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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나씨 Sep 26. 2020

읽다가 만 책들에 대해

1.

아무튼, 문구


아무래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작가가 자기 자신을 '문구인'이라고 스스로 정의 내린 것. 나는 나를 '무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생각해보았다. 아직 마음에 와 닿는 표현은 찾지 못했지만 아마도 게으른 탐험가 정도일까. 끊임없이 이 문 저 문을 열어보고 문을 열어둔 채 그 안에 나를 넣어두었다가 다시 나와서 그 문을 닫고 새로운 문을 찾아 기웃거리다 또다시 열어보고 열어놓고 닫기를 반복하는 그런 사람. 하지만 천성이 게을러서 기껏해야 1~2군데를 깊게 탐험하는 그런 탐험가.


쓸데없는 물건을 늘리지 않으려고 사고 싶은 건 일단 장바구니에 묵혀두었다가 하나씩 지우고 지워버리고 겨우 신중하게 하나를 사는 요즘. 쓸데없는 것들의 힘을 믿는다는 작가의 말에 문득 문방구에 달려가고 싶어 졌고 어느새 한 손 가득 이런저런 잡화를 데려왔다.


이번에 산 문구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미도리 MD노트와 ブルーエ의 작은 메모장이다. 둘 다 내용이 비어있는 백지상태로 속에 글을 써넣으면 나만의 책이 완성된다. 미도리 노트는 2권을 샀다. 1권은 일기를 쓰고 싶어서, 1권은 쓰고 싶어 지는 이야기가 시작될 때 채워나가려고 미리 사 두었다.


ブルーエ의 작은 메모장은 책상에 올려 두고 매일 1 문장씩 인상 깊은 말을 적어둔다. 하나씩 채워서 심심할 때마다 펼쳐보거나 내 공간에 누군가가 놀러 오면 포춘쿠키처럼 랜덤으로 페이지를 펼쳐 거기에 적힌 말들을 읽어줄 생각이다.





2.

나는 매주 시체를 보러 간다


그알과 유퀴즈에서 본 유성호 교수님의 책. 지난번 유퀴즈에서 사건 현장을 청소하는 특수 청소부 분을 본 적이 있는데 죽은 사람에게는 형용할 수 없이 지독한 냄새가 난다고 했다. 어떤 죽음이든 죽은 사람의 모습은 아름답지 못할 것인데 그것을 매주 마주하는 사람의 세계는 다른 사람과는 분명 다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의 세계가 알고 싶어서, 죽은 사람을 마주하고 마지막 순간을 해명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궁금해서 읽었는데 나의 기대와는 조금 다른 전개로 중간에 흥미를 잃었다.



3.

만약은 없다


죽음을 마주 보는 사람의 세계를 알기엔 이 책이 나에겐 더 와 닿았다. 한 때 죽고자 했던 저자가 응급의학과 의사가 되어 매일 생과 사의 경계에 서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책. 자기 전에 이 책을 읽곤 했는데 깜깜한 방에서 이 책을 읽는 기분은 참으로 이상했다. 여러 개의 죽음과 그에 얽힌 이야기와 인생이 담겨 머릿속에 펼쳐졌다. 왜 읽다가 말았는지 기억은 나지 않으나 제대로 완독 하고 싶은 책.


죽음이든 이별이든 퇴사든 모든 끝에 남는 것은 '감정'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내가 얼마나 대단한 실적을 남겼고 인정받았고 얼마를 벌었고 어디에 갔고 뭘 했었는지 세세한 것들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래서 열심히 사진을 찍고 기록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역시나 증발해버린다. 다만 감정은 분명히 오래도록 살아남는다.


그를 처음 마주한 그 순간 참 이상한 기분이었는데. 그때의 나는 너무 힘들고 어두웠지만 그 순간을 넘겼을 때 참 뿌듯하고 속 시원했는데. 그때 울컥했고 눈물이 많이 났었지. 그때의 나는 참 필사적이었는데. 그래서 결국 정말 많이 좋았었는데.. 하는 감정과 기억과 추억들. 결국 그들을 위해서 무언가에 부딪히고 괴롭고 이겨내고 때론 포기하고. 그저 마지막엔 좋은 감정만을 오래도록 남기고 싶어서 열심히 살아가는 게 아닐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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