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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오미 Jun 23. 2021

코로나? 그럼 나는 어떻게 되는 거야?!

코로나 때문에? 덕분에? 나는 세 번째 편입을 하게 되었다... 하하ㅠㅠ


T학교에서  번에 걸친 여름학기를 마치고, 2019 가을학기는 몸과 마음의 재정비를 위해 쉬기로 결정하게 되었다. 미국에서부터 본가인 코스타리카로 돌아가서 시간을 보냈으며, 그토록 원했던 간호대 커리큘럼으로 2020 봄학기 입학 준비를 위해 나의 모든 에너지를 쏟았다.



코스타리카로 떠나기 전에, 내가 원하는 커리큘럼이 있는 간호대학들을 찾아서 지원할 때, 학교의 네임벨류나 위치는 전혀 따지지 않았고,  상황에 맞는 '커리큘럼, 재정, 유학생 신분, 기숙사' 이렇게  최우선 순위에만 초점을 맞추어 지원을 했다. 간호학과 입학시험 성적, 이전 학교 성적, 토플 점수, 그리고 자소서를 들고 학교마다 직접 찾아가서 int. counselor nursing department 오가며 두 번이고 세 번이고 확인을 했다.

"Will I be able to see you next year?"


그리고 지원했던 6개의 학교 중, 마음속 1순위였던 한 군데 빼고는 돌아온 대답이 전부,  

"Of course. See you next year in school". 이였다.



어쨌거나 나는 한 학기 집에서 쉬고 그다음 학기에 미국으로 다시 돌아올 거니까 미국에 나의 모든 짐을 지인댁에 맡기고 코스타리카로 왔다. 코스타리카로 돌아와서는 마음이 온전히 편치만은 않았지만, 다음 학기에 미국에서 간호 공부를 하고 있을 나 자신을 상상하면 기분이 좋기만 했다. 그동안 미국 생활이 죽을 듯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또 설레는 나를 보면 나는 미국에서 공부하는 게 맞는구나 확신을 얻었던 시간이기도 했다.




어느새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2019년은 저물고, 새로운 해가 떠오르는 시기에 슬슬 지원했던 학교에서 합격여부의 소식이 들리기 시작했다. 2019년은 너무 힘들어서 매일을 눈물로 지새웠던 한해였으니, 2020은 조금은 더 웃을 일이 있기를 바라고 있는 타이밍이었다. 지원했던 대학들이 하나, 둘씩.. 발표가 났다. 지원했던 6군데 중에, 그렇게 당당하게 내년에 보자고 얼굴 보며 인사해줬던 5개의 학교가 나를 죄다 거절했다. 그리고 내가 가장 마음속으로 원했던 단 하나의 학교의 발표만 남게 되었다.



 하나의 학교 발표가 남아 있었지만,  학교는 네임벨류도 인지도도 정말 높은 학교라 양심상 기대를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합격을 한다한들, 나는 (부모님은) 1년에 1억이 넘는 학비+생활비를 감당할  있는 방법은 도무지 없었다. 어쩌면 이곳의 합격을 바라는  자신이  이기적이고도 사치스러울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은 곳이 이곳밖에 없었어, 동시에 합격을 너무 간절히 바라고 있는 모순적인  자신을 발견한 시간이 되기도 했다.



그곳에 입학할 나의 모습, 공부할 나의 모습, 울고 웃을 모습, 그리고 졸업할 모습까지 수도 없이 상상을 했다. 여전히 설레는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하늘에 계신 그분이  대학을 만약에나 나에게 허락을 해주신다면, 그곳을 준비하는 모든 과정과 모든 순간까지  계획하셨을 것이라는 믿음을  굳건하게 가졌다. 솔직히 말하면,  굳건한 믿음과 나의 욕심의 경계에서 하루에 수십 번도 오갔던 거 같기도 하다. 그리고 하필이면 일상과는 달리, 정말 열심히 부모님을 도와 땀 뻘뻘 흘리며 사역을 하고 있는 타이밍에 그곳에서 이메일이 도착했다.



도저히 열기가 두려웠던 이메일이었다. 그 이메일을 열기 전에 수많은 생각들과 기도가 나를 휘감았다.


* 합격한다면... 학비는 어떡하지. 비행기표 비용은 어떡하지. 가족에게 너무 큰 부담을 주는 거 같아 너무 미안한데. 나도 너무 부담스러운데. 돈은 돈대로 들이고 가서 내가 잘 이뤄내지 못하면 어떡하지? 갔는데 실패하게 되면 어떡하지? 내가 과연 합격했다고 가도 되는 걸까. 내 주제에 무슨 이런 번쩍번쩍 학교야. 역시 가지 말아야 하는 건가...

하나님 나 합격하면 이 모든 걱정 빠짐없이 다 해결해 주실 거죠...?




* 불합격이라면... 나는 재수를 해야 하는 건가. 반수를 해야 하는 건가. 시간이 너무 아까운데. 이미 늦은 나이에 시작한 간호인데 시간 낭비를 더 해도 되는 걸까. 대학 말고 앗싸리 대학원을 준비할까? GRE는 정말 자신 없는데. 집에서 공부할 자신은 더 없는데. 한국 가서 준비해야 되는 건가? 코스타리카 대학이라도 지원해야 되는 건가? 멕시코를 지원할까? 난 영어로 공부하고 싶은데...

하나님 나 불합격이면 이 모든 걱정 없게 다른 길을 환하게 보여주실 거죠...?




사역 돕다 말고 무슨 봉변이었는지..

엄마 아빠가 빨리 와서 도와달라고 나를 부르는 소리는 이미 들리지 않았고, 모든 소리와 환경에 잔뜩 예민하고 긴장한 채로 몇십 분을 고민하다가 결국 시끌벅적하게 사람들 오가는 중심에서 혼자 난리 치는 심장을 부여잡고 쭈그려 앉아서 이메일을 열었다.


결과는... 보고도 믿기 싫었지만 '불합격'이었다.


예상을 전혀 못한 건 아니지만, 막상 이 사실이 나의 현실이 되고, 내가 지금까지 했던 노력은 또다시 무용지물이 되었으며, 또 새로운 길을 개척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니, 분노와 원망이 발끝에서부터 치솟았다. 이메일을 껐다 켰다를 수없이 반복을 했고, 받아들여지지가 않는 마음에 하염없이 눈물만 흘렀다. 사람 많은 그 공간에서 혼자 숨어 울 공간을 찾아 들어가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집중했다. 그때의 내 모습을 지금에서야 다시 생각해보면, 분명 나는 기대가 컸기 때문에 그만큼 실망도 컸지 않았나 싶다. 그리고 동시에 새로운 길을 처음부터 만들어가야 한다는 두려움 또한 나를 가득 잡아 삼켜 먹었다. 너무 두렵고 막막했다.



나는 부모님께 도저히 불합격이라고, 나를 받아주는 학교가 단 한 곳도 없다고 말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안 그래도 늦은 나이에 간호라는 길을 새로 걷겠다고 나서서 부모님의 지원을 받고 있는데, 이렇게 돼버리니 앞으로 어떤 길을 가야 하는지, 간호를 계속해야 하는지, 차라리 다시 직장을 찾아 돈을 벌어야 하는지, 온 정신이 혼란스러웠다. 내 생각이 정리되기 전까지 그리고 내 마음이 진정되기 전까지 불합격의 소식을 전하기 너무 힘들 것 같았고, 중간중간 소식을 전하고 싶어 목구멍까지 올라와도, 막상 말하면 눈물부터 왈칵 쏟아질 거 같아서 도저히 입 밖으로 말이 안 나왔다. 지금 다시 그때의 마음을 돌이켜 보자면, 불합격의 소식을 내 입으로 말하는 순간, 내 속에 단 한 톨 남아있는 '간호가 하고 싶다!'라는 마음까지 싹 사라질 거만 같아서 감히 입 벙끗 조차 못했던 거 같기도 하다.



결국에는 부모님의 재촉과 궁금증에 의해 반강제적으로 소식을 전하게 되었고, 역시나 내 마음은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말하게 되었기 때문에, 어떤 감정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펑펑 울면서 소식을 전했다. 그런데 과연 반강제가 아닌 나 스스로 소식을 전했다면 눈물이 덜 났을까? 그것도 사실은 잘 모르겠다. 그리고 가끔은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거 같을 정도로 냉철하고 극 현실적인 부모님은 그날도 역시나 냉정하게 현실적인 조언부터 해주셨다. '다른 해결방안을 빨리 찾아야지, 운다고 해결된다고 뭐가 있냐.' 물론 사실이지만, 그 순간만큼은 조금은 더 감정적인 모습으로 상한 내 마음부터 먼저 다독여주고 위로해주셨으면 좋겠다 싶은 아쉬움이 있다.



여하튼, 나는 그 조언에 등 떠밀려 푸에르토리코, 멕시코, 코스타리카, 싱가포르, 필리핀, 등 모든 나라 학교의 간호학과 지원 절차와 요구사항들을 조사하고 자소서 쓰는 일상이 다시 시작됐다. 뭐 하나라도 걸려라, 뭐라도 되겠지 심정으로 잡히는 대로 지원했다. 대학 지원하는 거... 이제는 정말 토 나올 정도로 지겨웠다. 그러다 문득 '왜 나는 한국 학교 빼고 다 지원하는 걸까?'싶다가 도 '내가 미쳤다고 한국 학교를 다녀..' 싶어서 금세 생각을 집어넣기도 했지만, 이왕 나 몰라라 이중에 하나만 돼라 식으로 전 세계 사방팔방에 다 지원하고 있는 마당에 한국도 뭐 밑져야 본전이지 싶어서 결국 가장 아니꼬운 마음가짐으로 한국에도 3군데를 지원했다.



그리고는 또 기다림의 연속이었고, 발표의 연속이었다. 전 세계가 나 놀려 먹으려고 짜고 친 듯, 태풍에 나뭇잎이 우수수 떨어지듯 지원했던 모든 대학에서 싹- 아주 깔끔하게 떨어졌다.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더 말도 안 되는 건 아직 남았었다. 전 세계 지원했던 모든 학교가 서로 약속한 듯 나를 거절했지만, 반면에 제발 날 떨어트렸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지원했던 한국의 3개 대학은 또 거짓말처럼 모두 붙어버린 것이다... 정말 어이가 없고 좌절스러웠다. 왜냐면 나는 죽어도 한국에서 학교 다니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에서야 드는 생각이지만, 그 당시에 나는 한국에 왜 그렇게까지 돌아가기 싫었을까 의문이기도 하다.



정말 죽어도 가기 싫은 한국 대학만 비엔나소시지 마냥 줄줄이 붙어버리고, 한국만 아니면 된다는 마음으로 넣었던 수많은 외국 학교들은 다 떨어졌다는 게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하나님 지금 나 놀리는 거죠? 놀리는 게 아니면 대체 이게 뭐예요? 결국 이렇게 나 한국으로 돌려보낼 계획이었으면 애초에 나 미국으로 왜 보내서 개고생 시킨 거예요?' 하루에도 수십 번을 물었다. 심지어 더 약 올랐던 사실은, 한국 대학들은 다 장학금이 지원이 된다는 조건으로 합격 소식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나는 미국에서 재정 걱정이 제일이었는데, 미국에서는 그렇게 장학금을 안 주고 공부하는 와중에도 쉴 틈 없이 일해서 돈 벌게 하시더니, 한국 대학의 길을 활짝 열어주면서 재정까지 해결해준다고? 이 길이 내가 가야 하는 길임이 분명하다는 것을 이 모든 상황과 팩트를 통해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도저히 마음으로는 받아들이기 싫었다. 누가 들으면 배부른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그 당시의 나는 정말 치가 떨리게 받아들이기 싫었다.



그래도 결국에는 내 인생은 내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구나, 체념하고 받아들이고 한국으로 언제 가야 되나 고민하는 찰나에, 지금까지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코로나가 터져버렸다. 이 바이러스는 눈 깜짝할 사이에 중국에서부터 한국까지 퍼졌고, 이 상황에서 내가 한국을 가야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부모님이 두 분 다 의료인이시라 이런 의료 상황에 나보다 훨씬 예민했고, 한 학기를 휴학 걸어놔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찰나에 개강은 미뤄져서 우리에게 생각할 시간이 더 주어졌다. 한국을 지금 가네 마네 고민하는 중에 코로나는 동남아와 유럽 지역까지 점점 퍼졌고, 부모님께서는 미국과 중남미도 조만간이지 않을까 하는 판단을 당시 빠르게 내렸던 거 같다. 만약 코스타리카까지 코로나가 퍼지게 된다면 나는 영주권이 없는 무비자 신세라 혹시나 최악의 상황으로 내가 걸렸을 때 시에 부모님과는 다르게 현지에서 치료를 받을 수가 없을 것이고, 치료를 겨우 받는다 한들 치료비가 어마 무시하게 들것이라는 판단을 내려버렸다. 그래서 만약 진짜 코로나에 걸린다고 생각하면, 한국에서 걸려야 나는 의료 해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결론이 내려졌었고, 그렇게 나는 입학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코로나를 피하기 위해 당장 이틀 뒤 출국하는 비행기표를 손에 쥐게 되었다.


결국 나는 3번의 편입과 재편입으로 인해, 4번째의 대학을 다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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