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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밀 Sep 05. 2021

카카오톡 없이 4개월


번호를 바꾸면서 카카오톡을 지웠다. 9월이 되면서 카카오톡 없이 생활한 지 4개월 차에 접어들고 있다. 10년 넘게 써왔던 번호를 바꾼 것은 다분히 충동적이었다. 각종 스팸과 이벤트 안내 알람까지, 노란색 앱 위에 떠 있는 빨간색 숫자는 미뤄 둔 숙제처럼 늘 신경 쓰였다. 그중에서도 단연 신경이 쓰였던 것은 아는 사람들의 '한번 만나자, 언제 밥 먹을까?' 하는 카톡이었다. 그날도 아는 동생이 이번에는 꼭 만나고 말겠다는 의지로 구체적인 날짜를 정하고자 연락이 왔다. 

그동안처럼 알고도 속을만한 거짓말을 또 한 번 할까? 하다가 부아가 치밀었다. 내가 왜 또 거짓말을 하고 미안해해야 하지? '나가기'를 누를까? 하다가도 이 나이 먹고 할 말도 제대로 못하고 비겁하게 씹는 건 너무 한심한 거 아니야? 싶었다. 점점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이 촉박해졌다. 얼른 미션을 수행하고 다음 사람에게 이 시한폭탄을 넘겨야 하는데 나는 여전히 끙끙대고 있었다. 그러다 날은 저물었고 나는 시한폭탄과 함께 펑하고 터져버리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통신사 사이트에 접속해 핸드폰 번호를 변경했다. 핸드폰 번호가 변경되었다는 것을 고지해주는 서비스는 당연히 체크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카카오톡을 지웠다. 




단순히 카카오톡을 지웠을 뿐인데 신기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여름이 시작되면서 완전히 고착되어버린, 풀리지 않는 취업문제를 뚫어보고자 컴퓨터 학원을 다니기 시작했다. 흔하디 흔한 포토샵도 다룰 줄 몰라서 취업이 안 되는 것처럼, 그럴 리가 없음에도 나는 이 불안감을 타개해보고자 학원을 등록했다. 내일 배움 카드를 이용했기에 학원비는 저렴했다. 주 5일, 매일 5시간씩 이어지는 꽤 하드 한 수업이었다. 포토샵, 일러스트 자격증을 위한 대비반이었다. 놀라운 것은 학원에서 취업 및 자격증 시험 안내를 해준다는 설명을 시작할 때부터였다. 이 모든 안내는 '카카오톡'으로만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의 핸드폰에는 카카오톡이 깔려 있다고 이들은 확신하고 있었다. 


"카톡이 깔려있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되나요?"

나는 손을 들고 물어보지 못하고 쉬는 시간 쭈뼛쭈뼛 데스크로 가서 물어봤다. 약 2초 정도 정적이 흘렀다. 

"아..... 그러시면 문자로 보내드릴게요."

직원은 당황한 듯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그것(카톡이 없다)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직원의 생각을 그대로 읽을 수 있었다. 직원의 태도를 보고 어쩐지 저 안내 문자가 나에게만 누락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자격증 시험 접수 안내 문자가 나에게는 도착하지 않았고 덕분에 나는 접수비를 내지 않은 사람 명단에 들어가게 되었다. 

다시 한번 데스크로 가서 계좌번호 안내를 받지 못했다고 하니

"아... 그 카톡 없는 분이시죠?"라고 했다.

그 이후로 나는 학원에서 '카톡 없는 분'으로 지칭되었다. 수십 명의 학생들이 다니는 이 학원에 유일한 존재인 모양이었다. 나는 카카오톡의 위력에 놀랐고 그 장악력이 두렵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카카오톡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정보에서 소외될 수 있는 세상이라니. 


그 이후에도 그런 일은 반복적으로 일어났다. 취업 공고도 따로 메일이나 문자로 보내준다고 했지만 역시 오지 않았고, 다음 자격증 시험 날짜 및 접수 안내도 오지 않아 전화로 해결했다. 이제는 카드 내역서, 고지서, 백신 접종, 국민 지원금 같은 것들, 놓치면 문제가 될 수 있는 중요한 안내문도 카카오톡으로 전달되고 있다. 늘 나는 한 박자 늦게 이 정보들을 알게 됐다. 





번호를 바꾸고 나는 내가 가진 연락처를 추리고 추렸다. 꼭 남겨두어야 할 번호만 남겨두고 모두 삭제했다. 

22개. 나에게 남은 번호는 딱 22개뿐이었다. 지인이라고 해도 최근 몇 년간 연락을 주고받은 적이 없거나, 연락이 왔을 때 마음이 불편했던 사람들은 모두 지웠다. 그중에는 번호를 지우는 것을 몇 번씩 망설이게 만드는 좋은 기억이 많은 지인들도 있었다. 한 때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누고, 같이 밥을 먹고 배를 잡고 웃었던 기억이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래서 그들의 연락처를 지울 때 나는 미안했다. 

어느 날 이들은 카카오톡에 '알 수 없음'으로 표시될 나를 보게 될 것이다. 혹시나 싶어 문자도 보내보고 그래도 답이 없으면 전화를 걸어볼지도 모르겠다. 그제야 이 번호는 '없는 번호'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번호를 바꾼 내가 자신들에게 '아직' 바뀐 번호를 알려주지 않았구나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아무리 지나도 번호가 바뀌었으니 다시 저장해 달라는 연락은 오지 않을 것이고 이들은 황당하고 화가 날지도 모르겠다. 왜???라는 의문을 품게 될 것이다. 싸운 적도 없고, 아무 일도 없었는데? 왜?

아니면 이건 나의 과대망상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내가 카카오톡에서 사라졌는지도 모를 수도 있다. 전화까지 해보는 수고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비겁하고 졸렬하고 이기적인 방법이다. 이유도 말해주지 않고 연락을 끊어버리다니. 그런데 그 이유라는 것을 설명하기가 너무 어렵고 지난한 관계들이 있다. 그 불편함은 처음에는 잉? 스러운 짧은 의문에 불과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점점 쌓여 이 사람과 나는 잘 맞지 않는다는 확신으로 변해가고, 이 사람 앞에서 부자연스러운 모습의 내가 튀어나온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때는 좋았던 이 사람들과의 기억을 훼손하고 싶지 않아 자꾸 거짓말을 하게 된다. 거짓말을 하고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이 싫어서, 왜를 설명할 자신이 없어서 이 비겁한 방법을 선택해버리고 말았다. 언젠가는 다른 사람에게 나도 똑같은 취급을 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그때 황망하고 속상하겠지만 받아들이자고 다짐하면서. 





카카오톡이 없으면 22명의 연락처 중에 남은 진짜 친구(?)들에게도 연락이 잘 오지 않는다. 원래도 늘 카톡을 끼고 사는 관계들은 아니지만 문자는 그런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는데 선뜻 실행되지 않는 모양이다. 엄마도 마찬가지다. 카카오톡으로는 노다지 보내오던 사진들, 더보기를 누르라고 할 만큼 길고 길었던 장문의 푸념도 문자로는 보내지 않는다. 어색한 모양이다. 덕분에 나는 신경 쓰이는 부분이 한결 줄었고, 약간은 심심하기도 했다. 


하루 종일 거의 울리지 않는 핸드폰만 가지고도 외로운 섬 체험이 가능하다. 분명히 풀려 있고 자유로우나 고립되어 있는 기분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이 고요함이라는 것은 지금 이 세상에서 체험하기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 처음에는 어색했던 이 외로운 섬 체험도 4개월에 접어드니 훨씬 수월하다. 일을 시작하면 다시 카카오톡을 깔아야 할지도 모르겠다. 회사에서도 '카톡 없는 분'으로 지칭되거나, 카카오톡으로 전달되는 중요한 정보를 저에게만 따로 문자나 메일로 달라고 할 용기가 아직 나에게는 없으니까. 그전까지는 조금 더 이 고요함을 누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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