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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소망 Nov 04. 2024

외할머니

벌써 돌아가신 지 10년이 넘으신 외할머니. 어린 시절 어느 순간부터 우리 집에서 함께 사셨다. 정확한 날짜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마 많은 일들을 겪으시고 우리 집에 오셨을 것이다. 외할머니가 오신 후부터 우리 집의 살림은 할머니께서 다 하셨다. 식사부터 빨래, 청소 등등. 바쁘신 부모님은 집 밖에 계신 경우가 많아 밤늦게나 집에 오셨고 할머니께서 우리의 점심과 저녁을 챙겨주셨었다. 중학교 때 내 별명중 하나는 소시지였다. 할머니는 내 점심 도시락으로 매일 분홍소시지를 싸주셨다. 가끔은 계란옷을 입었고 대부분 안 입었었는데 나는 매일 싸주시는 그 반찬이 싫어서 다른 친구들과 바꾸어먹었다. 그래서 지금도 분홍소시지를 안 먹는다. 아마 할머니는 그 반찬이 제일 좋은 반찬이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저녁은 냉장고에 있는 여러 가지 밑반찬들과 찌개를 해주셨는데 밥은 항상 고봉밥을 주셨다. 국그릇보다 큰 냉면그릇 가득 밥을 담아주셔서 '할머니. 이걸 어떻게 다 먹어요.'라고 했지만 항상 다 먹곤 했다. 

외할머니랑 살가운 사이는 아니었다. 할머니는 언제부턴가 밖에서 폐지 줍는 일을 하셨고 집에 돌아오셔서 집안일하시고 방에 들어가서 티브이를 보다가 잠드셨다. 나도 착한 손자. 재밌는 손자는 아니었어서 할머니께 장난을 치거나 대화를 많이 나누지는 못했었다. 할머니는 나보다 다른 손주를 더 이뻐하셨는데 아무래도 장남의 자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청소년기에 할머니가 계신 것이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다. 할머니의 구역과 내 구역이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었고 굳이 그 영역을 넘는 경우는 없었다. 아. 하루는 할머니께서 무슨 이유 때문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용돈을 주신적이 있다. 벽에 걸려있는 거울 뒤에 봉지가 숨겨져 있었는데 그 안에 담긴 봉투에서 2천 원을 용돈으로 주셨었다. 그 후 나는 몰래 그 봉투에서 5천 원을 훔친 적이 있었다. 생각해 보니 나는 할머니 구역을 넘었었구나.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폐지를 주우러 다니셨다. 옛날 폐지 줍는 사람들이 많이 없던 시절에 동네 폐지는 할머니께서 죄다 모아 오셨다. 그래서 집 옆 공터가 전부 폐지로 쌓여있었다. 할머니가 그렇게 폐지 줍는 것이 부끄러웠던 적은 없었다. 학교 갔다가 돌아올 때 할머니를 보고 같이 폐지를 주웠던 적도 있다. 할머니가 못하게 하셔서 금방 돌아서야 했지만. 일평생 자식들 돌보시고 농사하러 다니시고 폐지를 주우시고 그렇게 할머니는 항상 일을 많이 하셨다.

그러다가 10년도 더 전에 췌장암 판정을 받으셨다. 대학병원에서, 집에서, 호스피스에서 치료와 요양을 하시다가 돌아가셨다. 할머니 장례는 4일장이었는데 많은 사람들 와서 슬퍼하고 위로해 주고 돌아갔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전에 우리 집사람과 아이들을 참 이뻐해 주셨다. 나에게 하셨던 것처럼 매일 식사를 챙겨주셨고 아이들에게 용돈도 주셨다. 셋째 녀석은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면 항상 할머니방에 들어가서 같이 드라마를 보곤 했다. 나도 결혼하고 철이 들어서야 할머니에 대한 애정이 더 깊어졌었다. 감사한 마음이 컸다.

오늘 티브이를 보는데 시골 마을 할머니들께서 마을 회관에 모여 식사를 하고 계셨다. 한참 할머니와 닮으신 분이 있나 찾아보았다. 그렇게 할머니 생각이 났다. 할머니가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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