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이 곳에서 졸업하게 될 줄 알았는데 재편입이라니...
딸의 새벽 비행을 위해, 해가 뜨지도 않은 찬 공기 가득 머금은 시간대부터 일어나서 잣죽을 끓여준 엄마, 그리고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검보랏빛 하늘과 새벽 새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공항까지 먼길 운전해준 아빠. 두 사람의 사랑과 응원을 듬뿍 받으며 내 인생의 새로운 챕터는 시작이 되었다.
내가 미국에서 다니게 된 대학이 플로리다에 위치해있으니 F학교라고 하겠다. 내가 이 학교까지 오게 된 모든 과정이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기적의 연속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기대와 설렘을 더욱 마음에 품고 미국 땅에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삶은 낭만 따위 없는 현실이었다. 유학 준비를 하며 정말 많이 들었던 얘기가 '유학하면 개고생이다'였는데, '개고생이어 봤자 뭐 얼마나 개고생이겠어?' 하는 근거 없는 용감함으로 미국 땅에 첫 발을 내딛는 그 순간부터 정말 밑도 끝도 없는 개고생의 시작이었음을...
F학교에 도착했을 때의 기분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았다. 아니 사실, 제법 마음에 드는 첫인상을 지닌 학교였다. 한국과는 다르게 숨통 트이게 낮은 하늘, 맑고 깨끗한 공기, 심지어 내가 도착한 그날 그 시간에는 노을 지는 하늘에 선명하게 보이는 무지개까지 나를 반겨주는 듯 마중 나와 있었다. 두렵기도, 설레기도 했다. 나 잘할 수 있겠지? 잘할 거야!라고 마음속으로 힘차게 한번 외치고 접수를 하러 입학처에 찾아갔다. 접수과정을 마치고, 그 자리에서 학생증도 발급받고, 기숙사 방도 배치를 받아서 짐을 들고 기숙사로 바로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 날, 건너 건너 소개를 받은 착한 한인 동생을 만나서 학교 곳곳을 돌아다니며 캠퍼스 구경을 하고, 수강신청 및 면담을 위해 교수님을 만났다. 미국에 도착하기 전에 학교 측과 연락을 주고받을 때 들었던 말이, 내가 졸업한 대학의 전공과 이 F대학 간호 전공이랑 겹치는 과목 외에도 겹치는 교양 과목들이 많아서 학점 인정이 많이 될 거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그 말을 믿고 2년 안에는 간호 자격증을 딸 수 있겠구나 예상을 했었다. 아니, 확신을 하고 왔었다.
근데 막상 교수님을 만나서 수강신청을 하니, 갑자기 딴소리를 한다. 우리 학교 측에서 그렇게 말했을 리가 없다고 발뺌한다. 학점 인정 하나도 안될 거라고, 너는 거기다 국제 학생이니 5년을 다녀야 간호학과를 졸업할 수 있을 거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읊어댄다. 새내기도 4년을 다니는 학교를, 같은 분야 전공으로 4년제 대학 졸업장이 있는 내가 국제학생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5년을 다녀야 한다는 걸 내가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된다고 생각하냐고 그 자리에서 교수님께 따졌다. 결국 간호학과장까지 만나서 이야기를 주고받았지만, 결론은 5년이란다. 미리 알았으면 내가 이 학교에 안 왔을 텐데 말이야..
그때부터 내 모든 미국에서의 계획과 생활은 꼬이기 시작했다. 결국 나는 첫 학기 때 수강하려고 했던 간호 기초 6과목 중에 2과목만 수강신청 허락이 떨어졌고 (F학교는 규칙이 엄격하다 못해, 말이 안돼서 수강신청 또한 마음대로 하지 못한다), 나머지 과목들은... 고린도 전후서, 기초영어... 나에게는 필요도 없는 과목들이었다. 이 곳에 오기까지 거쳤던 모든 고생과 시간, 그리고 앞으로 살아내야 할 나의 한 학기의 시간과 돈이 벌써부터 너무 아까워서 그날 기숙사로 돌아가서 서럽게 울어버렸다.
첫 며칠은 하루 종일 눈물밖에 안 났다. 내가 어떻게 온 미국인데,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 곳에 왔는데, 미국은 나의 꿈과 진심을 짓밟아 버리는 듯했다. 몇 날 며칠은 억울한 마음에 울기만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과정에는 이유가 있겠지’ 생각하며 나 자신을 다독이려는 노력도 동시에 했던 거 같다. 그래서인지 더 서러웠던 초반의 미국살이가 되었다. 마음껏 억울해하기보다는 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마인드 컨트롤을 하며 참고 버텼기 때문에.
그래도 정말 다행이었던 것이, 첫 주 차부터 정말 좋은 동생들과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고, 감사한 한인교회 인연들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들 덕에 낯선 미국에서의 첫 생활을 무사히 시작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혹여나 그때 그 친구들과 동생들이 이 글을 보고 있다면, 그때는 내가 마음이 너무 힘들다는 핑계로 전하지 못했던 고맙다는 말을 진심으로 전하고 싶다. 정말, 정말 고맙고 또 고마웠다.
나는 F학교에서 첫 학기를 다니며, 내가 원하는 간호학 수업을 수강하기 위해 다른 학교로 재편입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F학교에서는 내가 적어도 1년 반을 다니고서야 간호학과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어이없는 말만 자꾸 주장해서.)
하지만 학교 수업을 풀타임으로 들으면서 재편입 준비하는 것은 절대 쉽지가 않았다. 얼마나 답답하고 막막했는지, 그리고 역시나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매일을 살얼음 걷듯이 불안한 마음, 그리고 내 일상을 잡아먹는듯한 두려움이란 감정을 둘러맨 채로 한 학기를 지냈다. 그래서 사실 F학교의 일상을 즐기거나 누리지 못했다는 부분이 지금 생각하면 조금은 아쉽다. 남들은 꿈꾸는 플로리다살이인데, 나는 누리지 못할 망정 매일같이 두려움에 눈물만 흘렸던 시간이 조금 안타깝다.
아무튼. 나는 그 한 학기 내내 재편입 방법을 알아봤다. 하루에 몇십 개의 학교에 전화를 돌리고, 이메일을 보내고, 정보를 알아보면서 학교 생활을 병행했다. 미국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도움받을 사람 하나 없이 맨땅에 헤딩을 하면서 정보를 얻고, 계획을 세워야만 해서 잔뜩 억울하기도 했지만, 어쩌면 나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한 단계씩 알아가는 시간이 되기도 했다.
재편입하는 과정에 있어서 내가 고려하고 있었던 필수 조건이 몇 가지 있었다. 기숙사가 있는 학교, 저렴한 학비, 그리고 내가 필요한 과목을 내가 필요한 학기에 수강할 수 있는 학교. 딱 세 가지의 조건이었지만 이 세 가지의 조합을 다 지닌 학교가 어쩜 그렇게 찾기가 어렵던지... 그러다가 결국에 한 학교를 찾게 되었다. 엄청 시골에 있는 학교이긴 하지만, 세 가지의 조건을 다 갖춘 학교여서 무작정 연락을 하고 지원 절차를 진행했다. 그렇게 한창 준비를 하던 타이밍은 마침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그래도 재편입할 학교를 찾았다는 사실이 마음이 가벼워져서인지 중간고사는 부담되지가 않았다. 아무래도 재편입 때문에 받던 스트레스가 중간고사 스트레스보다 훨씬 심했던 거 같다.
재편입할 대학에 지원을 하고 대기하면서 한창 중간고사를 치르던 기간에, 갑자기 그 학교 측에서 전화가 왔다. 아직도 생생하다. 전화 와서 대뜸 전하는 말이, "너에게는 진짜 미안한 소식인데, 우리 학교 간호학과가 이번 학기에 임시 폐지가 되기로 결정 났어. 너 지원한 거 다 취소됐어. 2021년에 다시 개정해서 간호학과 오픈되니까 그때 다시 만나자!"였다. 그 당시 나는 매일을 밭 줄타기하듯 불안한 마음으로 지내다가 드디어 한 줄기의 빛 같았던 희망을 발견했었는데, 그 빛마저 잃게 된 기분이었다. 어이가 없는 건 둘째 치고, 얼마나 속상했는지, 얼마나 괴롭던지, 얼마나 무서웠는지... 그냥 무너져 버렸다. 코 앞에 있는 중간고사는 눈 앞에 보이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가라앉지 않는 마음을 견디지 못해, 혼자 운동장을 돌면서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그 이후 나는 적어도 일주일은 멘탈이 나간 상태로 좀비처럼 학교를 다녔다. 물론 중간고사도 다 말아먹었고. 그래서 내 상태는 더더욱 악화되고, 더 우울해지고, 더 힘들어졌었다. 진짜 다 그만두고 싶었고,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집에 돌아가면 뭐해... 하는 마음에 더 슬퍼지고, 참 어려운 감정들이 나를 휩쌓아버린 시간이었다. '계시기는 하죠?' 하늘을 향해 얼마나 많이 물었는지 모르겠다.
실컷 눈물로 마음을 비워버리고 다시 일어섰다. 마지막이다 생각하고 이 악물고 ‘진짜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그리고 마찬가지로 남은 반절의 학기 동안 다시 폭풍 검색과 연락 그리고 학업을 병행했다. (이 시기에 메일로, 전화로 연락을 한 학교가 적어도 100군데는 훌쩍 넘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폭풍 검색 끝에 세 가지의 조건이 맞아떨어지는 학교를 다행히 한 군데 더 찾게 되었다. 이 학교를 T학교라고 칭하겠다. 그리고 다시 처음부터 지원을 진행했다. 지원을 하고 결과를 기다리는 중에 학기는 끝나버렸고, 방학 동안 지낼 곳 없이 붕 떠버린 나는 학교에서 제공하는 기숙사에서 지내며 운 좋게 F학교의 출판사에서 일을 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 SSN을 얻게 되었다!). 일하는 시간도 결과를 기다리느라 역시 불안함의 연속이었지만, 그 시기에도 참 고마운 동생들과 함께 매일을 공유했기에 무사히 버텼던 거 같다. 다시 한번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