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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earliner Jul 22. 2015

기내 화장실에서 연어를 먹던 그리즐리 곰

2009년 가을, 스페인 마드리드 행

 마드리드로 가는 비행기 안, 내 옆을 스쳐 엉금엉금 기내 복도를 지나가던 곰이 휙 다시 돌아와 비어 있던 옆자리에 털썩 앉는다. 바람에 흙냄새랄까, 지푸라기 냄새 같은 게 밀려왔다.

 “마드리드는 뭣 하러 가슈?”

 두 좌석을 차지한 의자가 ‘끼이익’ 힘겨운 소리를 내며 곰 엉덩이를 견딘다.

 “예, 그냥 배낭여행 차 뭐…… 헤헤.”

 말을 길게 하면 떨림이 들킬까 봐 짧게 잘라 대답했다. 겁먹은 티를 내지 않고  편안하게,라고 생각만 했을 뿐 경직된 팔을 덜덜 떨면서 정중히 말했다. 엄청나게 커서 한번 휘두르면 머리가 부서질 게 분명한 곰발바닥에서 애써 눈을 돌리면서.

 “난 캐나다 그리즐리에서 왔수다. 거긴 겨울이면 ‘우웨웨~’ 춥거든. 한번은 겨울잠 시기를 놓쳐서 어찌나 추위로 고생했던지 원.”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의 영화 <그리즐리 맨>을 재미있게 봤던 나로서는 등줄기에 식은땀이 얼어 고드름이 되어버릴 정도로 무서운 바로 그 곰. 곰을 격리 조치하지 않고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스튜어디스에게 받았던 사과주스로 목을 축이고 마음을 진정시킨다.

 “자……자……잠은 보통 언제 주…… 주무시길래. 제 말씀은 그러니까 겨울잠…….”

 침착하게 떨지 않으면서 물었다. 의자가 진동할 정도로 가슴이 쿵쾅거리고 혀끝이 저려온다. ‘그런 건 댁이 알아서 뭐하게’ 라며 금방이라도 송곳니를 내 머리에 꽂을까 봐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대화가 없으면 곰이 다른 생각을 할지 몰라 나오는 대로 지껄였는데 괜히 물어봤나.


 “어이쿠.”

 비행기는 터뷸런스(난기류를 지나며 비행기가 심하게 떨리는 현상)가 심했고, 곧이어 안전벨트 착용 지시등이 켜졌다. 기장의 이상기류에 대한 태국어와 스페인어 기내방송.

 “난 사실 겁이 많수. 이런 진동은 언제 겪어도 무섭다니까. 겨울잠? 그까짓 거, 요즘 활동적인 우리들 또래는 여행을 다니면서 겨울을 피해. 시간은 금이거든. 나는 겨울잠 시기도 피할 겸 마드리드 무슨 국립동물원에 예쁜 처자가 있다고 해서 새끼 임신시키러 가는 중이외다. 후후.”

 안전벨트를 있는 대로 길게 늘여 배에 꽉 맞게 채우며 곰이 말했다. 과연 쓸모가 있을까 싶은 안전벨트는 바늘처럼 날카롭고 거친 털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끄덕끄덕. 네네. 최대한 예의 바른 경청 자세. 내가 떠는 건지 아니면 여전히 비행기가 터뷸런스 상태인 건지 분간할 수 없었다.

 “수입도 괜찮으우. 몇 번 잠자리를 즐긴 후에(이해하기 힘든 이상한 손동작을 반복하며 느끼한 미소를 짓는다) 결과가 좋으면 그 돈으로 매니저랑(모르긴 몰라도 사육사를 지칭하는 듯싶다) 스페인 지중해를 즐기는 거지. 후후. 저기 멍청한 몬트리올 아이스하키 팀 모자를 쓴 친구가 내 매니저.”


 곰은 안전벨트 착용 지시등이 꺼지고 기내가 안정된 후에야 앞좌석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좌석이 뒤로 잔뜩 기울어지며 두려움에 찬 앞사람의 자는 척하는 모습이 언뜻 보였다. 곰은 야참을 먹을 참인데, 사람들이 무서워해서 화장실에서 연어 세 마리를 먹고 오겠다고 했다.

 먹잇감이 내가 아니라는데 안도하며, 다녀오시라고 정중히 일어나 배웅해드렸다. 그러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게 된다. 주눅 들지 않은 강건한 자세를 유지한 내 자신이 자랑스럽다.


 마드리드 행 내내 앞좌석에 엄청난 거구의 스페인 남자가 앉았는데, 어찌나 몸집이 크던지 쳐진 옆구리와 털이 잔뜩 난 팔이 의자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복도 측 좌석이었던지라 지나가는 사람들마다 신경을 쓰며 게걸음으로 지나쳤다. 외국인 특유의 암내도 굉장해서 기네스북에 등록하지 않았다면 대신 신청해주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실제로는 곰 대하듯 조용히 뒤에 앉아 그를 곰에 풍자한 글이나 썼다. 난 평화주의자니까.

 밤의 마드리드 행은 여러모로 피곤하다.

책에 삽입된 지도. 당시 여행 루트를 단순화해서 일러스트레이션했다.

*이 글은 2013년 발간된 여행기 <느린 청춘, 문득 떠남>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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