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나씨 Dec 28. 2020

회사 체질이 아니라서요


감정과 몸은 솔직하다. 신나거나 기쁠 땐 절로 팔다리가 춤추듯 경쾌하게 움직이고 입가엔 미소가 번진다. 마음은 터지기 직전까지 부풀어 오른 풍선처럼 벅차오른다. 그것이 정말 좋아하고 하고 싶은 것이라면 위기가 닥쳤을 때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지치지 않고 방법을 찾고 또 찾는다. 


내 감정과 몸을 관찰하면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던 것들이 간단히 이해되는 순간이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 납득할 만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면 직접 부딪혀 보는 수밖에 없다. 모두가 만류하고 쓸데없는 짓이라 해도 나조차 이게 잘하는 것인지 의심스러워도 해보는 것 외엔 방법이 없다. 시도한 결과가 성공인가 실패인가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 이게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것이었는지 비로소 알게 된다는 것이다.


막연함과 불안함을 지나온 후에야 진짜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확신할 수 있다. 서메리 작가가 마침내 자신은 회사 체질이 아니라는 걸 알아내고 삶의 많은 시간에 만족하며 살 수 있게 된 것처럼.


일본에서 일한 지 6년이 넘어가는 시점부터 앞으로의 커리어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회사를 계속 다니면서 무언가에 도전해야 할지, 아예 새로운 일에 도전해야 할지 갈팡질팡하면서 두 해를 보냈다. 2020년 12월, 내년 한 해는 새로운 도전에 시간을 쓰기로 드디어 결심했다. 이 책을 읽은 것은 용기를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무엇을 감당해야 하는지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퇴사 후부터 프리랜서로 자리잡기까지의 3년간의 여정에서 구체적으로 뭘 하며 준비했고 어떤 것이 불안했고 힘들었는지 자세히 기록해 주신 작가님께 정말 감사했다. 책을 덮은 뒤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불안과 기다림에 익숙해질 것. 

막연함 속에서도 꿋꿋이 내가 할 일을 계속해 나갈 것.


어쩌면 커리어에 대한 도전뿐만 아니라 인생 전반에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을 배웠는지도 모르겠다.



본문 중에서

프롤로그. 

내가 회사에 매여있으면서 느꼈던 괴로움과 퇴사를 결심했을 때 느꼈던 막막함, 그리고 프리랜서에 도전하는 동안 절절하게 느꼈던 두려움은 분명히 나만의 감정이 아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어느 세상이든 장단점이 있고 힘듬과 기쁨이 있다. 내가 선택한 길이라면 그걸로 충분하다.



p46.

나는 어떤 일을 할 때 기쁠까? 어떤 일을 할 때 잘한다는 칭찬을 들었던가? 일상을 돌아보며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을 하나씩 짚어 내는 경험은 참으로 묘한 감정을 자아냈다. 분명히 막연하고 두려운데, 어디선가 근거도 없는 희망이 나타나 조심스레 숨어있던 설렘을 부채질했다. 잘만 된다면, 나는 회사를 벗어나 지금 적은 것들 중 하나를 직업으로 삼고 살아갈 수 있을 거야.



p54.

안정적인 월급을 포기하고 프리랜서에 도전하면 아무리 긍정적으로 내다봐도 얼마간은 배고픈 생활을 할 것이 뻔했다. 소심한 내가 그 기간을 온전한 정신으로 버텨 내려면 단순히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직업의 성격이 내 개인적인 성향과 맞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기약 없는 발버둥을 치다가 지레 포기하지 않으려면 일정한 기간 안에 어느 정도 성과를 기대할 수 있는 분야를 택해야 했다. 

작가는 추린 직업 중 자신과 맞지 않는 불특정 다수의 사람과 어울려야 하는 직업, 진입 장벽이 너무 높은 직업을 제외하고 마지막에 남은 번역가를 택한다. 자신이 좋아하는 책 읽기, 전공했던 영어, 혼자 하는 작업이라는 점. 믿을 만한 교육기관과 수료 후 작게나마 기회를 얻을 수 있는 구조를 이유로 출판번역가에 도전한다. 



p76.

아이러니하게도 효율 따위는 접어 두고 세상에서 가장 느린 이동 방법을 택한 순간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다. 



p97.

나는 문장을 즐길 수 없었다. 내가 읽는 문장에는 어떤 탄탄한 구조나 치밀한 복선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영문과에 다닌 가락이 있는데 영어 텍스트 읽기는 남들보다 좀 유리하겠지’라는 헛된 자만심이 순식간에 못난 맨얼굴을 드러낸 것이다. 생각해보니 대학 시절 접한 원서들은 일종의 수업 교재였기 때문에 ‘즐기며 읽었다’기보다 ‘꾸역꾸역 공부했다’는 표현이 더 어울렸다. 


 복선도 구조도 즐길 수 없으면서 그저 한 단어씩 기계적으로 번역하는 것에 불과하다면 구글 번역기와 내가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나는 급히 서점의 외서 코너로 달려가 내가 독서의 재미를 느끼며 술술 읽을 수 있는 수준의 원서를 찾아보았다. 내 눈은 다빈치 코드에서 해리 포터로, 다시 찰리와 초콜릿 공장으로 급격히 낮아졌다. 

일단 영어책의 구조에 익숙해지자 텍스트의 수준을 높여 나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예상보다 길지 않았다. 동화책 시리즈 10여 권을 몇 주만에 다 읽고 초등학교 고학년 용인 해리포터로 넘어갔을 때 확실히 당혹감이 상당히 줄어 있었다.

이것도 어쩌면 위기였을 수 있고 능력 부족이나 안 맞는 것이 아닐까 의심할 수도 있었을 텐데 포기하지 않고 극복할 방법을 찾았다는 점이 좋았다. 앞으로 내가 새로 시작한 분야에서 한번, 아니 몇 번이고 이런 순간들이 찾아올 텐데. 그때 잊지 말고 이 구절을 기억하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나의 수준에 맞는 것부터 차근차근 실력을 쌓아가자고. 



p103.

평범한 전공에, 평범한 경력에, 취미와 특기마저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내가, 도대체 무슨 수로 눈에 띄는 플러스알파를 만들어낸단 말인가

결국 자신이 좋아하고 관심 있던 일상툰이라는 씨앗을 실천에 옮겨 키워보기로 한다. 내가 프리랜서가 된다면 무엇이 나의 플러스알파가 될까? 



p123.

자투리 일만으로 생계를 유지할 정도의 수입을 올리지 못했던 나는 5년간 조금씩 모아 온 저축이 떨어지는 순간 이 도전도 끝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자신을 타일렀다. 어차피 그만둔 회사, 어차피 단절된 경력이라면 그냥 견딜 수 있을 때까지 한번 견뎌보자고. 지금 포기하나 1년 뒤에 포기하나 별로 다를 것도 없지 않으냐고. 만약 그 기간이 지날 때까지도 눈에 띄는 결과를 얻지 못한다면 취업 준비를 하든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든 그때 가서 다시 생각하자고.

그렇게 버티는 나날이 계속되었다.

현실적으로 버틸 수 있다면 나 자신과 내가 택한 길을 좀 더 믿고 버틸 것. 



p166.

하지만 이 모든 전전긍긍과 안절부절못함을 감안하고서라도, 첫 책을 번역하던 기간은 기본적으로 꿈을 꾸는 듯한 행복한 시간이었다. 이따금씩 내가 회사 밖에서 밥벌이를 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고, 지금 이 자유를 얻기 위해 그 오랜 기간 불안을 달래며 꿋꿋이 걸어왔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벅찼다. 유혹에 흔들리고 서러움에 무너진 적도 분명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포기하지 않고 지금까지 버텨낸 나 자신이 너무나 대견했다. 



p198.

회사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영업부서와 수익창출부서, 지원부서, 교육부서, 하다못해 부서는 아니더라도 그 업무를 담당하는 인력이라도 꼭 필요하듯이, 네 가지 업무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진다면 그 프리랜서의 밥벌이에는 당장 심각한 애로 사항이 생긴다. 정말이지, 모든 프리랜서가 1인 기업이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p206.

무제한의 자유라는 동전의 뒷면에는 그만큼 큰 불안이 존재하고, 간섭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은 보호해 줄 사람도 없다는 뜻이다. 



p272.

하지만 웹툰에 발을 담근 우연한 경험은 닫혀 있던 내 시야를 확 넓혀 주며 프리랜서가 반드시 한 가지 직업만 가져야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려주었다. 그날 이후로 나는 짬이 날 때마다 흥미로워 보이는 분야에 다양하게 뛰어들었고, 그 결과 작가와 일러스트레이터, 1인 출판사 대표 등의 다양한 타이틀을 갖게 되었다. 지금 내가 프리랜서로서 성수기를 보내고 있는 건 기본적으로 예전보다 경력이 쌓이면서 지명도가 올라간 덕이지만, 번역 일감이 공백을 잡지 기고로 메우거나 일러스트 일감의 틈을 1인 출판으로 메우는 등 활동 반경 자체를 넓혀 둔 덕도 크다. 


다양한 분야에 도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재주가 아니라 취미와 호기심이다. 나 또한 퇴사를 결정할 당시에는 번역도, 글쓰기도, 그림도 어느 것 하나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매일 공부하며 조금씩 연습하다 보니 단순한 취미가 일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발전했을 뿐이다. 전공자도, 경력자도 아닌 내가 이런 기술을 익힐 수 있었던 원동력은 분명 타고난 재주가 아니라 그 분야에 대한 흥미와 애정이었다. 실제로 프리랜서의 세상에는 글을 쓰는 개발자나 사진을 찍는 요리사처럼 취미를 토대로 본래 직업과 전혀 다른 일을 병행하고, 그 부분을 자신의 차별화 포인트로 활용하는 분들이 아주 많다. 



p285.

내가 프리랜서가 된 과정은 그야말로 기약 없는 좌절과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길고 긴 버팀의 끝에 나는 다행히도 회사 밖에서 먹고사는 일상을 손에 넣었고, 직장인 시절 매일같이 느끼던 숨 막히는 답답함 대신 그럭저럭 소소한 자유와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지금의 삶은 회사원에 비해 훨씬 덜 안정적이고 보장되는 혜택도 눈에 띄게 적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보장되는 것도 없고 딱히 안정적이지도 못한 삶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이 만족스럽고 행복하게 느껴진다는 사실이야말로 내가 정말로 회사 체질이 아니었다는 일종의 근거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읽다가 만 책들에 대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