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의미를 찾고 있다면
《불편한 편의점》을 쓰신 김호연 작가님의 신간 《나의 돈키호테》 전문을 오디오북으로 들었다. 풋풋하면서도 현실적인 이야기가 좋았고 군더더기 없이 자연스레 흘러가는 탄탄한 구성이 놀라웠다. 책의 큰 줄기는 어렸을 적 많은 영향을 준 비디오 가게 아저씨를 찾아가는 내용인데, 여정의 마지막 무렵 이런 문장이 나온다.
“돈키호테 비디오는 매개체다. 나도 매개체다. 여기 모인 우리는 모두 장영수 씨 덕에 만날 수 있었다. 고로 그도 매개체다. 인간은 서로에게 매개체다.”
“인간은 서로에게 매개체다”라는 말이 머릿속에 계속 맴돌았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는 새로 입사한 분이 초기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비교적 오래 다닌 동료가 회사 생활을 도와주는 제도가 있다. 2년 전쯤에 한 번 해보았고, 한 달 전에 또 다른 분을 맡게 되었다. 이전에도 느꼈지만 은근히 부담이 된다. 회사 초반의 기억은 비교적 오래 남는데, 누군가에게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역할을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두려웠다.
그런데 이왕 선정된 거 내가 할 수 있는 선까지 해보자고 다짐했다. 용기 내어 먼저 인사했고, 내가 아는 분도 한 분 한 분 소개해드리고 있다. 이 과정에서 나 역시 새로운 분들을 알게 되며 예상치 못한 즐거운 경험을 하고 있다.
처음에 맡은 동료는 업무상 만날 일이 없기에, 내가 모르는 사이에 혹시 퇴사한 건 아닐까 걱정됐다. 그런데 얼마 전 우연히 엘리베이터에서 만났고 좋아 보여서 기뻤다. 물론 그 친구가 애써온 결과겠지만 즐겁게 회사에 다니게 된 아주 작은 이유 중 하나에 내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언터처블: 1%의 우정〉이란 영화를 보았다. 상위 1% 백만장자인 필립은 전신 불구다. 그를 간호할 사람을 모집하는데, 여러 자격증을 가진 고급 인력들을 두고 필립은 한눈에 봐도 껄렁해 보이는 백수 드리스에게 기회를 준다. 필립의 지인이 드리스의 전과 기록을 알리면서 왜 그를 선택했냐고 묻자, 필립은 말한다.
“그는 나를 장애인이 아닌 것처럼 대해. 그와 함께 있으면 내가 장애인이라는 것을 느끼지 못해.”
필립은 드리스 덕분에 살아 있음의 온전한 기쁨을 느끼고 드리스는 필립 덕분에 그림에 재능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며, 어두운 과거를 청산하고 밝은 빛의 세상을 향해 나선다. 이 이야기는 실화라고 한다. 필립과 드리스처럼 어떤 누군가와의 만남은 영혼 깊숙한 곳에 닿아 서로를 치유하고 살아온 생애 전체를 뒤흔들 만큼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어제 선배와 오랜만에 맛있는 저녁을 먹었다. 메뉴는 미나리가 아삭아삭하게 씹히는 얼큰한 우동과 바싹 구운 야끼만두였다. 선배는 이 음식이 계속 생각났는데 나도 좋아할 거 같다고 같이 먹자고 하셨다. 배를 든든히 채우고 함께 걸어가는데 간판부터 맛있어 보이는 케이크 가게가 나왔다. 선배가 들어가보자고 하셨다. 평소의 나라면 가보고 싶어도 분명 외관만 쳐다볼 뿐 지나쳐갔을 거다. 가게 안에 들어서니 외관만큼 예쁘고 아늑한 공간에 케이크가 하나하나 작품처럼 진열되어 있었다. 선배가 고르라고 했고 나는 레몬 조각이 올라간 맛있어 보이는 케이크 한 조각을 골랐다. 간판처럼 예쁜 상자에 포장된 케이크를 한껏 신나서 들고 가는데 선배가 말했다.
“나랑 있으면 기분 좋은 일이 잔뜩 생기지?”
나는 힘차게 “네!”라고 대답했다.
꽉 막힌 공간에서 혼자 살아가지 않는 이상 우린 누구에게나 영향을 받는다. 아무리 짧게 만난 사이일지라도 좋든 싫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친다. 그렇게 누군가에게 다른 세상을 보여줄 수도 있고, 마음의 안정감을 줄 수도 있고, 든든하게 응원을 북돋아 줄 수도 있다.
‘내 인생이 무슨 의미가 있어’라는 회의가 들 때면 자신이 누군가에게 좋은 매개체가 될 수 있음을 떠올리자. 잠깐 스쳐 가는 사이일지라도 좋은 기억으로 남는 사람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