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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탁둥두 Jan 12. 2024

배움의 의미

6월의 어느 날이었다. 유독 하늘이 맑은 날이었다. 잘게 부숴진 구름 몇 점이 하늘에 떠다니고 햇살이 선명했지만 따갑지는 않은, 한 마디로 교실에 있기 보다는 마땅히 나가서 걸어야 할 그런 날씨였다. 초여름의 날씨가 나를 부추겨서였을까 아니라면 수업이 너무 재미가 없어서였을까 눈과 귀를 닫고 공상을 시작했다. 이거 배워서 어디다 써먹지. 한두번 떠오른 질문도 아닌데 깊이 생각에 잠겼다. 내가 수업을 듣는 이유는 무엇일까. 아니, 들어야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성적 때문일까? 반은 맞는 말이다. 정확히는 반만 맞는 말이다. 수업을 잘 들으면 아무래도 시험을 잘 칠거고, 시험을 잘 친다면 아무래도 학점이 좋을거고, 학점이 좋으면 아무래도 좋은 기업에 취직할거다. 또 학점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다 받는거니까. 점수가 높으면 긴 말 할 것 없이 나의 우수함을 증명할 수 있을 거고. 그럼 수업을 듣는 이유는 좋은 기업에 취직하고 다른 사람보다 우수해지기 위해서인가? 취업할 때가 돼서 기업에 갈 지 아니면 프리랜서로 시작할 지, 그것도 아니라면 다른 어떤 고용형태로 근무를 시작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인데 기업이라는 결론을 정해놓고 수업에 임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우수함이라는 측면도 그렇다. 학점이 높으면 다른 사람보다 더 우수한가? 인간의 능력은 점수 하나로 비교할만큼 단순하지 않으며 학점 이외에도 참고할 수 있는 정량지표는 얼마든지 많이 있다.고작 앞서 언급한 이유들만으로 일주일에 몇십시간을 투자하기엔 근거가 너무나도 빈약해보였다.



점수나 구직이 아니라면 어디에 비중을 둬야하나 싶어 생각을 계속하던 중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저는 시골에서 자랐어요. 포도농사를 짓는 집이었는데 참 신기했던 게 나이 드신 어르신들은 치매가 와도 포도농사 일정만큼은 까먹지 않으시더라구요." 그러면서 포도는 여름이 제철이라는 말을 덧붙이시고는 5분간 포도 재배 노하우에 대해 설명하셨다. 수업과 관련없는 이야기를 너무 길게 했다며 교수님께서는 멋쩍어 하셨지만 나는 오히려 눈을 반짝였다. 내가 이게 수업을 듣는 이유구나 싶어서. 포도 농사를 하고 싶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설명의 농도가 다르다는 점을 깨달았을 뿐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익히기 위해서는 직접 겪어봐야 한다. 겪지 않고 깨닫고자 한다면 다른 사람의 경험을 빌리는 수 밖에 없다. 어중이떠중이는 안 된다. 확실히 알고 여러번의 시행착오를 겪어본, 그리하여 자신이 아는 내용을 정제된 지식으로 꺼내놓을 수 있는 사람이여야 한다. 수업이 그렇다. 여러 명의 학자, 연구자들이 모여 골몰하고 토론하여 끝끝내 합의한 내용을 몇 줄의 문장으로 정리한 것이, 그리고 해당 내용을 우리 눈높이에 맞게 풀어서 설명하는 행위가 대학교 강의이고 수업이다. 수업의 의미는 다른 곳이 아닌 수업 그 자체에서 찾아야했다. 눈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집중함으로서 나는 또다른 시간을 살 수 있었다. 이름 모를 이들이 뒤에서 묵묵히 땀흘려온 시간을, 원래대로라면 내가 헤멨어야 할 그 시간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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