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 냄새 나는 것들
본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봉준호 감독의 영화는 항상 사회고발, 계급문제를 담고 있었다. '옥자' 에서는 공장식 축산에 대한 문제를 고발했으며, '괴물' 에서는 무책임한 한국 정부와 그를 이용해 사익만 챙기는 미국을 비판했다. '설국열차' 에서는 직접적으로 꼬리칸(프롤레타리아 계급) 이 앞 칸(부르주아)으로 돌진하는 혁명이 일어난다.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현실에서는 절대 바뀔 수 없는 것들이 영화 속에서 조금이라도 전복되는 것을 보며 카타르시스를 느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끝내 살아남은 옥자, 괴물의 죽음, 열차의 문이 열리고 새로운 계절이 도래하는 등 아주 작은 희망이 존재했던 것과는 다르게 영화 '기생충' 에서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한 희망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봉준호 감독은 더이상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혁명과 전복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그는 이제 좀 더 차가운 시선으로 한국 사회를 바라보며 기득권층에 기생충처럼 스며들어 콩고물에 만족하고 사는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그려낸다.
봉준호 감독이 그려낸 이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보며 한도 끝도 없이 불쾌한 느낌이 드는 이유는 바로 우리 모두의 현실, 그리고 추락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찢어지게 가난하여 사람들이 오고 가며 방뇨를 하는 반지하방에 모여 살고있는 기택의 가족은 한때 중산층에 속했다. 기우가 명문대에 가기 위해서 4수를 하는 것을 뒷바라지 해 줄 수 있었으며, 기정은 돈이 많이 든다는 미대를 지망한다. 처음부터 아무 희망이 없는 '흙수저' 였다면 자식의 4수와 미대 입학을 뒷받침 해 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기택은 치킨사업, 대만 카스테라 사업을 연이어 말아먹으며 끝내 빈민층으로 전락하고 만다. 중산층에 속해 있다가도 은퇴 후 살 길을 찾아 요식업 사업을 하다 쉽게 빈민층으로 전락하는 한국사회의 가정을 정확하게 반영한 것이다. 기택의 가족이 박사장의 집에서 도망쳐 비를 맞으며 계단을 계속해서 내려가는 하락의 이미지에도 이런 현실이 반영되어있다. 갑자기 추락하는 것이 아니라, 계단을 내려가는 듯이 계속해서 계층 하락의 단계를 거쳐 기생충이 되어가는 것이다.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차가운 시선으로 보는 영화에서 흔히 가난을 혐오하는 모습을 그리는 것과는 다르게, 봉준호 감독은 이들을 너무나 현실적으로 그려낸다. 기택이 '무계획이 계획이야. 계획을 세워도 계획대로 되는게 하나도 없어. 계획을 안세우면 실망할 것도 없거든.' 이라고 말하기 까지 얼마나 많은 계획의 실패를 겪었던 것일까, 학습해온 무기력으로 그들은 미래가 없는 삶을 살지만 그래도 기회의 줄이 내밀어지면 그것을 잡으려고 발버둥치며 온 힘을 다한다. 가난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에 '너희는 노오력을 하지 않아서 가난한거야' 라고 말하는 시선과는 다르게 정확히 문제를 짚기 때문에 더욱 차갑다. 한때는 인간으로 살았고, 노력을 했고, 계획을 세웠던, 그래서 우리와는 다르지 않았던 시민이 기생충으로 전락하는 상황을 그대로 보여줄 때 우리는 경악을 금치 못한다.
우리는 영화의 초반부에서는 라이트한 블랙 유머에 웃으며 기택의 가족들을 응원하지만, 그들이 박사장의 빈 집에서 먹고 마시며 도를 넘는 짓을 벌이는 장면을 보고 공감대를 잃고 헤매이게 된다. 그리고 박사장의 가족들이 집에 들어오자 바퀴벌레처럼 집안 구석구석으로 도망가는 모습을 보고 혐오감 까지 느끼게 된다. 잃어버린 공감을 박사장의 가족들에게 실으려는 찰나, 우리는 이 말에 다시 흠칫하게 된다. '그 지하철 타면 나는 냄새 있잖아.' 그 말에 기택이 자신의 냄새를 맡고, 감당할 수 없는 수치심과 분노에 팔로 눈을 가리는 장면을 보고 우리는 말을 잃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 또한 지하철을 타는 것들, 지하철 냄새가 나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이 혐오의 감정은 굉장히 흥미롭게 얽혀있다. 박사장의 가족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에 대한 무시, 혐오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바로 그 혐오의 대상인 기택은 박사장을 혐오한다. 기택의 아내인 충숙은 지하실에서 이정은의 남편을 발견하고는 기생충을 본 것처럼 혐오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다 이정은이 기택 가족의 비밀을 알게된 후, 갑자기 구도가 바뀌어 다시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린다. 바퀴벌레와 인간이 서로를 혐오하는 것 처럼, 그리고 개미와 바퀴벌레가 공생하지 못하고 서로 한쪽을 쫒아내려 싸우는 것 처럼, 박사장의 집안에는 두 종류의 기생충이 싸움을 벌인 것이다.
혐오라는 감정은 본래 더러운 것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생기는 원초적인 감정이라고 한다. 똥의 불결함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똥을 혐오하면서 자신의 청결함을 유지하는 것 처럼, 사람도 불결하고 불쾌한 가난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더 추락하지 않기 위해 가난을 혐오하는 것이다. 하지만 결국 이 혐오는 청결을 낳았는가? 지하실을 보며 멍한 표정을 하고서 '이런 데에서 어떻게 살아' 라고 말하던 기택의 결말은 어떻게 되었는가? 칼에 찔려 죽어가는 남자를 보며 냄새때문에 코를 막은 박사장은 결국 어떻게 되었는가? 아무리 서로를 배척하고 혐오해도 결국 같은 공간에서 지내며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이 사회에서 우리는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하는 것인가?
봉준호 감독은 이 영화에서 그 해답을 던져주지 않는다. 지독할 만큼 현실적으로 현실을 그려놓고 명쾌한 답을 주지 않는 이 영화를 보고 사람들은 왠지 모를 불쾌함과 무기력감을 경험한다. 반지하 집에 살고 있는 한 친구는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갑자기 울음이 터졌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이 입던 옷의 냄새를 맡아보고는 섬유 유연제를 두 배나 넣어 빨래를 했다고 하는 말을 들으며 나는 가슴이 먹먹해졌다.
어떤 친구의 옆에 앉아 영화를 관람하던 중년의 남성은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을 흘려서 친구를 어쩔 줄 모르게 만들었다고 한다. 돈을 아끼기 위해 필라이트 맥주를 마시는 사람, 요식업을 하다 망해 빚을 지게 된 사람, 반지하 집에 사는 사람, 박사장이 묘사한 지하철의 냄새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사람, 기득권층에게 멸시를 받으면서도 살아남기위해 그들의 비위에 맞춰주며 살고 있는 사람들은 이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가 어떤 감정을 느낄 것인가? 봉준호 감독은 한국 사회의 무너지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그로 인해서 상처받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일까?
그는 사회가 공생을 하기 위해서는 '리스펙트' 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리스펙트는 타인을 자신과 같은 인간으로 인정한 후의 이야기이다. 한국 사회에서 너무나 먼 그 지점의 이야기는 아직 우리에게 와 닿지 않는다. 실제로 박사장 가족이 보이는 가난에 대한 무지, 선민사상, 매너와 예의 이면에 숨어져 있는 고용인들에 대한 멸시와 선 긋기는 쉽게 사라질 수 없을 뿐더라 개인의 도덕심에만 맡기기에도 시원치 않다.
이 영화는 정말로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폭력적인 영화다. 겉을 치장하고 남들과 같아보이도록 노력하며 사회에서 애를 쓰고 숨어 있는 사람들의 옷을 벗겨 낱낱히 꿰뚫어보는, 아무리 겉을 치장해도 숨길 수 없는 그 냄새를 이 세상에 공개하는, 그리고 명쾌한 답이 없이 그 사람들이 현실을 직면하게끔 몰아가는 이 영화가 과연 '사람들에게 좋은 영화' 일 것인가?
세련된 메타포와 긴장감 있는 연출로 매끄럽게 만들어진 이 영화는 칸 영화제에서 황금 종려상을 받았다. 결국 기득권층이 만들고 기득권층이 연기한 영화가 기득권층에 의해 상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의 소재였으며 디테일이었던 가난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얻을 수 있는 것은 무력감과 패배감, 그리고 모멸감일 뿐이다. 가난을 이해하려고 노력하거나 공감하지 않고 그저 소재로써 관찰하고 연구한 봉준호 감독이 나는 조금 무서워진다. 가난을 소재로 만들어진 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가난한 사람들에게만 상처를 주게 된다. 진정한 가난을 체험하지 않은 사람들이 만든 가난에 대한 예술은 어쩌면 이다지도 위험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 기생충은 누구를 위한 영화인가?
※ 본 포스팅은 필자의 취향과 의견이 반영된 지극히 주관적인 리뷰입니다. 작품에 대한 감상은 개인의 취향과 기호에 따른 '다름'이 존재합니다. 본 리뷰가 본인의 감상과 다르다는 이유로 공격적인 댓글을 남기시는 경우가 빈번한데, 부디 '다름'을 존중할 줄 아는 너그럽고 성숙한 태도를 보여주시기를 정중히 부탁드릴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