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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나씨 Aug 27. 2020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울어요, 우리


박준 작가는 사인할 때 가끔 '울어요, 우리'라고 적어준다고 한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울어요. 우리’가 그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을 테다. 나는 그의 산문집이 마음에 들었다. 읽히지 않거나 생각나지 않으면 하루만 읽고 말아 버리는 내가 며칠이고 그의 책을 다시 펼쳐 읽었다는 것이 그 증거다. 


무엇이 마음에 들었을까? 

그에게서 나와 비슷한 냄새를 맡으면서도 나와는 다른 삶이 느껴졌다. 늘 가던 길, 늘 먹던 것에 익숙하던 사람이 여행을 다니면서 새로운 취향과 세상에 눈을 뜬 것. 무언가에 대한 두려움이나 압박감에서 벗어나고 싶을 때 한없이 걸으며 보이는 것, 들리는 것, 풍기는 것에 집중하며 마음을 정돈하는 모습. 


하지만 많은 페이지에 등장하는 그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와는 사뭇 달랐다. 나의 아버지는 대학 중엔 서울대가 최고고, 직업 중엔 ‘사’ 자 들어가는 데가 최고여! 하며 100점짜리 시험지를 들고 가면 환한 웃음을 띄었다. 아버지의 사업이 잘 되던, 망하던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뒷바라지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짐을 덜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열심히 공부해서 장학금을 타는 것이었고, 하루라도 빨리 스스로 돈을 버는 것이었다. 평생을 사업만 해왔고 흥망성쇠를 모두 겪어보았기에 아버지는 늘 내게 회사에 들어가라 하셨다. 그게 제일 편한 거라고.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달랐다. 수능 전날, 수능을 보지 말고 취직하고 결혼하고 아이를 기르는 삶을 살지 말라고 말하는 그의 아버지는 어떤 삶을 살아왔을까. 그의 아버지가 느낀 삶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을지, 그 무게를 아들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아 꺼냈을 그 말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나는 감히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전화를 하면 구구절절 눈물을 흘리면서까지 과거의 이야기를 해 주는 아버지의 밑에서 자라는 삶은 어떤 삶이었을까. 궁금하게 하는 구절이 많았다. 


그의 글은 모두 일상 속 이야기지만 흔하지 않은 표현으로 풀어가는 게 좋았다. 마음에 남은 그의 말들을 남겨본다.


가장 좋았던 에피소드

1. 취향의 탄생

환경이 바뀌는 데 예민하고 늘 가던 길만 가고 먹던 것만 먹던 작가가 훌쩍훌쩍 떠나던 여행을 시작으로 취향이 생기기 시작한 이야기. 처음엔 미각. 하동의 재첩국, 구례의 은어, 신안의 민어와 흑산도의 홍어, 포항의 과메기와 서천의 박대. 영월의 곤드레와 수안보의 꿩고기, 서귀포의 방어. 미각 다음엔 시각. 봄의 통영의 동백섬, 여름의 고성 화진포, 가을의 제주 비자림과 용머리 해안, 겨울의 철원 고석정. 다음은 사람. 친구와 가기 좋은 곳, 연인과 가기 좋은 곳, 가족과 가기 좋은 곳. 


2. 유서

나의 유서도 동기들의 유서도 ‘고맙다, 미안하다, 사랑한다’의 반복이었다. 


3. 해

새로운 시대란 오래된 달력을 넘길 때 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당신을 혹은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서로의 눈동자에서 태어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상 깊었던 구절

1. 일과 가난 중에서

나는 왜 거절도 못하고 이렇게 일을 받아두었을까 고민하다, 그것은 아마 내가 기질적으로 가난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나니 한없이 우울해졌다. 가난 자체보다 가난에서 멀어지려는 욕망이 삶을 언제나 낯설게 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을까.

 

2. 고등학교 3학년, 수학능력시험을 하루 앞둔 날 아버지는 평소 잘 들어오지 않는 내 방에 들어왔다. 그러고는 나에게 시험을 치르지 말라고 했다. 내일 시험을 보면 대학에 갈 것이고 대학을 졸업하면 취직을 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을 공산이 큰데 얼핏 생각하면 그렇게 사는 것이 정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너무 불행하고 고된 일이라고 했다. 더욱이 가족이 생기면 그 불행이 개인을 넘어 사랑하는 사람에게까지 번져나가므로 여기에서 그 불행의 끈을 자르라고 했다. 


3. 사상까지는 못 되지만 사유하며 살아가고 혁명은 어렵지만 무엇인가를 실천하는 것만으로도 삶은 충분할 것이다.


4. 독주를 각자 한 병씩 비워갈 무렵, 한참을 침묵하고 있던 선생님이 말을 시작했다. 

‘사는 게 낯설지? 또 힘들지? 다행스러운 것이 있다면 나이가 든다는 사실이야. 나이가 든다고 해서 삶이 나를 가만두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스스로를 못살게 굴거나 심하게 다그치는 일은 잘하지 않게 돼.’ 


5. 그렇지만 이 마음의 폐허에서 나는 다시 새로운 믿음들을 쌓아 올릴 것이다. 믿음은 밝고 분명한 것에서가 아니라 어둡고 흐릿한 것에서 탄생하는 거라 믿기 때문이다. 밤이 가고 다시 아침이 온다. 마음속에 새로운 믿음의 자리를 만들어내기에 이만큼 좋은 때도 없다. 


6. 다만 어떤 글은 누군가에게 읽히지 않아도 쓰이는 일만으로 저마다의 능력과 힘을 가지는 것이라 믿는다. 마치 마음속 소원처럼, 혹은 이를 악물고 하는 다짐처럼





그 외 본문 중에서


1. 어떤 말은 죽지 않는다.

말은 사람의 입에서 태어났다가 사람의 귀에서 죽는다. 하지만 어떤 말들은 죽지 않고 사람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살아남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저마다의 마음에 꽤나 많은 말을 쌓아두고 지낸다. 어떤 말은 두렵고 어떤 말은 반갑고 어떤 말은 여전히 아플 것이며 또 어떤 말은 설렘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검은 글자가 빼곡하게 적힌 유서처럼 그 수많은 유언들을 가득 담고 있을 당신의 마음을 생각하는 밤이다.


2. 어떻게 살아야 할지, 어떠한 양식의 삶이 옳은 것인지 나는 여전히 알지 못한다. 다만 앞으로 살아가면서 편지를 많이 받고 싶다. 편지는 분노나 미움보다는 애정과 배려에 더 가까운 것이기 때문이다. 편지를 받는 일은 사랑받는 일이고 편지를 쓰는 일은 사랑하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3. 아무리 좋은 음식도 많이 먹으면 탈이 나는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며 맺는 관계에도 어떤 정량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물론 이 정량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4. 내가 좋아지는 시간 중에서, 스스로를 마음에 들이지 않은 채 삶의 많은 시간을 보낸다. 


5. 하지만 불행하게도 감정이라는 불안한 층위에 겹겹이 쌓아 올려진 이 세계는 그리 안정적이지 않고 결코 영원하지도 않다. 그리고 우리는 곧 관계의 죽음을 맞는다.


6. 나와 당신이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 우리의 사랑을 어렵게 만든다. 그 수많은 다름을 견주 어보는 동시에 그 다름을 감내해내야 한다는 점이 우리의 사랑을 아프게 만든다. 누군가를 사랑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우리는 평소 자신에게조차 내색하지 않던 스스로의 속마음과 마주치게 되는데, 그것은 대개 오랜 상처나 열등감 같은 것이라는 사실이 우리의 사랑을 외롭게 한다.

 하지만 나와 당신이 다르지 않다면 사랑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당신의 외모와 성격과 목소리와 자라온 환경과 어떤 것에 대해 품고 있는 마음이 나와 다르다는 점에서 사랑이 탄생한다. 자신과 비슷한 수준, 환경, 생각만을 가진 사람만을 찾아 사랑이나 결혼을 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을 나는 긍정하지 않는다. 


7. 걷고 있는 시간만큼은 미래에 대한 막막함이나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 내가 스스로 세운 목표에 대한 중압감 같은 감정들을 조금 내려놓을 수 있어 좋았다. 대신 발이 아프다. 목이 마르다. 버드나무는 수피의 색이 유독 진하다. 같은 직관적인 생각들을 자주 했고, 오래전 내가 누군가에게 했던 허언들을 되새기거나 보고 싶은 사람을 두엇쯤 떠올려보기도 했다.






영화든, 드라마든, 책이든 무언가 인상에 남는다면 제작자를 자세히 살펴보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인터뷰를 자주 읽는 편인데 박준 작가님의 인터뷰도 흥미롭게 읽었다.


박준의 시는 어떤 목적성이 있을까요?

거칠게 표현하자면, 삶에 대한 이야기를 진솔하게 옮기는 거죠. 시를 쓰게 하는 동력이라고 볼 수 있는데요. 아무래도 첫 번째 목적은 시를 시답게, 혹은 문학답게, 예술답게 쓰는 일이에요. 반면 시는 시집이라는 상품을 통해 유통되잖아요. 시가 어떻게 읽힐 것을 가정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어떻게 하면 이 시를 많은 독자와 공유할 수 있을까가 두 번째 중요한 목적이에요. 시를 시답게 만드는 첫 번째 목적과 함께 노력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경제가 가난을 구한다면, 문학은 삶의 마음 정도는 도울 수 있지 않나 생각해요.

시인이라서 얻는 장점이 하나 있어요. ‘어쨌든 간에 좋은 삶을 살아야 한다’ 이 생각을 한다는 거예요. 리얼리스트든 모더니스트든, 작가라면 누구나 자신의 삶이 창작물에 영향을 줘요. 배제하는 방식도 영향을 주는 거니까요. 마음이 황폐하면 글을 못 써요. 비판이 아닌 비난을 한 뒤에 글을 쓰면 좋은 글이 나오지 않아요. 그래서 일단 옳은 사람을 살아야 한다, 어떤 방식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좋은 삶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1.저는 하루에 20분 정도 시인이 됩니다. 예민하게 관찰하고 그 날 본것들을 예민하게 복기하죠. 내가 본 것들에 대해 왜일까? 무슨 일일까? 관심을 갖고 지켜보거나 상상합니다. 친구와 나눈 쓸데없는 말들, 그 날 들은 말들도 자세히 기록하려고 해요.


2.작가는 쓰는 사람이기 이전에 읽는 사람. 사람을 작가로 만드는 것은 독서다. 시인의 준비과정이라 함은 일기를 쓴것. 일기로 남긴 삶의 기록은 훗날 복기하며 스스로를 위로하거나 마음의 준비를 하는데 도움을 준다. 창작의 즐거움도 얻을 수 있다.


3.작가에게 있어 판매나 인정보다 ‘이 문장 좋다’라는 스스로의 쾌감이 더 크다.  6년동안 1천편 가까이 쓰면서 100차례 연거푸 등단의 고배를 마셨다. 괴로웠지만 시가 좋아서 계속 썼다.좋은 시를 한 편 쓰고 나면 엄청 행복하거든요.


4.저는 무엇이 변했냐보다 ‘무엇이 변하지 않았느냐’를 쓸 거에요. 오래됐지만 지금도 남아있는 풍경을 그리고 싶어요.


5.삶에 다가오는 것들을 외면하고 싶더라도 너무 피하지 않으려고요. 계획도 너무 빡빡하게 세워두지 말고 힘을 좀 빼면서 털레털레 걸으면서 살고 싶어요.


용기가 없어 시 쓴다는 인터뷰를 봤는데요. 이런 세상에 시를 쓴다는 것, 시인에게는 어떤 의미인가요?

처음 시를 쓸 땐 단순히 선배 시인들이 멋있다는 느낌 같은 것이었는데요. 현실은 시를 써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이 거의 없더라고요. 시를 잘 써서 취직이 되는 것도 아니고요. 실질적으로 피부에 와 닿는 미래에 대한 보장이 아무것도 없죠. 이유는 모르겠지만 저는 일종의 패배의식을 늘 갖고 살았거든요. 공부도 별로 못하고, 잘하는 게 별로 없었어요. 그래서인지 몰라도 시가 무용(無用)한 일이기 때문에 확 끌리는 게 있었어요.


부모님도 한 번도 돈을 많이 벌어라, 훌륭한 사람이 돼라, 말씀하신 적이 없어서 정말 그런 것들을 꿈꾸지 않았거든요. 그 시기에 치기 비슷하게 빠지는 일탈, 비뚤어짐에 가장 좋은 게 시였어요. 가장 비(非)건설적인 걸 하자는 치기가 가득했거든요. 그때 선택한 것이 시예요. 세상은 자꾸 생활에 도움이 되는 걸로만 돌아가니까요. 깊은 철학은 없어도 느꼈던 것 같아요. 자꾸 돈이 되는 것만 하고, 그럴싸한 것만 하려고 하니까 나는 반대로 하자고요. 그렇게 치기로 시작한 거죠. 치기가 오기가 된 거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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