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일간의 휴식을 뒤로하고 다시 일상에 적응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다. 지난주의 시간이 벌써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진다. 원하고 원하던 곳으로 여름휴가를 떠났다. 드디어 오래 열망하던 장소에 도착했다.
내 로망의 장소는 해외도 아닌 부산에 있었다.
몇 년 전 어느 기사에서 부산의 한 호텔을 알게 됐다. 아날로그 감성이 물씬 느껴지는 멋진 인테리어가 눈에 들어왔고, 객실마다 놓인 LP 플레이어가 인상적이었다. 기록을 위한 고급스러운 필기구도 비치되어 있었다. 이런 곳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오롯한 고요를 맛보고 싶었다.
몸과 마음이 탈탈 털렸던 책을 마감한 지 꼬박 한 달 만에 다른 책 한 권을 또 마감해야 했다. 교정지를 붙잡고 있던 어느 주말, 문득 이 호텔이 생각났고 곧바로 예약했다. '2주 뒤에는 여기에 당도하리라, 당도해 있으리라....' 그렇게 힘들 때마다 이곳 사진을 보며 마음을 다잡았고 무사히 마감할 수 있었다.
휴가 기간에 일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부산으로 가는 KTX 안에서 보도자료를 썼다. 부산역에 도착해서는 가고 싶었던 카페로 서둘러 이동해 팀장님께 보도자료를 보냈다. 내가 꼭 머물고 싶었던 그곳을 향해 비를 맞으며 씩씩하게 걸었다. 비로소 그렇게 로망의 장소에 당도할 수 있었다.
3일간 머물렀던 공간은 내가 상상하던 것과 꼭 같았다. LP 플레이어며, 문구며, 커피며... 물건 하나하나에 정성이 배어 있었다. 이 멋진 공간을 나 혼자 누릴 수 있다니 꿈만 같았다. 이곳에 오기 위해 올해 네 권의 책을 마감하고, 어쩌면 서른다섯 해를 부단히 걸어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호사스러웠다.
아침이 되면 문 앞에 도시락이 정갈히 놓여 있었다. 따끈한 스콘을 향긋한 커피와 함께 먹었다. 궁금했던 여러 옷 가게를 찾아다녔다. 저녁엔 영화를 보며 와인을 마셨다. 사진관도 미술관도 갔다. 느긋하게 씩씩하게 주어진 시간을 기쁘게 누렸다. 그런데 단 한 가지 할 수 없는 게 있었다.
사실 이 로망의 공간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건 따로 있었다. ‘우는 것’이었다.
그동안 쌓였던 감정을 털어내고 누군가를 오래 좋아하던 마음을 정리하고 싶었다. 이곳에 도착하면 바로 눈물이 쏟아질 줄 알았다. 고요하고 아늑한 곳에서 툭툭 모든 걸 쏟아내고 싶었다. 그런데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단 한 방울도.
이상했다. 왜 왜 왜? 울보인 내가, 드디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울 수 있는데, 그토록 열망하던 곳에 도착했는데, 도무지 왜...?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여행 둘째 날 저녁, 바다를 호젓하게 걸으며 사진을 찍고 있는데 퍼뜩 그 이유를 알게 된 것만 같았다.
내가 너무 잘 지내고 있어서, 마음이 충만해서 눈물이 나오지 않는 거였다. ‘지금 나는 생각보다 엄청 엄청 잘 살고 있구나, 좋은 상태구나’라는 걸 깨달았다. 울고 싶어도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도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됐다.
여행 마지막 날, KTX 탑승 시간을 앞두고 호텔 카페에 앉아 생각나는 대로 엽서에 편지를 썼다. 이 호텔은 또 다른 감동 서비스로 엽서 두 장을 원하는 시기에 보내준다. 3년 후의 나에게, 엄마에게 편지를 쓰자 그제야 내 눈가가 촉촉해졌다. 3년 후 나는 어떤 모습으로 어떤 생각을 하며 살고 있을까? 엽서에 쓴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지 않지만, 지금 모습 그대로여도 좋을 거 같다고 쓴 것 같다.
과거의 여행에 비해 이번 여행에서 달라진 게 있다면, 나는 조금 더 나다워졌고 자유로워졌다. 그리고 목에 카메라를 걸고 있었다. 다른 사람을 의식하지 않고 찍고 싶은 걸 찍었다. 내 여행이 어떤 모양인지도 되찾게 됐다. 기차 출발 10분 전까지 보고 싶은 걸, 하고 싶은 걸 꽉꽉 채우는 사람이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답을 찾고 싶어 떠난 여행이었다. 그런데 무언의 운명 같은 답안지를 받았다. 숙소 근처 동네 책방 카운터에는 아주 적은 분량이지만 내가 쓴 글이 담긴 잡지가 놓여 있었고, 여행 마지막 날 찾아간 대형서점 매대에는 올해 작업한 책이 눈에 띄게 진열되어 있었다.
‘계속 정진할 것, 그리고 사랑을 시작할 것.’ 이번 여행이 내게 알려준 길이다.
여행을 다녀온 뒤 호텔에 이런 리뷰를 남겼다.
“이곳에서 있던 3일은 제게 깊은 위로였고, 벅찬 쉼이었고, 단단한 응원이었습니다.”
이 힘으로 남은 올해를 또다시 뚜벅뚜벅 즐겁게 걸어 나갈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