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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최고의 비빔밥

8월의 베를린

by 악어엄마

여름마다 베를린을 찾는다. 아이 친구 가족들은 스페인이나 터키로 휴가를 떠나는데 우리는 베를린이다. 99% 엄마의 사심이다. 아이와 함께 가는 건 이번이 5번째다. 왜 이렇게 베를린을 좋아하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한다. "전 아이가 도시들도 사람처럼 변화하고 성장한다는 걸 깨달았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꼭 1년에 두 번씩 독일 수도로 가는 거예요. 여름에 한 번, 겨울에 한 번." 내가 생각해도 멋진 대답인데, 왜 다른 독일 도시에는 별로 관심이 없는지,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


베를린 셋째 날이다. 이번에 이용한 호텔 패밀리룸은 생각이상으로 컸다. 아이는 숙박이 공짜라 호텔 가격도 무지하게 저렴했는데, 엄마는 짠돌이라 호텔 조식 같은 건 예약하지 않는다. 호텔 바로 아래에 대형 쇼핑센터가 있고, 온 주변이 식당과 카페다. 그런데 오늘은 독일의 일요일이다. 쇼핑센터는 문을 열지 않는다. 입 짧은 아드님은 어제 사놨던 바나나 하나랑 삶은 계란 하나를 먹더니 배불러한다. 난 커피가 간절하다. 무조건 밖으로 나가자고 남자들을 끌고 나갔다.


유명한 마우어파크 벼룩시장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내린다. 몇 번 가봤는데 관광객들이 너무 많이 찾아서 그런지 비싸고 살게 없다. "우리 지금 어디 가는 거야?" 두 남자들은 종종 행선지도 모른 채 나를 따라가야 한다. 엄마는 계획 같은 거 안 세우는 타입인 거 알잖아. 미안. 우리 그냥 종점에서 내리자.


트램 종점에는 작년에 중세풍 크리스마스 마켓을 보러 갔던 RAW 문화센터 (Reichsbahnausbesserungswerk)가 있다. 원래는 기차를 수리하던 곳이라는데, 정부가 재개발을 하는 게 아니라 주위에 살던 동네 사람들이 이 공간을 자율적으로 사용하면서 자연스럽게 지금의 모습이 되었다. 아직도 땅에는 기차선로가 그대로 남아있다. 일요일에는 벼룩시장이 열린다. 남녀노소 전 세계 사람들이 바글바글하다.


입구부터에서 이런 건 거리에서 주웠나 싶은 정체불명 잡동사니를 좌판도 없이 길에다 깔아 놓고 팔고 있다. 여름 같지 않던 선선한 7월이 지나자 갑자기 온도가 30도에 육박한다. 몸이 적응이 안 된다. 여기는 길에 깨진 병조각과 쓰레기가 가득하다. 사람들이 한 장에 2유로라는 옷더미들을 뒤진다. (이런 곳에서 꼭 기억할 것 : 20대는 넝마를 꿰 입어도 이뻐보이는 것이니, 우리 사모님께서는 문이 있는 곳에서 옷을 사세요.) 짜가 라부부도 보이고, 인도식 장신구를 파는 곳에서 특유의 향 냄새가 난다. 드디어 발견한 블랙커피가 3유로다. 흠, 살까 말까. 그때 아이가 말한다. "엄마, 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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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에 들어가니 번듯한 카페가 하나 있다. 바깥은 그라피티 천지인데 여기는 너무너무 깨끗하다. 카페메뉴에 한국식 아아가 있다. 만세! 독일어로 주문을 하니, 대답을 영어로 한다. 독일사람들도 영어로 주문한다. 독일어가 통하지 않는 베를린에선 외국인이라고 기죽을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6살 아이는 이제 밴드 스티커로 가득한 화장실에 혼자 들어간다. "엄마는 그냥 앞에서 서있어" 하면서 볼일을 보고 손을 씻는다. 여기는 콘서트장에 음악연습실이기도 하다. 한 시간에 3유로? 사람들이 악기를 들고 분주하게 연습실로 들어간다. 2층에도 연습실이 있는 모양이다. 누가 너바나 곡을 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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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깔끔해서 초현실적인 공간에서 나와 야생으로 돌아간다. 남대문시장에 처음 갔을 때 그 날 것의 느낌이 너무 좋았던 기억이 난다. 아직 12시는 안 되었지만 점심은 뭐 먹지 고민하는데, 비빔밥을 파는 푸드트럭이 보인다. 짝퉁 루이뷔통 백에 "분식"이라고 알록달록 써놓은 "간판"이 돋보인다.


한글로 "아빠"라고 자수를 넣은 분홍색 모자를 쓴 우리 집 아저씨. 비빔밥을 주문했다. 한국 벼룩시장에서 샀던 엘지트윈스 모자와 한글로 "야쿠르트"라고 쓰인 티셔츠를 입은 우리 아들도 옆에 있다. 사장님은 넉살이 보통이 아니다. 한국어와 독일어로 대화가 오가는 사이, 손님들이 밀어닥친다. 사장님은 관광객들에게 영어로 비빔밥 먹는 법을 가르쳐 준다. 베를린 최고의 비빔밥이란 멘트를 잊지 않는다. 아빠가 먹는 걸 본 입 짧은 아들도 자기도 먹고 싶다고 한다. 사장님이 아이가 먹을 수 있도록 삼삼한 간장 양념에다 고추장 한 방울과, 서비스 불고기까지 얹어 한 그릇 내주었다.


사장님은 밀려드는 손님은 알바에게 맡기고, 우리에겐 서비스에다 할인까지 해주며 사장님의 다친 다리를 치료하는 적절한 방법에 대해, 포켓몬에 대해, 베를린에 대해, 심지어는 내 논문 주제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장님은 영화를 하던 사람이란다. 사장님이 "베를린 최고의 비빔밥"을 외치다 말고 한국말로 말했다. "이거 맛있죠? 시판이에요."


나는 입 짧은 아이가 먹다 남긴 비빔밥을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사장님은 어른이 먹을 수 있도록 시판 고추장을 듬뿍 쳐주었다. 베를린 최고의 비빔밥이었다.


(사진 : 글쓴이. 마지막 사진은 Urban Nation 화장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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