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력의 거짓말
안 좋은 일, 그리고 좋은 일 너머에
"'삶 역시 유능함에 대한 보상이 아니다."라는 문장에 나는 또 한 번 충격을 받는다. 기분 좋은 충격이다. 아닌 척했지만 나는 늘 내가 유능해야 삶이 온전히 주어진다고 믿었다.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것이 인생이라 생각했다. 이런 생각은 필연적 오만함으로 이어진다. 지금껏 내가 이룬 모든 것이 100퍼센트 내 노력의 결과라는 자랑스러운 확신. 불행한 사람들은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분명하다는 남부끄러운 속마음.
그런데 이런 오만한 확신은 사실, 불안과 등을 맞대고 있다. 유능하지 않으면, 노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데, 과연 나는 삶이라는 이 역경을 이겨낼 수 있을까? 아니 그런데 삶이 역경이라면, 나는 대체 무엇을 위해 살아가고 있는거지? - Around Vol.88 <자전거를 타는 기분> 중 발췌-
8년 동안 좋아해오던 작가가 우울과 공황에 힘든 시간을 보내는 걸 블로그를 통해 실시간으로 알게되는 건 썩 기분좋은 일은 못됐다. 사실 일정 수준 그 사람과 나를 동일시해온 경향도 있었고... 나 또한 3개월, 3개월 총 6개월 동안 우울증 약, 불안장애 약을 먹어온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같은 예민한 인간들은 정신과 문턱을 밟아야 할 팔자인가라는 한탄도 있었다.
결국 나는 나보고 범불안장애를 진단내리고 우울증 약은 넣지 않고 소화제 + 불안장애 약만 넣어주다가 어느새 내 말에서 우울감을 느꼈는지 대충 상담하고는 소화제를 나와 상의도 없이 우울증약으로 바꾼 의사에게 분노해 그 길로 완전히 약을 끊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때 지독한 독감으로 아팠고, 신체가 미칠듯이 아프니까 그 동안 집착하던 모든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는 더 이상 불안하지 않았다.
사실 나는 2016년 입시가 좌절된 후 내 정신의 어느 한 구석은 죽어있다고 생각했다. 아마 내가 가장 심한 우울증을 앓았던 것은 오히려 전 회사보다 대학생 저학년 시절이었던 것 같다. 본인이 우울증인지 모르는 우울증. 내 인생의 목표는 정확하게 연세대학교에 들어가서 과잠을 입고 cc를 하는 것이었다. 그 모든게 좌절되어 연세대학교는 정시 원서도 넣지 못했고 그 옆에 있는 여대나 들어가 cc는 커녕, 옆 학교 cc들을 복합적인 질투심에 휘감긴 채 바라만봐야 했다.
그 전까지 대체적으로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명제 속에 살아오던 내게 형용키 어려운, 그러나 또 형용하자니 어디 말하기 쪽팔린 그런 경험이었다. 학교 근처를 배회하다가 Y 과잠바를 보면 숨이 막혀왔는데(실제로 호흡이 힘들었다), 그걸 누구한테 말하겠는가? 말한다면 다들 재수해, 반수해, 그러지 않으면 '너가 그 정도로 원하진 않나보지'라고 말할텐데 누구한테 말을 할 수 있을까? 그 당시 나는 내가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런 벌을 받아도 싸다고. 이게 바로 노력하지 않은 사람의 최후라고.
그러다가 정신을 차리고보니 주변에 정말 아무 것도 없었다. 3학년 즈음이었을 것이다. 친구도 없었고 이룬 것도 없었다. 사실 지금 생각해보면 22살이 뭘 이루냐 싶겠지만, 그 당시 내 주변은 괜찮은 성적과 괜찮은 인간관계 3학년이라면 으레 떠나는 교환학생 등 적어도 나보다는 이룬 것이 많아보였다. 그 때 또 다시 한 번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세월, 또 다른 노력을 하지 않는 대가를 치루는 것이라구나 생각했다.
2번의 노력하지 않은 죄목으로 '처벌'을 받았다고 생각한 후, 더 이상 이렇게 살 순 없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 때부터 정신을 차리고 하나씩 하나씩 기회의 문을 열어나갔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쉽게 열린게 단 하나도 없었지만, 어쨌거나 나는 사회적으로 '정상적인' 나이에 '정상적인' 대기업 본사에서 '정상적인' 커리어를 꾸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또한 내 노력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이제 된 거 아닌가? 싶겠지만 6개월 중 3개월은 지금 이 회사를 다니면서 복용했다. 내가 이룬것들이 너무 좋은데, 내 순간의 실수, 순간의 잘못된 선택, 뭔진 모르겠지만 일단 내가 잘못해서 뭔가 하나라도 놓치게 되면 다시 구렁텅이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매일매일 이렇게 살 바엔 차라리 죽는게 낫지 않을까? 라고 생각하던 전 회사에서의 재직기간과 대학교 1,2학년 때와 같은 실패와 절망과 열등감과 어두컴컴한 그곳으로 빠져들어갈 것만 같았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그건 또 내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일거라고. 그래서 원하던 걸 얻어도 늘 불안하고 괴로웠다.
노력이 무언가를 결정한다는 너무 오만한 발상일 지도 모른다. 나는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에 입시에 실패했던 것이 아니다. 그냥 어쩌다보니 운이 좀 나빴다. 또 오롯이 나의 노력으로만 대기업 취뽀를 했다보기도 어렵다. 알고보니 임원은 여자 비공대생을 뽑는 걸 극도로 싫어했는데 끝까지 나를 뽑아야 한다고 밀어붙여주었던 면접관들이 있었다. 임원이 끝까지 본인 의견을 밀고나갔더라면 나는 내 노력과 무관하게 불합격했을 것이다.
삶의 성취는 대부분 운과 어떤 흐름에 의해 좌우된다. 그 무엇도 100퍼센트 내가 잘해서, 내가 잘못해서 나타나는 결과물은 없다. 그래서 성취를 행복과 동일시 하는 인생은 불행하다. 이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다. 성취는 행복이 될 수 없다. 성취에 실패하는 '안 좋은 일'은 발생할 수 있지만, 그렇게 안 좋은 일이 생겼다고 해서 인생이 나락으로 가지는 않는다. 성취에 성공한 '좋은 일'이 생기는 건 너무나도 행복한 일이지만, 그 좋은 일 하나 생겼다고 인생이 상한가를 치진 않는다. 그냥 안 좋은 일이 생겼다가, 좋은 일이 생기기도 하고 그러한 일정한 곡선 속에서 우리는 왔다갔다 몸을 맡기게 될 뿐이다.
실제로 극도로 불행했던 대학교 저학년 시절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이대에서 홍대까지 걷거나 이대에서 충정로까지 걷는 호사를 누렸다. 그렇게 서울 구도심을 걸으면서 그동안 나를 감싸고 있던 안온한 신도시의 품에서 벗어나 날것의 세상을 보았으며, 지금과는 또 다른 대학 문화의 최전선에서 몸담고 있다는 데서 자랑스러움을 느꼈다. 중국문학과 마르크스를 읽고 러시아어를 배우는 지적으로 사치스러운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평일 오전 11시에 연남동에서 쌀국수를 먹는 것처럼, 입시가 망했던 '안 좋은 일' 뒤에 일어난 평범하고 소소한 즐거움이 있었다.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반대로 그토록 원하던 대기업에 취업하고나서도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성취에서 오는 짜릿한 감정은 순간이었고, 막상 들어가니 회사는 그냥 회사였다. 함께하는 동기나 팀원들이 좋았다가 안 좋았다가를 반복하는 평범한 일상이 지속되었고, 연수원에서는 내심 우리팀을 무시하는 뉘앙스를 풍기는 사람들도 있었고, 업무 통화 중 은근하게 모욕감을 주는 사람도 있었고 우리 팀은 정치질에 밀렸다가 또 다시 회복했다가를 반복했다. 그러니까 '좋은 일'이 생겼다고 그 좋은 감정이 영원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여전히 나는 또 무언가를 성취하기 위해 노력하지만, 예전처럼 극단적으로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 지금 기준에서 제일 성공이라고 생각되는) 뉴욕에서 정말 원하던 회사에서 일하게 된다고 한들, 그 기쁨은 크겠지만 계속되진 않을 것이다. 누군가는 나를 동양인이라고 무시하며 충분한 기회를 주지 않을 것이고 원하는 만큼 돈을 받지 못할 수도 있고, 향수병을 앓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좋은 사람들을 만날거고 엄청 맛있는 라떼나 베이글을 먹게되는 날도 있을 것이다. 노력은 딱 그 정도 기쁨을 위해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하는 걸로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실패한다면? 그냥 집 근처 좋아하는 카페에서 라떼나 베이글을 사먹으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