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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선 Apr 19. 2022

파친코, 세대를 잇는 '버텨내는 힘'

꼭 버티낼기다. 반드시 헤쳐나갈 기다.

참 오랜만에 키보드를 두드린다. 만족스러운 삶에서는 쓸만한 글거리를 별로 찾아볼 수 없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글을 쓰지 않은지 일년도 더 넘은 내가 이제와서 키보드를 두드리는 이유는 '파친코'가 전달하는 버텨내는 힘이라는 메세지이다.


일제강점기 식민, 이민자, 자이니치, 자이니치2세의 삶이라는 4세대를 그려낸 작품에서 내가 집중한 것은 '버텨내는 힘'이다. 언청이 남편에게 시집을 가 아이 세명을 모두 잃은 어매는 무당을 찾아가 아이를 달라고 빌고, 무당은 말한다. 


'아가 생길기다. 꼭 버티낼기다. 반드시 헤쳐나길기다.' 


그렇게 4세대에 이어 모진 세월을 버텨낼 삶들이 탄생한다. 우리는 흔히 자신을 '개인적인 존재'로 생각하곤 한다. 일례로 아버지와 어머니는 나를 낳아주신 분이지 나의 일부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또한 조부모님, 그 위의 선조 또한 나와 큰 상관관계가 없는 분리된 존재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행동 후성유전학 분야의 연구에 따르면 조상들의 경험은 사라지지 않고 유전된다. 우리의 경험, 그리고 우리 조상들의 경험은 잊힐 수는 있어도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 경험들은 우리 일부가 되어 분자로 남는다. DNA는 겉으로는 똑같은 상태를 유지하지만 정신적 행태적 성향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유전될 수 있는 것이다.우리 모두는 유기적인 삶으로 이어진 존재다. 부모나 조부모, 또는 그들의 부모나 조부모가 경험한 사건들은 정신적으로 자손에게 영향을 끼치게 되어있다. 


"에모리대학교의 신경과학자들은 수컷 쥐를 아세토페논에 노출시킬때마다 발에 충격을 주었다. 아세토페논은 벚꽃과 비슷한 향을 지닌 물질이다. 2주 후에 그 수컷 쥐들을 암컷들과 교배시켰다. 그 사이에서 태어난 새끼들은 아세토페논 냄새에 처음으로 노출됐을때 불안과 두려움 증세를 보였다. 새끼 쥐는 뇌와 코에 벚꽃 냄새를 감지하는 신경 세포를 정상보다 훨씬 더 많이 지니고 태어났다. 벚꽃냄새에 대한 기억이 다음 세대로 전파된 것이다."


사람들에게 장애인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남편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던 어머니와 선자를 사랑하는 아버지 아래에서 선자는 태어날 때부터 당당한 존재로 세상에 나오게된다. 그 당당함은 자신의 존재에 한결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태도이다. 그 당당함은 강인함이며, 그녀의 강인함에 한수와 이삭, 두명의 남자가 선자에게 빠져든다.


한수와 이삭은 둘 다 강인함을 동경하는 인물이다. 한수는 자신의 가난함과 조선인이라는 출신을 부끄러워하는 인물로 선자와는 대비되는 인물로 그려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선인이라는 신분과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당당한 선자에게 매력을 느낀다. 일본 순사가 지나갈때도 고개를 굽히는 일이 없는, '지도를 보니 일본이라는 나라가 무시무시하지 않아보인다. 우리가 이길 수 있겠다'라고 말하는 선자를 동경한 것이다. 하지만 선자를 동경함에도 불구하고 그는 선자에게 첩이라는 '부끄러운 삶'을 선택하라고 종용한다. 그래서 노년의 선자는 말한다. '반은 나고, 반은 내가 아닌 인생을 살 수는 없었다'고. 선자는 물질적으로 풍요롭고 부끄러운 삶 보다는 빈곤하더라도 부끄러움 없는 삶을 선택한 인물이다.


이삭은 폐병환자로 어렸을때부터 신체적으로 허약한 인물로 항상 강인함을 동경해왔다. 3.1 만세운동을 나갔다가 잡혀가 목숨을 잃었던 큰 형을 존경하는 모습을 보임으로써 그는 비록 몸은 허약하나 굳은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조선인으로 멸시당할시언정 일본에게 굽히지 않으며, 짧은 결혼생활에서 선자와 아이를 부족함없이 살게 하려고 끊임없이 노력하는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또, 선자와 아이에게 조선인으로서의 떳떳하고 당당한 인생을 선물해주고 싶어한다.


이렇게 대비되는 모습을 보이는 한수와 이삭의 자식이 성장했을 때, 자식들의 모습은 아버지를 다시금 떠올리게 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가지고 타지에 꼿꼿히 뿌리내리고 사는가, 그렇지 못하는가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는 바로 '당당함'이다. 우리가 우리의 뿌리를 부인하고 당당함을 잃었을때 삶을 '버텨낼' 힘도 스러지는것이다.


세대를 잇는 기억은 끈질기다. 솔로몬이 계약 서명을 앞두고 집주인 할머니에게 '팔지 마세요. 그렇게 말했을거예요.' 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그가 일제강점기를 직접 겪지 않은 세대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핏줄에 박혀있는 한을 통감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게 말했을때 그는 떳떳했고, 당당했고, 무엇보다 부끄러움 없었다. 날아갈것 같은 마음에 그는 비오는 날 뛰쳐나가 춤을 춘다. '할머니 때문에 내가 마음이 약해져서 팔지 말라고 말했어요.' 라는 솔로몬의 말에 선자는 '그건 약해진게 아니다.' 라고 대답한다. 맞다. 솔로몬은 그 순간 약하진게 아니라 어느때보다도 강했다. 그는 선자의 당당함을 드러내고, 또 이삭의 강인함을 드러내며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 후, 그는 자신의 뿌리를 받아들이며 반만 나였던 삶을 버리고 온전히 나로 살 수 있는 삶을 선택한다.


세대간의 기억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핏줄에 박힌 한으로 '이미 지나간 일이니 이제는 미래를 바라보자'는 말에 화낼 수 있는 당당함이다. 조상의 한을 잊지 않고 기억하는 꼿꼿함이다. 수많은 핍박과 차별과 혐오 속에서도 버텨내고 버텨내왔던 우리의 조상들의 뿌리를 잃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누군가는 잡초라고 불렀던 굳센 생명력을 가지고 앞으로도 버텨내겠다는 약속이다. 파친코를 보며 나는 시장바닥에서 홀로 자식 넷을 먹여살린 할머니의 강함을 기억한다. 단 한번도 남에게 빚지고 살지 않은 엄마를 기억한다. 그 강인함이 나에게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할때 나는 비로소 세상 앞에서 당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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