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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심과 열심 May 27. 2024

Q.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잠잘 때가 아니었어

A.


얼마 전 사회생활을 하고 처음으로 회사에서 체육대회란 걸 해봤다. 단체줄넘기를 하는데 뛰고 착지하는 순간, 직감했다. ‘또 인대가 손상되었구나’ 하고. 작년 이맘때 느낀 통증과 같았다. 작년엔 오른쪽 발, 이번엔 왼쪽 발이었다. 사람들의 열띤 분위기를 깨기 싫어 얼른 다시 줄을 뛰었다. 그러고 집에 와서 확인해보니 역시나 복숭아뼈가 부어 있었고 다음 날 병원에서 ‘운동 금지’ 처방을 받았다. 그렇게 2주째 줄넘기를 하지 못하고 있다.

책을 마감하는 날에도, 밤늦게까지 술을 마신 다음 날에도, 비가 오는 날에도 거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줄넘기를 해왔다. 그렇게 억척스럽게 열 달 동안 해왔는데 이 루틴이 깨진 거다. 아침 줄넘기 한 시간이 사라지자, 무언가 내 인생에서 중요한 게 빠진 것처럼 헛헛했다. 얼른 다시 이 일상을 이어갈 수 있도록 굽 낮은 신발을 신고 최대한 조심히 걷고 있다.  

   

몇 주 전의 시간이 그립다. 사진을 배우기 시작한 후로는 줄넘기하러 나갈 때 카메라 가방도 챙겼다. 줄넘기를 다하고 나면 단 5분이라도 카메라를 켜서 나무, 꽃, 하늘 등을 찍었다. 그 대상과 나만이 세상에 존재하는 기분, 황홀한 고요를 느꼈다. 그렇게 줄넘기에 이어 사진까지 찍으며 알차게 한 시간을 보내고 집에 돌아올 때면 어느새 발걸음이 씩씩해진 나자신을 발견한다.      


이 시간을 추억하다 보니 덩달아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3주 전쯤엔 내가 오지 않자, 아빠가 줄넘기하는 곳에 와서 먼저 간다고 하셨다. 인사를 하고는 다시 줄넘기에 열중하고 있는데 갑자기 경비 아저씨께서 심각한 표정을 지으며 다가오셨다. 나는 이곳을 치워야 하니 비켜달라는 뜻으로 지레짐작했고 “지금 비켜드려야 하나요?”라고 여쭤보았는데 아저씨께서는 뜻밖의 말을 하셨다. “저분이 뭐라고 하셨어요?” 하고 물으셨다.

그래서 “아, 저희 아빤데요. 인사하셨어요”라고 말씀드렸다. 그러자 “아빠?” 하시며 긴장한 얼굴을 푸시고 웃으셨다. 그 이상의 말을 해주지 않으셨지만 퍼즐이 맞춰졌다. 경비 아저씨께서는 이곳에서 줄넘기를 하지 말라고 주민이 내게 항의한 걸로 오해하셨고, 나를 지켜주시려고 한걸음에 다가오신 거였다. 그제야 늘 나를 지켜봐주셨다는 걸 깨달았다. 그 응원이 따뜻하고 감사했다.      


줄넘기를 하는 시간 동안 동네 사람들의 아침 루틴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아침 일곱 시쯤 예쁘게 단장한 개 두 마리를 데리고 산책하는 여성분, 벤치에 앉아 사색하시는 할머니, 천천히 몇 바퀴씩 동네를 산책하는 분, 아마도 커피가 담겨 있을 텀블러를 손에 꼭 쥐고 같은 시각 출근하시는 분…. 아침에 운동하는 시간이 없었다면 동네 분들의 이 규칙적인 일상을 알지 못했을 거다.      


처음엔 나와의 싸움으로 시작한 운동이었다. 또 작심삼일에 그치겠지 하며 나조차 나를 믿지 않았다. 그런데 줄넘기 덕분에 알게 됐다. ‘나는 시도하는 게 어렵지만 시작하면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이구나, 조금씩이라도 나아지고 싶어 하는 사람이구나’ 하고 스스로를 긍정하게 되었다. 아침 줄넘기 시간은 어쩌면 나를 살리는 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내가 나를 굳건히 믿게 되었으니까.

이제 다시 줄넘기를 시작하게 되면 그동안의 근육이 사라지진 않았을까, 또다시 매일 해나갈 수 있을까 걱정된다. 그런데 실은 알고 있다. 애써 쌓아온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하루 중 가장 좋아하는 순간을 내가 놓치지 않을 거라는 것도.


+ 덧붙이는 이야기

2주간 요양 시간을 보내고 다시 줄넘기를 시작했다. 발목에 무리가 가지는 않을까 싶어 다시 500번으로 시작해 600번, 700번, 1000번…. 드디어 오늘 1500번을 했다. 어제는 아침 7시 20분쯤 어깨에 줄넘기를 메고 딴생각을 하며 걸어가고 있는데, 벤치에 앉아 계시던 할머니께서 나를 보시며 "오늘은 좀 늦었네요"라고 말을 거셨다. 할머니와 처음으로 대화를 나눴다. 당황해서 "네"라고 답하자, 할머니는 "그동안 좀 안 보이셨는데"라고 말을 이어 하셨다. 놀랐다. 할머니도 늘 나를 지켜보고 계셨던 거다. 발목을 다쳐서 쉬엄쉬엄하고 있다고 말씀드리자, 아고 어째라고 걱정하시며 내게 "화이팅!"이라고 외쳐주셨다.

매일의 애씀을 목격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아침 이 시간은 혼자서 단련하는 시간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주변 분들의 묵묵하고 단단한 응원을 받고 있었다.


아침 시간 3종 세트. 줄넘기, 에어팟, 카메라.
아침 동네 출사 사진. 시멘트와 인조 잔디를 뚫고 피어난 꽃. 악조건 속에서도 온전한 자신으로 피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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