해, 신념, 가치관이라 힘주어 말하는 것들 대부분도 사실 그 시원은 ‘나’가 아닌 다른 곳에서 유입된 것이 대부분이다. 나처럼 보이지만 나 자체는 아니다.


고통에 진심으로 주목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 그것이 치유의 결정적 요인이다. 말이 아니라 내 고통을 공감하는 존재가 치유의 핵심이다. 자신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걸 알면 사람은 지옥에서 빠져나올 힘을 얻는다.

매거진의 이전글 소설가의 일 - 김연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