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직하는 임원들을 보면서
최근 임원 퇴임식이 있었다. 평직원으로 입사하여 30여 년간 근무하고, 3년 전 ○○○본부장으로 임용되어 퇴임하는 직장생활의 마지막인 날이었다. 부서별로 차출된 직원들이 강당을 채우자 두꺼운 안경을 내려쓴 주인공이 단상에 섰다. A4 한 장의 퇴임사를 사무적이고 건조한 목소리를 읽어 내려갔다. 그 퇴임사를 귀담아듣는 직원은 없는 듯하다. 30년을 채우고 3년을 더 일한 한 조직에서 보낸 그의 마지막 문장은 “감사합니다.”였다. 무엇에 감사한지 목적어는 듣지 못했다. 메마른 박수와 함께 간단한 졸업식이 끝났다. 문득 몇 년 전 임원임용 업무를 담당하던 시절의 에피소드가 생각났다.
몇 년 전 인사팀 시절 이야기이다. 임원임용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당시 조직이 커지고, 재구조화되면서 임원의 대규모 교체가 진행 중이었다. 새로운 경영진이 어떻게 구성될지 기관 전체의 관심으로 하루하루 긴장 속에 살고 있었다. 당시 기존 임원들의 임기종료는 거의 분기마다 돌아왔고, 매달 공고문과 재공고문을 올렸고, 심의기구인 임원추천위원회는 거의 상설 조직같이 운영되었다. 힘들고 혼란스러웠던 시절, 기억에 남는 두 분의 지원자가 있었다.
비상임이사를 공모 중일 때였다. A라는 지원자가 등기로 지원서류를 보내왔다. 개봉하고 등록하려는 순간 적잖이 당황했다. 이력란에는 이름, 생년월일과 함께 단 한 줄만이 쓰여 있었다. “○○○공사 사장(199X~199X)”. ○○○공사는 현재 기관의 전신이다. 심플하지만, 포스 넘치는 이 이력서를 들고 인사기록을 살펴보았다. 온라인 시스템이지만 먼지 냄새가 나는 것 같은 이 기록은 사실이었다. 20세기 사장님이 21세기 비상임이사로 지원하신 것이다. 시스템도 놀라고 나도 놀라고, 팀장도 놀랐다. 심사를 위한 형식은 갖춰야 했기에 바로 A님, 아니 前사장님께 전화를 걸었다.
“이번에 ○○○공사에 지원하신 A님 되십니까?” / “어”
“다름이 아니라, 보내주신 서류에 이력과 계획서가 누락된 거 같아서요” / “그거면 됐지 또 뭘?”
그렇게 짧은 통화를 마치고, 며칠 후 심사가 이루어졌고, 그분은 서류에서 탈락했다. 나중에 선배한테 들은 말로는, 현직 때 성격이 불같고, 호탕한 사장님이었다고 했다. 의외였던 게, 직원들 복지에 정말 신경을 많이 쓰신 좋았던 사장님이었다고 들었다. 그분이 어떤 경로와 목적으로 지원하셨는지는 더 알 수 없었고, 결과를 통보하는 문자를 보냈으나 그 후 연락은 없으셨다. 이력서만큼이나 쿨한 지원자였다.
B의 경우는 A와 정반대였다. B는 상임이사 공모에 지원하셨고, 서류는 등기로 받았다. 지원자 대부분은 이메일로 보내지만 나는 아날로그 감성의 누런 행정 봉투 등기가 더 정감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B의 행정 봉투는 정감을 넘어 부담에 가까웠다. 받자마자 느껴지는 무게감과 두께가 지원자의 꼼꼼함과 절실함을 말해주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개봉하면서 내용물에 두 번 놀랐다.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계획서가 볼펜으로 꾹꾹 눌러 작성된 서류가 50페이지는 넘어 보였다. 증빙자료도 이력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고, 단정히 정렬된 인덱스는 세심하고 성실한 그의 직장생활을 대변하는 듯 했다. 감동과 부담으로 지원자를 등록하고 팀장님에게 보고하는데, 팀장님 말씀에 세 번째 놀랐다.
“이분 예전에 여기 ○○○본부장이었어, 이번에도 지원하셨구먼, 아주 단골이여.”
하지만 B도 서류심사에서 탈락하였고, 문자로 결과를 통보한 후 머지않아 전화 한 통이 왔다. 점잖고 중후한 노년의 목소리는 제출한 서류를 돌려받고 싶다는 B의 전화였다.
“네, 보내주신 주소로 우편으로 보내겠습니다.” / “아니요, 갈 일이 있으니 내일 로비에서 봬요.”
다음날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두툼한 봉투를 들고 로비로 나갔다. 로비 커피숍에 혼자 앉아 계신 노인분을 보았고 직감적으로 B임을 알아보았다. 차 한잔하시겠냐고 묻는 제안에 정신없이 바쁜 시기라 죄송하단 말로 불편한 자리를 피했다. B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그 길로 바로 정문으로 사라졌다. 쓸쓸한 그의 코트 자락을 보면서 혼자 로비에 앉아 기다리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궁금했다. 직원으로서 본부장으로서 바쁘게 걸어 다녔을 이 건물의 로비를 이제는 탈락한 서류를 반환받으려 기다리는 모습이 아이러니했을 것이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B는 공사가 임원을 공모할 때마다 지원해 왔고, 이제는 아는 사람도 다들 퇴직했는지, 직접 올 때마다 혼자서 저렇게 계시다가 간다고 했다.
결과적으로 미니멀리즘 이력서나 맥시멀리즘 이력서의 차이는 없었다. 다만 두 분 모두 진행형 ‘구직자’라는 사실과 퇴직 후 경제력 상실로 일자리 필요하거나 건재함을 증명하려는 시도라고 생각했다. 조직의 규모와 관계없이 평직원에서 ‘임원’까지 오른 사람은 분명 선택받는 자일 것이다. 인간에 대한 환멸까지 느껴질 정도의 사내 정치를 통해 얻은 그 왕관이 지속되는 자부심의 시간. 낙하산이든, 학연ㆍ지연ㆍ흡연이든 아무튼 임원 할 사람은 따로 있다고 생각한다. 왕관의 무게를 견디는 사람은 멘탈과 체력과 관운을 모두 갖춘 비범한 사람일 것이다. 화려한 명함과 부담스러운 儀典이 익숙해질 때쯤, 임기가 반환점을 맞이하면서, ‘나는 아직 더 일할 수 있으며, 내가 필요한 곳이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3년 전 이력서와 계획서를 업데이트하고 다시 신규채용 지원자로 돌아가는 순간이다.
임원 지원자들의 계획서는 모두 비슷하다. 본인의 업무 성과가 지면으로는 부족하다는 느낌을 살리면서, 멋진 사자성어나, 현자의 명언을 마지막으로 고난과 역경, 성공의 스토리를 마무리한다. 마지막에는 ‘비록 부족하지만...’ 클리셰로 겸손한 자세까지 갖추면 B+의 준수한 계획서가 된다. 내가 거친 수십명의 임원 중 계획서대로 한 명만 되었다면 우리는 세계적 기관이 되었겠지. 씁쓸하지만 인간은 과거의 영광을 추억하고, 아직은 지치지 않았음을 증명하려 부단히 노력하는 것 같다. 물론 나 같은 범인들은 작은 건물 세나 받고 이 재미없는 콘크리트 건물에서 나갔으면 좋겠단 생각만 한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