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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선 Feb 26. 2018

<The shape of water> 합일되는 세계

물의 형태

"어린이는 어떤 것을 알기위해 분해하고 해체한다. 또는 동물을 해부하기도 한다. 나비를 알기 위해, 나비의 비밀을 드러내기 위해 잔인하게 날개를 잡아 뜯는다.이러한 잔인성의 동기는 사물과 생명의 비밀을 알려고 하는 소망에 있다. 이 '비밀' 을 알게 해주는 또 하나의 길은 사랑이다.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적극적으로 침투하는 것이고, 이러한 침투에 대한 욕망은 합일에 의해 만족을 얻는다. 융합하는 행위를 통해 나는 당신을 알고 나 자신을 알고 모든 사람을 안다. 나는 오직 한 가지 방법에 의해서만 인간에 대한 살아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있다. 우리의 사고가 제시하는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합일의 경험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을."

-에리히 프롬, 사랑의 기술-


엘라이자는 어떻게 보면 상처로 가득할 수 있는 내면을 가진 사람이다. 그녀는 고아로 어렸을 때 강물에서 발견되었고, 목에 큰 상처가 있었던 관계로 평생 농아로 살았다. 부모에게 버림받았을지도 모른다는, 자신의 근원에 대한 불안을 항상 가지고 살아야 했을 그녀의 삶은 고독했을 것이다.


하지만 화면에서 엿볼 수 있는 그녀의 삶은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인다. 그녀는 아침에 일어나, 달력을 찢고, 계란을 물에 올린 후 욕조에서 행복한 시간을 가진다. 삶아진 계란을 가지고 아침을 만든 후 이웃집의 늙은 친구에게도 나누어준다. 그녀는 독립적으로 자신의 기준에 따른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


화면에서 엿볼 수 있는 또 한가지는 그녀의 집인데, 물빛과 같은 색으로 이루어진 그녀의 집은 옆집 늙은 친구의 집인 호박색과는 아주 다르다. 깊고, 몽환적이고 조금은 동화적인 색을 연출하는 방은 마치 물 속같이 보인다. 이 영화에서 물은 물 이상의 개념이다. 물은 각각의 물방울로, 그리고 결합된 물방울로,강으로, 그리고 바다로 이어진다. 물은 통합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으며 통합될 때 완전해진다. 물은 절대 서두르지 않고 다른 존재를 포용하면서, 끝내는 '바다', 즉 평화와 전체가 된다.


이 영화에서 물은 각각의 존재가 서로 침투하고 결합되어 더 큰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을 거친다. 그녀가 홀로 행복한 시간을 가지는 곳이 물이 가득 담긴 욕조라는 것도 눈여겨 볼 수 있다. 그녀는 물 안에서 너무나 편안하고 행복해보이며, 자기 자신에게 행복을 선물할 힘 또한 가지고 있다. 처음에 방에서, 욕조에서 그녀를 담고있던 물은 엘라이자가 인어를 만날 때 욕조 안의 그녀의 물과 탱크 안의 인어의 물, 이렇게 2개로 나누어진다. 각각의 독립적인 세계가 서로 마주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 그녀는 인어를 알기 위해 해체하고, 그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고통을 주려는 사람들과는 달리 오직 순수한 호기심을 가지고 두려움 없이 탱크에 손을 가져다 댄다. 인어 또한 그녀의 노크에 반응한다. 그는 그녀와 손바닥을 마주하고,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는 나를 있는 그대로 봐줘요.  
그는 나를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을 모르는 듯이 나를 바라봐요.


하지만 인어가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가 먼저 인어를 있는 그대로 바라봤기 때문이다.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미지의 존재에 대해 두려움이나 혐오감을 가지지 않고 호기심과 조심스러움을 가지고 그에게 계란을 주고 음악을 들려주는 등 자신의 경험을 조금씩 나누어주며 그의 세계에 '침투'한다. 그들은 언어적으로 소통하지 못하지만, 이 장면에서 그들의 소통은 언어적 소통보다 훨씬 완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들은 서로의 경험을 통해 조심스럽게 상대를 알아가며 '합일' 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본격적인 합일은 고난 이후에 따라온다. 엘라이자는 인어를 위해서 자신의 위험을 감수하고 군 부대쯤은 되어야 해낼 수 있는 일을 해낸다. 엘라이자가 인어를 구출한 후에 그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넣어주었던 곳은 바로 그녀의 욕조이다. 그녀만을 포용했던 독립적인 행복의 장소를 기꺼이 타인에게 내어준것이다. 엘라이자의 물의 세계와 인어의 물의 세계의 경계가 사라졌다.


엘라이자의 용기와 희생으로 그들은 이제 같은 세계를 공유하게 된다. 이 '합일' 은 비오는 날 버스를 탄 엘라이자가 부드러운 손짓으로 창 밖의 두 개의 물방울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장면에서도 볼 수 있다. 그녀는 결합된 두 개의 물방울을 보며 잔잔히 미소짓는다. 이렇게 독립적인 세계에서 점차 겹쳐진 세계로 허물어진 그들의 세계는 계속되는 여러 단계를 통해 완전히 합일되는 경험을 하는데, 엘라이자가 자신이 인어에게 내어준 욕조로 함께 들어가 그와 사랑하는 장면에서 우리는 두 존재의 합일을, 그리고 화장실을 물로 가득 채운 후 함께 유영하고 서로를 껴안는 장면에서 그들 사이의 경계가 완전히 해체되고 그들의 세계가 완전히 합일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볼 수 있었다.


엘라이자가 인어를 껴안고 활짝 웃는 이 장면은 나에게 영화에서 가장 충격적이고 가장 아름다웠던 장면이다. 하지만 이 가능성은 끝없이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방해를 받으며 언젠가는 떨어지게 될 것이라는 분리의 불안에 엘라이자를 떨게한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무너지거나 회피하지 않는다. 결국 이 분리가 자신을 상처입힐지라도, 자신을 모두 내던져서 합일을 이루어냈던 것이다.

엘라이자와 인어가 이러한 합일의 경험으로 사랑을 실현하는 반면, 이들의 사랑과는 반대로 차별과 분리를 행하고 경험하는 사람들도 있다.  '흑인 은 이 가게에서 먹을 수 없습니다.'  '동성애자는 이 가게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파이 가게의 사장은 타인을 차별함으로써 자신의 세계에서 확실히 분리해버린다.


대표적으로 영화에서 악역으로 등장했던 리차드를 예로 들 수 있다. 리차드는 영화에서 단순히 악역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엘라이자와 인어가 경험한 사랑의 완전한 반대 개념으로 나타난다. 리차드는 사회의 약자들을 모두 차별함으로써 자신의 세계에서 분리한다. 하지만 리차드 또한 사물과 생명의 비밀을 알려는 깊은 동기를 가지고 있다.


이 동기는 분리의 체험에서 생기는 분리불안을 합일의 경험으로 극복하려는 욕구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합일을 통해 비밀을 알려고 했다면 그의 길 또한 엘라이저의 길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반대의 길을 택했다. 그는 타인을 알기 위해 고통을 주고 분해하고 해체시키려는 욕망으로 합일의 경험을 대체했다. 마치 나비를 알기 위해 분해하는 아이처럼. 엘라이자의 침투가 '경험의 나눔' 이었다면 리차드의 침투는 '가학성 음란증'이다. 영화에서 전기몽둥이로 설정된 그의 가학성 음란증의 동기는 사실상 사랑의 동기와 같지만 그는 사랑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다. 아내와의 관계에서 있어서도 그는 침묵을 요구하는데, 이는 사실 합일의 경험에서 비롯되는 침묵, 그러니까 언어적인 소통이 더이상은 의미가 없는 사랑의 경험을 추구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추구했던 것은 사랑에서부터 부차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지 사랑 그 자체에 가 닿을 수 있는 방법은 아니었다. 리차드의 타인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는 신체적 접합이라는 친밀한 행동에서도 자기 자신을 완전히 내어주지 못하도록 만든다.


리차드는 미지의 생명체에게 고통을 줌과 다를 것 없이 자신과 다른 인간들에게도 고통을 주고 그들을 계속해서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킨다. 그렇다면 그는 어디에서 분리불안을 극복할까? 권위와 복종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가장 가까운' 그의 하나님은 가톨릭의 가부장적 양상을 띄우는 아버지 신이다. 그는 복종하고 '아버지'의 절대적인 명령을 수행함으로써 사랑을 획득할 수 있다. 신의 모습에서 사랑과 합일을 제거하고 권위와 복종으로 대체한 것은 그에게는 필연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가톨릭은 사랑과 생명 그 자체인 모신(어머니신) 을 권위와 복종으로 이루어진 부신(아버지신) 으로 대체했음에도 모신에 대한 그리움과 합일로의 끌림은 어떻게 해결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성녀' 를 만들어냈다.


리차드에게 엘라이자는 '성녀' 이다. 그가 엘라이자에게 깊은 끌림을 느낀 것도 불안을 합일의 경험으로 극복하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그는 끌림을 "저런 똥, 오줌이나 치우는 것들에게 내가 뭘 바란거지"라며 끝없이 부정하고 계속해서 타인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킨다.



 또, 그가 안주하려고 하는 권위와 복종 안에서도 분리불안을 극복하지 못한다. 그도 그럴것이 그의 '아버지 신' 은 두려운 존재이며, 그가 잘 했을 때 칭찬하고 그가 잘 못했을 때 벌주는 존재이다. 그에게 사랑이란 주는 것이 아니라 싸워서 얻어내는 것이다. 그는 완전한 사랑을 원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가장 훌륭한 자식이 되기 위해 노력하지만 인간은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안정은 빈번하게 흔들린다. 영화 안에서 계속해서 그가 삼켜왔던 민트색 사탕은 사실 그가 '초조하고 불안할때' 찾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끝에서 알게되고, 사실상 그는 일생동안 계속해서 초조하고 불안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엘라이자와 인어가 함께 바다로 들어간 이 마지막 장면은 그들의 완전하고 영원한 합일의 체험이다. 지독한 상처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그 상처를 안고도 자신의 존재를 사랑하고 긍정할 수 있을 때, 타인이라는 미지의 존재 또한 사랑할 수 있게 된다. 자신을 사랑하고 미지의 존재 또한 자신과 같이 사랑할 때 비로소 세계(바다) 와 결합한다. 고독한 존재들은 모두 차별에서 만들어지고 반대로 사랑은 모든 것을 통합시킨다.



사랑에 대한 나의 개념이 얼마나 편협했는지 다시 돌아보는 계기가 된 너무 놀라운 영화이다. 영화에서 인어는 개인적인 존재인 우리가 우리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해있는 타인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여주는 극적인 장치이다. 우리는 모두 인어이고, 또 인어를 사랑하기 위해 다가가는 엘라이자다. 다만 그 사랑이 상대에게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간다면 우리는 틀린 방향이라는 것을 눈치채야 한다. 상대와 합일되는 진정한 경험으로 가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타인으로의 침투이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누고, 알려주고, 서로의 존재에 대해 배워야 한다.


에리히 프롬의 사랑의 기술에서는 사랑의 필수 4요소를 보호, 책임, 존경, 지식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보호란, 사랑하고 있는 상대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우리의 적극적인 관심이다. 마치 엘라이자가 인어를 보호하려 위험한 상황을 극복했던 것처럼 사랑과 노동은 불가분의 것이며,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것을 위해 일하기 마련이다.


책임은 전적으로 자발적인 행동이다. 책임은 다른 인간 존재의 요구에 대한 하나의 반응이다. 책임을 진다라는 것은 응답할 준비가 갖추어져 있다는 뜻이다. 또한 상대방의 정신적인 요구와 관련된다.


존경은 두려움이나 외경은 아니다. 어떤 사람을 있는 그대로 보고 그의 독특한 개성을 아는 능력이다. 존경은 다른 사람이 그 나름대로 성장하고 발달하기를 바라는 관심이다. 이 같은 존경은 착취가 없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영화에서 엘라이자는 인어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고 그의 특별한 능력을 알면서도 절대 이용하거나 착취할 생각이 없다.


지식은 주변에 머물지 않고 핵심으로 파고드는 지식이다. 이러한 지식은 나 자신에 대한 관심을 초월해서 다른 사람을 그의 관점에서 볼 수 있을 때에만 가능하다. 엘라이자는 분리라는 감옥으로부터 벗어나 다른 존재와 융합하기 위해 불가해한 존재를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The shape of water 는 몽환적이고 동화적인 스토리를 통해 우리에게 진정한 사랑으로 가는 길에 대해서 차근차근 알려준다.  또, 하나의 세계가 또다른 하나의 세계와 합일되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과 희생이 필요한지에 대해서도 설명해준다. 그리고 그 끝은 우리가 탄성을 지르며 아름답다고 느꼈던 그 바닷속, 곧 모든 것의 통합이다. 아름다운 영상미와 ost 가 감독의 의지를 우리에게 좀 더 강렬하게 전달 해 준다. 사실 영화 안에서는 좀 더 많은 것들에 대해서 말하는 장치가 가득하다. 이 영화는 개인과 개인의 사랑을 넘어 세계적인 합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세계가 사람들을 서로 분리기키는 장치와 그 중심에서 차별을 만들어내는 개념을 비판한다. (백인,헤테로,남성,가톨릭 등) 하지만 내가 이 영화에서 가장 강하게 느끼고 끌어낸 의지에 대해서만 적어보았다. 어쩌면 내가 요즘 생각하고 있던 것들과 맞닿아 있었기 때문에 이 영화를 보고 강한 느낌을 받았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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