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늦여름의 놀이터

분노의 레고

by 악어엄마

아들은 레고를 좋아한다. 4살부터 할아버지가 한 달에 하나씩 커다란 레고 상자를 사다 주셨고, 아이는 이제 웬만한 레고는 시시하다고 할 정도가 되었다. 기계 원리를 배울 수 있다는 레고 테크닉 시리즈를 하나 샀다. 아침에 일어난 아이에게 가져다줬더니, 빨리 만들어 보겠다고 난리다.


아이는 잠옷 바람으로 식탁에 앉아 100페이지가 넘는 조립 설명서를 보며 204단계를 혼자서 헤쳐나갔다. 그리고는 점심을 먹으면서 조립하는 불꽃 투혼으로 몇 시간 동안 자리에 앉아 레고 트럭을 완성했다. 톱니바퀴를 돌리면 덤프트럭 부분이 움직이는 등 나름대로 정교하게 잘 돌아간다. 아이는 뿌듯해하며 한국에 있는 할머니에게 영상통화로 자랑했다.

20250827_002623.heic 트럭 안에 안 보이는 부분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같은 동네에 사는 7살 이브라힘이 집 앞에 서있다. 이브라힘과 그 가족에 대해서는 한 번 쓴 적이 있다. 아들이랑 같이 놀아도 되냔다. 찜찜하지만 문 앞에 이미 있는 아이를 뭐 돌려보내기도 그렇다. 슬그머니 나는 안방에 들어간다. 밖에는 왁자지껄하다. 그 말은 나는 자유다! 새로 산 책을 읽으며 행복한 시간을 10분 정도 보냈다. 그때 밖에서 아들이 나를 부른다.


"엄마! 이브라힘이 배고프대."

"응. 아이스크림 하나 꺼내 줘."

"엄마, 거기에 젤라틴 들어있어?"


이브라힘은 무슬림이다. 돼지고기를 먹으면 안 되니까 항상 뭘 먹기 전에 물어봐야 한다. 이제 내 아들이 그 질문을 대신해 준다.


한 20분이 지났을까. 또 날 부르는 소리가 난다.


"엄마! 이브라힘네 누나도 우리 집 와서 놀아도 돼?"

"응. 놀라 그래. (아들아, 이 책 무지 재밌는데 방해하지 말아 줘)"


문 여는 소리가 나는 걸 보니 누나도 왔나 보다. 근데 갑자기 안방문이 열린다.


"아줌마. 이 거 어떻게 켜요?"


이번엔 이브라힘의 9살 누나가 디지털 피아노를 켜달란다. 음악이라곤 할 수 없는 소리가 계속되다가 갑자기 멈춘다.


"엄마!"

"왜!"

"나 이브라힘이랑 놀이터 가도 돼?"

"응. 알았어. 근데 엄마랑 같이 가. 엄마 준비해야 하니까 아래서 기다리고 있어!"


그럼 그렇지. 자유시간은 무슨. 달콤했던 침대에서 빠져나와 욕실로 가서 렌즈를 끼고 선크림을 발랐다. 거실로 나가니 난장판이 따로 없다. 이브라힘한테 자기가 놀은 장난감은 치우고 나가라고 그렇게 얘기했지만, 이번에도 이 아이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게다가 그나마 점잖다고 생각했던 이브라힘의 누나는 내가 사놓은 미니멀한 디자인의 포스터를 색연필로 색칠을 해놓았다. 그것도 벽에 붙여놓은 걸 떼서 말이다.


그러다 못 볼 것을 보고 말았다. 아이가 아침부터 끙끙거리면서 만들었던 레고 트럭이 한쪽에 부서져 있었다. 톱니바퀴 부분이 사라진 것을 봐서 작동 원리를 제대로 모르는 누군가가 억지로 잡아 당겨 놓은 거다. 이런 식으로 우리 집에 와서 부서 놓은 장난감이 한 두 개가 아닌 그 누군가.



이브라힘은 저번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동네에서 평판이 좋지 않다. 나는 이 아이의 가정환경에 대해 대강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민폐 끝판왕인 이 아이를 굳이 가까이할 필요는 없지만, 그래도 우리 집에 오게 되면 따듯하게 맞아주기는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건 정말 아이 잘못이 아니란 걸 안다. 거의 방치되듯이 자라고 있는 아이들에게 그래도 이웃 어른은 필요하다 믿었다. 이민자들의 삶은 쉽지 않으니까. 연대해야 되니까. 그런데 부서진 레고 트럭은 나의 점잖은 어른 코스프레 회로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저 집 애들하고 가까이 하지 말라던 우리 동네 생생 정보통 터키 아저씨 말 듣을걸. 이브라힘아. 난 연대고 뭐고 교육평등 어쩌고 더 이상 관심 없어졌다. 너희들이 오면 이제 우리 집 문은 열리지 않을 거야.


아이들은 소리를 지르며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았다. 그런데 이브라힘은 뭔가 안 되면 계속 욕을 해댔다. 아이는 이브라힘이 욕을 할 때마다 나를 쳐다보며 "엄마! 자꾸 이브라힘이 나쁜 말해!"라고 한국말로 외쳤다.


그러자 이브라힘이 나에게 오더니 갑자기 맥락 없는 질문을 퍼붙기 시작했다.


"딸기는 왜 생긴 거예요?

"생명이 그렇게 진화했으니까. 어떤 건 딸기가 되고 어떤 건 나무가 되고 어떤 건 사람이 된 거지"

"생명이 왜 생긴 거예요?"

"나도 몰라. 아무도 몰라. 우연한 화학작용이겠지 뭐."

"전 알아요. 알라가 만들었어요."

"그래? 그럼 알라는 누가 왜 만들었어? 넌 알아?"


내 아들 레고를 부신 7살 아이에 대한 복수를 다짐한 나는 산타클로스를 암살할 만한 분노를 삭이며 차갑게 되물었다. 아, 여름 방학아 빨리 끝나라.


웃으며 비건 젤리를 나누어 주던 이웃 아줌마의 낯선 모습에 이브라힘은 순간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뒷걸음치며 다시 그네로 달려갔다.


(사족 : 트럭을 본 아들은 이브라힘은 다시는 우리 집에 올 수 없다며 오열하였다. )




keyword
작가의 이전글베를린 싸움 구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