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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정아 May 11. 2021

'노회찬'이라는 제목의 시(詩)

민환기감독, <노회찬, 6411>(2021)

코로나19가 창궐하던 2020년 봄, 갑작스러운 감염의 공포 앞에 각종 문화 행사들이 대거 취소되거나 연기되었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1년 후, 여전히 팬데믹은 우리의 일상을 곳곳에서 위협하고 있지만 그런 가운데에도 조금씩 사람들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 위한 움직임이 시작되고 있다. 지난 4월 29일부터 열흘 간 개최된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도 그러한 노력 중 하나였다.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 포스터 (출처: 영화제 홈페이지)


영화제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오랜만에 전주행 KTX를 탔다. 설레는 마음으로 도착한 전주 영화의 거리는 예전처럼 축제 분위기가 무르익지는 않았지만, 전주영화제의 상징인 다홍색 아치 기둥에 깃발처럼 전시된 영화 포스터들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반갑고 뭉클했다. 봄바람에 펄럭이는 깃발들 사이에 그가 있었다. 고(故)노회찬의원. 마치 '우리가 언제 헤어진 적 있었냐'는 듯 사람 좋은 미소를 띤 그의 얼굴은 금세라도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할 듯 다감하다. 다큐멘터리 <노회찬, 6411>(민환기 감독)으로 다시 찾아온 그를 만나기 위해 저녁 7시 30분 극장을 찾아갔다.


<노회찬, 6411> 티저 영상 (출처: 명필름)


'6411'이라는 숫자는 노회찬 의원이 2012년 10월 진보정의당 공동대표 수락연설에서 언급했던 버스 번호를 뜻한다. 서울 구로구의 가로수 공원에서 출발하는 6411번 버스의 첫 차에는 늘 같은 승객들이 탄다. 강남의 빌딩에서 일하는 50~60대 노동자들이다. 


아들, 딸과 같은 수많은 직장인들이 그 빌딩을 드나들지만,
그 빌딩에 새벽 5시 반에 출근하는 아줌마들에 의해서,
청소되고 정비되고 있는 줄 의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분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름이 있었지만, 그 이름으로 불리우지 않습니다.
그냥 아주머니입니다. 그냥 청소하는 미화원일 뿐입니다.
한 달에 85만원 받는 이분들이야말로 투명인간입니다.
존재하되, 그 존재를 우리가 느끼지 못하고 함께 살아가는 분들입니다.
 (故노회찬 의원 연설 중에서)


노회찬의 연설에 등장한 청소 노동자들은 그가 몸담았던 국회 의원회관 미화원들과의 인연으로 이어진다. 그의 마지막 운구가 국회를 떠날 때 일렬로 배웅을 하며 눈물을 흘렸던 국회 청소노동자들의 모습은 그의 삶이 누군가를 위한 시간이었는지 잘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다큐의 시선은 버스 속 노동자들의 삶에 스며든 노회찬을 보여주기보다는 그가 몸담았던 노동운동과 진보정치의 행로를 기록하고, 정리한다. 정치평론가 이광호가 정치인 노회찬의 역사와 꿈을 정리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광호는 평론가 특유의 시니컬한 표정과 촌철살인 멘트를 통해 노회찬 의원이 살아온 길을 한국 근현대사라는 맥락 안에서 짚어준다. 영상 구성은 노회찬 의원의 활동 모습과 방송 출연 영상이 주를 이뤘고, 주요 인터뷰이는 그의 학교 동기들, 노동운동의 동지들, 전직 보좌관 등이다. 중간중간 과거 영상 속 노회찬 의원의 모습이 재생될 때마다 그리움에 목울대가 뜨거워지긴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인간 노회찬'에 초점을 맞춘 감성다큐라기보다는 '정치인 노회찬'의 생애를 깊이 파고드는 역사다큐에 가까웠다. 다만 아쉬운 점은 노회찬 의원과 가장 가까운 곳에서 오랜 세월 함께 활동했던 동지인 아내 김지선씨나 정의당 심상정 의원 등이 비중있게 다뤄지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에 대한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보니 <노회찬, 6411>은 아직 미완의 작품이다. 의미있는 인터뷰이를 만나고, 취재하면서 추가하고 보완해갈 예정이라고 한다.


고(故) 노회찬 의원과 국회 청소 노동자들 (출처: 노회찬 재단)


극장에 갈 때 준비해 간 손수건을 꺼내 든 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였다. 노회찬의원의 장례식장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눈물을 흘리며 말을 잇지 못하는 장면에서 참았던 울음이 터졌다. 민환기 감독의 손끝에서 완성된 '정치인 노회찬의 삶'이 한 편의 서사시라면, 노회 찬의원의 영정사진 앞에서 세상 무너진 듯한 얼굴로 슬픔을 주체하지 못하는 이들의 모습은 각자의 감성과 서사로 써 내려간 '노회찬'이라는 제목의 서정시라고 할 수 있다. 민환기 감독이 앞으로 완성해갈 다큐멘터리 <노회찬, 6411>의 서사가 이 마지막 장면에 담긴 시민들의 서정시를 모두 소화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남편, 누군가의 아들, 누군가의 선배, 누군가의 동지로 살아온 60여 년의 삶을 하나의 시선으로 갈음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만나고, 기억하는 '노회찬'의 얼굴과 이야기가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는 민환기의 '노회찬', 신정아의 '노회찬' 등으로 각자의 시를 쓰면서 그를 추억하고, 전하지 못한 미안함과 고마움을 표현하게 될 것이다. 그런 시간들이 쌓이고 또 쌓여,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어느 날, 어린 아이의 손끝에서 '노회찬'이라는 제목의 동시가 쓰여지는 풍경을 상상해본다.


에필로그. 영화제의 맛


영화제의 맛이란 극장에서 나온 후 거리에서, 술집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영화인들과 깊이 있는 영화 이야기도 나누고, 영화 속 주인공과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다정한 즐거움이 아닐까. 3시간의 긴 상영을 마치고 술집으로 자리를 옮겨 지인들과 영화에 대한 소회를 나누던 중 우연히 <노회찬, 6411>의 제작자 최낙용 프로듀서를 만날 수 있었다. 다큐를 본 소감을 풀어놓는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일일이 고마움을 표시하던 그의 선한 눈빛과 태도가 인상 깊었다. <노무현입니다>(이창재감독, 2017)의 제작자이기도 했던 최낙용 프로듀서의 상기된 얼굴을 보면서, 그 역시 '노회찬'이라는 제목의 서정시를 열심히 써 내려가는 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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