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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밤이 Sep 15. 2020

탈출구 없는 이데올로기

목적으로서의 혁명과 부재하는 이상향

 선택의 부재로 인한 심적 부담이 인간 존재에게 정신적인 고통을 준다는 것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선택을 내리지 못하고 방황하는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조언은 선택을 주저할 만큼 인생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과 덧붙여서 반드시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즉슨, 마음을 굳게 먹으라는 식의 강인한 정신력을 상기시키는 조언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라는 너무나도 잘 알려진 인간 실존에 관한 진부한 격언은 선택을 유보하는 것에 따르는 대가가 혹독하다는 사실을 견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당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젊음이나 또는 인생이란 것이 그리 길지 않다는 것은 선택의 유보로 인해 지체되고 마는 유한한 시간이 존재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삶은 유한하다. 이 유한성으로 하여금 우리는 선택을 주저하지 않게 된다. 그 선택이 아무리 성급하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렇다면 시간의 유한성이 과감한 선택을 내리게 돕는다는 사실이 전부라고 할 수 있을까? 애매하다. 향후 50년을 내다보고 현재를 인식하고 행동하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그러나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보다는 우리가 과거를 그리고 지금 현재를 미숙한 상태로 지내고 있음으로 해서 찾아올 후회, 시간을 돌이킬 수 없다는 자명한 진실이 놓여 있음에도 항상 과거로 돌아가고자 하는 상태가 선택을 내리는 데는 더 큰 도움을 줄 것이다. 과감한 선택이란 후회가 첩첩산중으로 쌓이다 보니 어느새 귀감이 되는 말이 되지 않았을까? 당신은 후회를 하지 않는 사람인가? 한 번이라도 지금보다 젊은 시절을 그리워해 본 적이 없는가?


 이에 따라 우리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는 식의 조언은 꽤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굳이 이렇게 말을 길게 늘어뜨려 왈가왈부해야만이 이것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반복컨데, 인생 전반에 깔려 있는 선택의 순간에서 그리고 도래할 시간에 우리는 과감하게 판단해야 한다. 지금 당장 벌어진 일을 처리하기 위해서 그리고 미래에 무얼 해야 할지까지 결정해야만 하다. 그래서 현시대는 고민하는 시간을 줄이고 최대한 빨리 행동하는 것을 미덕으로 강조한다. 굳이 자본주의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어느 시대에나 먹혀들었을 법한 격언이 아니던가. 하지만 이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듯하다. 어떤 일을 이뤄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느 정도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니 행동하는 것은 중요하다. 허나 나머지 반이 틀린 이유로는 그 선택이 옳은 지에 대해 충분히 심사숙고할 여력을 남겨둬야 한다는 점에서, 반은 틀리다. 몇 년 전에 비트코인이 유행했을 때 너도 나도 '가즈아!'를 열광적으로 외치며 그 대류에 편승했다. 그중에서 막대한 돈을 벌어들인 사람도 있었지만 전재산을 투자했다가 차트가 수직으로 낙하하는 바람에 자신의 육신도 덩달아 낙하하게 된 사람도 생겼다. 맹목적 낙관론이 만들어 낸 참혹한 결과를 방지하기 위해 캉디드를 필수 교양 도서로 선정해야하는 것인가? 원래 어떤 일을 행하는 데에 있어 골똘히 생각하고 신중하게 판단하여 움직이는 것보다 일단 저지르고 보는 것이 더 쉬운 법이다.


 그런데 사실 재빨리 선택하는 과감함이나 선택하지 않고 선택을 유보하는 신중함 둘 다 딱히 문제가 되지 못할 수도 있다. 자유지상주의의 관점에서는 한 개인이 이러거나 저러거나 하는 어떤 선택을 내리고 그로 인한 결과를 맞이하는 것은 사람들의 관심거리가 되질 못한다. 모든 선택은 개인의 책임일 뿐이다. 그래서 간단하게는 개인이 책임감이란 것을 충만하게 갖추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래서 책임감이 전부라고 한다면, 그렇다면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선택할 만한 것이 없다는 것이다. 즉 부재하는 선택지로 인해 자연스레 부재할 수밖에 없는 선택이 문제적이다.


 이념들에 대한 논의들, 인간 성향에 대한 고찰들, 그리고 실존적 존재가 구사하는 언어로 규정되는 지침들은 실재의 불안에 마주하는 존재에게 새로운 길을 모색하게끔 이끈다. 인간 존재를 이해하기 위한 여러 사상들은 인류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 또 어딘가에 당도하기 위한 질서 따위를 구축한다. 머나먼 그 어딘가. 언어가 기록을 통해 계승되어온 연역을 본다면 분명 진보란 것이 무엇인 지에 대해 미래와의 확연한 연결고리를 놓아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 어딘가'에 당도할 수 있을까? 미래와 과거, 양자 간에 유명론적으로만 존재할지도 모를 시간대와 '머나먼'이라는 수사가 지칭하는 통시적 거리감은 그 자체로서 불가해하다. 그와 관련된 모든 시도들이 함축하고 있는 것은 이상향과의 연결고리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힌다. 역사는 미래를 바라보는 창이라고 말한다면, 지금 이 현재 그리고 미래는 역사의 끊임없는 반복이다. 그러나 왜 그 반복의 굴레를 계속해서 굴리기만 하는가? 정신분석적으로 주체의 역사적 서사가 미래를 기획하기 위한 근본적인 구성물이 되는 것처럼, 우리는 과거의 현전하는 사태들 만으로 미래를 구축해야 한다. 또한 기억의 빈 공백을 메워넣기 위해 그 시간대를 재현해 내는 과정은 필수불가결하지만, 인간은 망각의 존재라는 말이 더 익숙하게 다가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더군다나 이상향, 즉 유토피아는 말 그대로 '존재하지 않는 세계'이다. '없는 세계', 또한 그것과의 연결을 보증하는 고리는 없다. 그런 것이 애초에 존재하기라도 했던가?


 그러나 이것을 단순히 관념의 기호로만 치부할 순 없으며 그 중후한 무게는 결코 감소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이 관념적이라는 그리고 환영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의미를 더 부각시킬 따름이다. 현실의 원리들이 환상을 지탱한다. 그러나 환상과 동떨어진 그 어떤 현실도 존재할 수 없다. 주체가 그 환상이란 것을 부정한다고 한다면 과연 이 삶에서 각별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환상을 부정하고서 현실을 직시하게 될 경우에 발견하게 될 부정적 양태는 주체를 어디로 향하게 만드는가? 그것은 또다시 환상으로의 침투적 회귀이다. 불만족을 보상하기 위해 등장하는 환상은 이전의 환상보다도 더 과도한 형태로 등장한다. 이 자리에서 주체의 상상적인 이미지가 아무리 몽상적이라 한들, 주체는 그 이미지에 적응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리고 환상이 현실을 보충하며 그것이 곧 주체에게 지배적인 정서가 된다. 인간은 없는 것, 즉 존재하지 않는 것을 희구한다. 현상학과 정신분석은 동일하게 '없는 것'을 대상으로 각기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환상과 망상, 이 둘을 가르는 기준은 무엇인가?


 최근 인터넷에 떠도는 MBTI 검사는 그것이 전혀 공신력을 갖지 못한다는 전문가의 소견이 있었음에도 대중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아주 사소한 유희 거리가 되고, 누군가에게는 아주 진지하게 옹호하고 따를만한 신박한 소재가 되었다. 인기에 힘입어 이와 유사한 다른 검사들도 우후죽순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 검사가 얼마나 진실한 지를 판가름해서 무엇하겠냐만은, 고작 16가지의 성향으로 다채로운 인간상을 간추린다는 것이 확실히 편협하긴 하다. 몇 가지 정도가 되면 편협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진 모르겠으나, 그 질문 내지 설명들 조차도 단편적이다. 하지만 여기서 받아들여야 할 진실은 그 성향이 옳고 그른 지에 대해 따져 묻는 것이 아니다. 주목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대략적으로나마 자신이 누구인 지를 밝히고 있는 검사에 흥미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니체의 말대로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조차 얼마나 미심쩍은 존재인가? 적성이니 취향이니 하는 개성에 관한 물음들, 그리고 자신에게 조금이나마 맞는 직업을 찾고 싶다는 적성에 대한 탐색과 진로에 대한 관심들, 그리고 자신의 잠재성을 발견하고자 하는 열정들, 이 모든 것들은 모종의 회의가 반복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것을 '회의'라는 개념을 중축으로 인간 본연의 열망이라고 보고자 하는 것이 개인적인 바람이긴 하다면, 아주 정직하게 뇌리를 스치는 생각은 비관적이다. 그 비관이란, 하도 먹고살기 힘들다 보니 이왕 이렇게 된 김에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행복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려는 소소함 정도로 비친다. 그렇다고 이것을 문제 삼기보단 오히려 더 강조하고 있는 것이 이 글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이다. 이 사소하고도 별 것 아닌 검사지가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를 무엇이라고 생각할 것인가? 이 검사지로 인해 미래로의 기획투사가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앞선 물음을 반복하자면, 환상과 망상을 구분 지을 적절한 기준이 있는가? 이 둘에 대한 판단은 당도하기 전까지는 무한히 유보된다. 이것을 경계 짓는 기준은 '좌절의 경험'일 것이다. 오직 이 경험만이 나의 환상이 망상적이었다는 회의적 판결을 내린다.


 이념적 기획물은 마치 MBTI 검사지의 결과처럼 다채로운 개성을 가진 인간을 획일화시키는 편협한 발상쯤으로 치부된다. 진부한 이야기를 반복하자면,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들은 모두 소비자가 됨으로써 소비를 미덕으로 여기게 된다. 거기서 출몰한 자본주의적 인간은 자본주의의 논리나 힘의 논리를 강조하기에 이르는데, 가령 그런 사람들이 만약에 중세 시대에 태어났다면 신과 예수의 열렬한 추종자가 되어 십자군 전쟁에 자원해 온 몸을 불살랐을 것이다. -이데올로기란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이념적 질서가 비일관적이며 지상 전체를 매울 수 없는 것처럼, 이념이란 모든 존재들을 아울러 포섭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념에게 붙잡히지 않는 그 틈새에서 그에 반하는 태도들이 튀어 올라온다. 그 예시로 하나를 들자면, 자본주의 내에서도 충분히 관대하게 수용될 수 있는 태도로 미니멀-라이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즉 필요한 것만을 소비하고 또 적게 소비하는 등의 경제관념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절약적인 삶을 강조하는 태도에는 그 어떤 저항의 구심점을 찾아볼 수 없다. 이것은 마치 일말의 냉소적 태도조차 갖지 않을 수 있는 대안적인 심급으로, 어떤 회의조차도 무용하다는 판결만이 이 태도를 고집스럽게 고수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거기에 반절은 허무주의에 기초하고 있다고 해도 무리가 없다.


 문제는 이념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념을 문제 삼는 것은 지성적으로 행할 수 있는 유일한 비판적 태도처럼 보이긴 하나, 모든 것들이 이념 자체의 문제라고 소급 적용시키기는 어렵다. 그것을 지탱하고 있는 심적인 태도, 즉 우리가 너무나도 적극적으로 행하고 또 삶에서 떼어 놓으래야 땔 수 없는 규정들과 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판단'이다. 그리고 이념은 무언가를 판단할 만한 근거적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판단하는 것이 나쁘다고 할 수 있는가? 어느 누구나 타인을 판단한다. 하물며 생전에 만나본 적도 없는 사람조차도 판단을 할 수 있게 된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이것이 이념이 기능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판단하는 것이 옳지 못한 것이라 한다면 우리는 판단하지 않고서 살아갈 수 있는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항상 무언가를 인식하고 판단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리고 이런 태도로 말미암아 생겨나는 문제는 부지기수이다. 상징들의 비일관성이 아와 비아의 투쟁을 산출해 내듯이, 또한 편협한 판단은 무언가를 배제하고 혐오하고 부정한다. 그리고 인간은 어떤 대상을 오해하고 오도하며 실수를 하여 번복하기도 하고 또 그릇된 행동이라 규정된 것을 저지르기도 한다. 불행의 원천이 좋고 나쁨을 나누고 시비를 따지는 것에서 비롯된다는 허무주의자 및 회의주의자들이 찬동하는 말은 충분히 성립한다. 물론 그런 자들조차도 한껏 자기 자신을 기만하고 있지만 말이다.


 영화 <퓨리>에 나온 대사였던가. '이념은 평화롭지만 역사는 잔인하다' 그 이념을 체현하고 절실히 믿는 인간은 구사되는 기표 아래로 항상 미끄러져 간다. 어떠한 정언들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으며 수행될 수조차 없다면 그곳에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그래서 다시 본 논의로 돌아오자면, 판단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판단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 그것은 선택지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본주의의 대항마로 등장한 막스주의를 비롯한 현재 반-자본주의적 담론들에서 강조하는 '과격한 도약'은 선택지가 되기 어렵다. 여기서 '없다'라는 완전한 부정으로 끝맺지 않는 이유는 폐허 속에서 새로운 질서가 구축될 수 있다는 말을 부정하진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정녕 묻고자 하는 것은 그 질서란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좌파적 담론에서는 '이상향', 즉 더 나은 세계가 반드시 존재할 것이라는 믿음으로 논의를 개진한다. 그러나 여기서 칸트의 '정언 명령'에 위배되는 모순이 존재한다. 좌파적 지식에서의 '과격한 도약'은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임에도 목적이 되어버린, 그 자체가 목적일 수 없음에도 그것만으로 모든 것들이 성사되리라는 믿음에서 난해하다는 혹평을 피할 수가 없을 것이다. 혁명이 일어나기만 하면 모든 것들이 정상적이고 안정화된 상태로 돌아가는 것인가? 막스주의의 후속편 정도로 보이는 레닌주의의 과격함은 분명 혁명을, 혁명을 위한, 혁명에 의한 것만이 진실될 수 있다는 모순을 담아내고 있다. 나는 그 '이상'이란 것이 무엇인 지를 알기 위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 하는 것이며, 간단히 말하자면 '제대로' 판단해야한다는 것이다.


 물론, 막스주의와 레닌주의를 구분하지 않고 모두 공산주의라는 하나의 이념으로 일축해서 표방하는 우파적 지식들의 간소함에는 의뭉스러운 구석이 있긴 하다만, 좌파는 좌파대로 '불가능한 것이 일어난다'는 난해함을 반복하기만 한다. 우파는 문제를 문제 삼을 생각조차 없는 나르시시스트 집단으로 인식되지만 좌파는 부재하는 선택지를 갖고서 사유하는 몽상가들로 인식된다. 그래서 도대체 이상향이 무엇인가? 이상이란 것을 확실히 제시하기만 한다면 혁명이 일어나지 않을 이유란 없을 것이다. 정신분석적 관점에서는 환상이 주체의 선택을 규정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환상의 부재, 즉 선택지가 부재하는 이상 선택은 자연스럽게 유보될 수밖에 없다. 반면 우리나라에서 촛불 혁명이 일어나 어떻게 박근혜 대통령을 끌어내릴 수 있었을까? 과학이 미신적 믿음에 반하는 불신을 충분히 구축해 놓았기 때문이다. 언제나 회자되어야 할 것은 이념에 관한 문제이긴 하지만, 추구하는 작업물의 목적은 이념 자체를 배제하거나 또는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념을 배제하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지지부진한 논의는 마땅한 대안이 나오기 전까지는 반복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뾰족한 수가 있어 이러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답을 찾기 위해서는 무한히 회의해야 한다는 것을 말해 무엇하겠는가. 학문의 본질은 의심이라던가?


 3년 전 즈음에 존 레논의 곡 'Imagine'을 듣고서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면 이 짓을 하고 있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눈물을 흘린 이유는 여전히 불가해하다. 그가 쓴 곡 내용만 보아도, 모든 상징들에서 벗어난 '탈존', 즉 모든 판단을 배제함으로써 얻게 되는 건 모두가 세상을 공유하며 나아가 하나가 되는 이상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전혀 엄밀하지 않은 이 사유는 존 레논이라는 한 개인의 윤리적 특수성 내지 광기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종의 윤리적 광기. 마치 키에르 케고르가 '네 이웃과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을 원수의 가족들 마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읽어낸 것처럼 말이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이것을 보편적이라고 말하기엔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며, 사유는 전혀 특수하지 않은 완전하게 평범한 것을 기준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나는 살면서 이왕이면 모두와 원만한 관계를 맺으려 노력했기에 딱히 원수질만 한 사람을 만들어 보진 않았는데, 아마 그러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윤리라고 불리는 것이 왜 실현되지 못할까? 그 지침이 실현될 수 없는 이유인 불가능성에 대한 탐구가 꽤 오랜 시간 동안의 관심사이긴 한데, 여전히 공부가 부족하다. 불가능한 것들을 규정하고 나면 남아 있는 것들은 진실일 수밖에 없다고 하니, 만약 이 말이 틀린 말이었다면 그건 또 차후의 문제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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