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렵한 턱 선과의 조우
곧 2024 사번이 들어오는가 보다. 입사하는 직원들은 인생의 중요한 숙제를 끝낸 기분이겠지만, 나 같은 근속연수 두 자릿수 사람들에게는 '올해도 할 거 하는구나.' 느낌이다. 우리 같이 큰 조직의 매년 수백 명의 신규인력은 그저 숫자로 존재한다. 하나하나의 재능과 발전 가능성을 눈여겨보고 핵심 인재로서 조직에 성공적으로 안착시킬지 고민하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물론 경력관리, 조직적응, 업무소통 등 멋진 교육 커리큘럼은 있지만, 타기관을 벤치마킹 했는지, 세련된 컨설팅의 결과물인지, 사실 다들 관심없다. 발령이란 흐름 속에 각자 존재할 뿐.
문득 나의 신입사원 시절이 궁금했다. 물론 당시로 돌아가서 코인이나, 2차 전지를 알려줄 순 없지만, 다양한 흔적과 기록을 통해 과거회상, 현재반성, 미래계획과 연결되지 않을까 싶었다. 이렇게 '잠시동안 제멋대로가 되어' 팍팍한 현실에서 도피, 과거의 나를 만나러 고독하고 지극히 미시적인 여행이 시작되었다.
팬시한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 '다음카페'는 최고의 소통 플랫폼이었다.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 기억도 없는 카페 로그인 화면까지 왔다. 여러 인증을 거친 후에 '200X 사번 동기모임 카페'에 가슴 벅찬 입장을 할 수 있었다. 불과 몇 개월 전 최신 글이 보였다. "승률 100% 온라인 포커 지금 입장하세요!", 그렇게 빈집 터 잡초 같은 불법 광고를 헤치고 활발히 이야기하던 곳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우선, '경조사 게시판'을 역순으로 보기 시작했다. 입사 후 청첩장, 백일잔치 초대장, 부고로 이어지는 동기들 인생의 프로세스가 보인다. 웃고 슬퍼하며 삶의 1/3을 성실히도 채워나간 인생의 기록. 모든 경조사가 한 줄의 제목과 거칠게 스캔된 이미지 파일로 남아, 불규칙하게 방문하고 다시 떠나는 주인을 기다리는, 충성스러운 늙은 개처럼 조용히 나의 방문을 기다려 주었나 보다.
다음은 '자유게시판'이다. 역시 첫 페이지를 찾았다. 주제 없이 각자 떠들어 대는 글 속에서 입사 직후의 에너지와 희망이 묻어난다. 유치한 인터넷 유머를 열심히 게시하던 동기, 성실히 댓글을 달아주던 동기. 기억도 나지 않은 십수 년 전 조직개편에 대한 불안(신입사원이 왜 조직개편을 걱정했을까?). 지금은 시답지 않은 유머는커넝 안부도 묻지 않은 건조한 관계 같이, 게시판에는 정말 자유롭게 이상한 광고만 즐비했다. 어린 시절 아파트 재개발을 위해 철거된 친구의 집터 앞을 혼자 걷는 기분이었다.
마지막으로 가장 궁금했던 '사진첩' 메뉴를 둘러본다. 역시 첫 페이지를 찾았다. 신입사원 OT 사진에서 당시의 열기와 취기가 느껴질 정도다. 십여 년 전이 이렇게 촌스러웠다고? 다들 술에 취해 광란의 밤을 보낸 OT를 지나, 매일 있던 술자리, 지금은 사라진 구청사 앞에서 찍은 사진 등 앳된 모습의 우리의 모습들. 다들 날렵한 턱선과 슬림한 몸. 알지만 낯선 얼굴들. 그 보다 더 낯선 시간.
서른 명 남짓 동기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짚어가며 회상이 깊어갈 때, 순간 머리속이 멍해졌다.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동기 형님 두 분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이다. 입하 후 5~6년 차, 두 분의 사고 소식은 당시 서른 즘을 지나고 있던 우리 모두에게 큰 슬픈 충격이었다.
각자의 삶 속에서, 각자의 삶의 무게를 지고, 누군가의 빠른 승진과, 누군가의 성공적인 재테크를 보며, 불합리한 조직과 세상을 욕하며 살긴 했어도, 신입사원 시절 같이 술을 따르고 서로를 격려해 주던 '사람'의 부재는 잊고, 밥 먹고, 일하며, 다양한 감정을 소비하며 살고 있었다. 그들의 죽음과 장례식도, 우리의 망각도 모두 세속적인 욕망 속에 용해되어 물속으로 퍼지며 사라지는 물감처럼, 농도 옅은 기억이 된 것 같다.
십여 년 전의 나를 찾는 고독한 여행은 여기서 끝났다. 사실 더 머무르고 싶었지만, 왠지 불편함이 느껴졌다. 다들 다음 주, 다음 달, 내년 달력을 꺼내 미래를 준비하는데, 나 홀로 무얼 얻자고 먼지쌓인 가상공간을 배회하고 있는가? 풍화작용이 없는 인터넷 서버에서 찾은 옛 사진들의 화질이, 흑백으로 느껴지는 것은 왜일까?
직장생활 시작 시절의 생경함과 사회인, 조직인으로서의 성취감, 현재의 외로움까지, 오롯이 견딘 몸과 마음에 감사하며, 마지막으로 그때로 돌아간다면 나에게 한 마디만 해주고 싶다. "코인과 2차 전지".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