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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아라풀 Dec 28. 2022

오늘도 걷는다

장영희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을 읽고...

  오래전부터 수필이 주는 친근함이 좋아 에세이를 읽으면 작가의 생각을 조금이나마 공유하는 느낌이 들어 다른 어떤 문학 장르보다 애정이 간다.

수필이야말로 어떤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글쓴이의 자유로운 생각이 반영되어 있어 ‘무형식의 형식’을 갖고 있어 평소 내가 살고자 하는 방향성 ‘마음을 두되 자유로운 영혼’ 임을 갈구하는 것과 조금은 닮아 있다.

장영희 작가의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 읽을 때는  분은 언제나 통통 튀는 매력을 가지고 있구나 생각했다.

몸이 병들고 불편해도 이렇게 재기 발랄할 수 있다는 것을 작가의 글 여기저기에서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장애인이라는 몸의 불편함이 삶 전체를 부정하지 않은 채 소소하게 적어 내려가는 그녀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미소 짓게 된다.

간결한 글 곳곳에 여운을 주는 문장들은 그녀가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 사람인지 작가의 면모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수필의 특성이 주는 정제된 언어를 사용해 그녀 자신의 개성이 묻어나는 글을 읽노라면 저절로 작가를 응원하게 된다.

여러 차례의 암 투병을 하고 이 책이 나올 무렵에는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며 원고를 손봤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는 이 책은 그래서 더욱 애정이 간다.

앉은자리에서 한 번에 기꺼이 읽어낼 수 있을 만한 길이의 짧은 글에는 작가 특유의 기개인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책 제목을 무엇으로 정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해서 오락가락하는 서두에서부터 희망을 이야기하는 책의 마지막까지 작가는 개성이 넘치도록 발랄하다.

신체의 부자유는 결코 정신의 자유를 뛰어넘지 못하였고 작가의 삶이 결코 순탄하지 않았으리라는 짐작은 그저 기우라고 치부할 만큼 그녀는 책 여기저기에 귀여운 옆 집 언니처럼 소란스러운 수다를 떨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세 차례의 암 투병과 소아마비 장애인의 수필은 다소 무겁고 강요된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을까 우려할지도 모르지만 작가는 그녀 특유의 재기 발랄함을 간결한 문장에 담았다.

이를테면 삶에 대한 그녀의 태도는 나와 비슷하다는 동질감을 주기에 친근하다.     

‘내가 살아보니까’중 일부에 나오는 글에서 나는 작가의 이 말에 격한 공감을 했다.

정말 착한 마음을 먹었다가도 슬며시 ‘에라, 나만 착하게 산다고 누가 알아주나, 아무렇게나 살자’ 나쁜 생각을 품기도 하고, 다시 ‘아니, 그래도 인간인데, 인간답게 살아야지’하는 마음으로 돌아오기도 한다. 뿐인가, 잘난 사람과 못난 사람, 볼 수 있는 사람과 볼 수 없는 사람, 기쁜 사람과 슬픈 사람 등 서로 다른 사람들끼리 치고받고 싸우기도 하지만, 결국 또 보완하고 도와 가며 함께 어울려 그런대로 한 세상 잘 살아가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이 세상이야말로 제일 좋은 형용 법의 예이다.

이 얼마나 생활하면서 종종 해봤던 말인가?

마치 내 속을 들여다본 것 같지 않은가?

유명 대학의 교수이자 작가인 사람의 글에서 나와 비슷한 생각과 말투를 발견하는 이 친근감이 그녀의 수필이 주는 개성이 아닐까?

누가 그녀에게 암 투병 중인 장애인이라고 하겠는가?

내가 색안경 쓰고 장애인을 바라보는 모질이라 그들을 폄하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스스로 반성할 만큼 인간미가 느껴지는 그녀의 삶이 경쾌하다.     

또 그녀의 절망스럽고 힘겨운 생활 속에서도 또 다른 희망을 발견하는 작가의 내면에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라는 책 제목에 고스란히 담겨 있는 이 책의 의미는 발랄함에 더불어 결코 가볍지 않다.

‘희망을 너무 크게 말했나 ‘라고 적은 에필로그를 읽노라면 작가가 삶에 대해 내가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해 온 힘을 다해 이야기를 했구나, ’이 이야기를 꼭 하고 싶었구나’라고 느껴져 오래 눈길이 갔다.

대학교 2학년 때 읽은 헨리 제임스의 <미국인>이라는 책의 앞부분에는, 한 남자 인물을 소개하면서 ‘그는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무서워 살금살금 걸었다’라고 표현한 문장이 있다. 나는 그때 마음을 정했다. 나쁜 운명을 깨울까 봐 살금살금 걷는다면 좋은 운명도 깨우지 못할 것 아닌가. 나쁜 운명, 좋은 운명 모조리 다 깨워 가며 저벅저벅 당당하게, 큰 걸음으로 걸으며 살 것이다,라고.

삶의 끝자락에 서 있으면서도 희망의 위대함을 믿으며 이렇게 말한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어느 학생이 물었다. 물이 자꾸 차올라오는데, 작은 섬 꼭대기에 앉아서 누군가 구해줄 것을 기다리며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눈먼 소녀의 이야기를 하며 누군가 “이런 허망한 희망은 너무나 비참하지 않나요?”라고 물었을 때 작가는 ‘아니, 비참하지 않다’고 답했다. “희망의 노래를 부르든 안 부르든 어차피 물은 차오를 것이고, 그럴 바엔 희망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낫다고. 갑자기 물때가 바뀌어 물이 빠질 수도 있고 소녀 머리 위로 지나가던 헬리콥터가 소녀를 구해 줄 수도 있다고. 그리고 희망의 힘이 생명을 연장시킬 수 있듯이 분명 희망은 운명도 뒤바꿀 수 있을 만큼 위대한 힘이라고”

“그래서 나는 누가 뭐래도 희망을 크게 말하며 새봄을 기다린다.”

나도 작가처럼 어느 순간이라도 포기하지 않고 오늘도 걸어가리라 다짐해 본다.

평생 병을 가지고 살았던 작가가 인생에서 가장 용기가 된 말이‘괜찮아’였다고 회상하던 그 순간처럼 이 짧은 위로의 말이 가진 힘의 크기를 믿는다.

때론 힘들어 포기하고 싶은 순간이 올 때 작가의 희망을 기억해야겠다.

배우 하정우의 수필에서 나온 글귀로 내 마음을 대신해 본다.

인간은 누구나 끝을 정해놓고 삶을 시작하지만 살아가는 동안은 때론 웃고 가끔은 눈물을 짓더라도 희망을 이야기해야겠다.

티베트어로 ‘인간’은 ‘걷는 존재’ 혹은 ‘걸으면서 방황하는 존재’라는 의미라고 한다. 나는 기도한다. 내가 앞으로도 걸어 나가는 사람이기를. 어떤 상황에서도 한 발 더 내딛는 것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이기를.     

 나는 오늘도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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