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어버이날을 앞두고 친할머니를 뵈러 갔다. 차에서 내리는데 내 앞에 흰 백구가 떡하니 서 있었다. 체격이 소라와 비슷해서 낯선 곳에서 만난 소라 같았다. 백구에겐 산책 줄은커녕 목줄도 없었고 비가 와서 흙탕물이 묻어 있었다. 백구가 나를 지그시 보았다.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이 감각을 정확히 설명할 순 없지만, 개들을 키운 후로 다른 개들과도 교감하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 개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내가 자신에게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는 걸, 어쩌면 자신에게 도움을 줄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 아이에게 나는 “아가 집 없어?” 하고 슬픈 질문을 건넸다. 이 아이를 어떻게 해야 하나 답안지가 보이지 않았다. 다시 말을 걸려고 하는데, 아빠가 차에서 내렸고 아빠를 보자 개는 빠르게 사라졌다.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니 다쳤는지 엉덩이에 피가 조금 묻어 있었다.
할머니 댁에 들어가서 밥을 먹으면서도 그리고 지금까지도 이 아이가 생각난다. 나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걸까. 이런 상황을 또 마주할 수 있기에 실질적인 해결책을 알아보자고 늘 다짐하지만, 나란 인간은 또 미뤄두고만 있다. 어떤 생명체의 삶을 송두리째 바꿀 수도 있는 이 엄청난 일을.
지금의 내가 이 아이에게 그리고 산책길에 마주하는 방치된 개들에게, 무방비 상태로 살아가는 고양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안전하고 건강하기를' 바라는 마음뿐이다.
지난주에 가장 많이 들었던 곡은 〈캐나다 체크인〉의 OST로 이효리 님이 부른 ‘안부를 묻지 않아도’였다. 가사 중 일부를 옮긴다.
너의 안부를 묻진 않아도
같은 저 하늘 아래 저기 어딘가에서
너의 나른한 오후가 흘러가고 있기를
너의 인생이 꼭꼭 채워지고 있기를
아무도 눈물 흘리지 않는 평온하고 평범한 사랑
네가 그렇게 원한 것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느긋하고 안전한 하루
그런 것들이 너의 매일을 가득 채우기를
이 노래를 들을 때면 그 아이가 생각난다. 부디 어딘가에서 나른한 오후를 보내며 느긋하고 안전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기를.
멀티태스킹이 어려운 내게는 요즘 여러 갈래의 일들이 얽혀 있다. 주말에도 계속 약속이 있었고 아이들과의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했다. 매일 엄마에게 아이들 한 명 한 명에 대해 물어보기만 했다.
지난 주말 약속을 나가기까지 딱 1시간이 있었고 차를 끌고 아이들을 보러 달려갔다. 희망과 기쁨은 엄마와 산책하러 나가 없었고 사랑과 소라가 있었다. 나를 보자 놀란 사랑이는 짖는 것을 넘어 ‘히잉히잉’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그러곤 바로 쓰다듬어 달라며 배를 뒤집었다. 사랑이 배를 만져주는데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그렇게 또 아이들에게서 깊은 위로를 받았다.
은연중에 내가 아이들에게 안전한 하루를 만들어줬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자주 감정에 너덜거리고 휘청이는 나를 단단히 붙잡아 다시 걷게 해준 건 늘 아이들이었다. 그렇게 내게 꼭꼭 채워진 평범한 일상을 나눠주고 있었다.
사진 수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조작법을 하나도 모르는 채로 DSLR 카메라로 아이들을 담았다.
환히 웃는 너희의 표정이 나를 녹인다. 너희를 만나고서야 비로소 '평온'이라는 단어를 이해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