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적 지지자의 효과
간혹 나는 내가 왜 그렇게 관계에 취약한가를 생각해 본다. 초등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친구가 없던 나는 사회성을 기를 만한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동물에게 정을 더 붙이게 됐는지도 모른다.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마당에서 함께 살던 해피와 놀곤 했는데 어느 날 집에 오니 해피는 사라지고 빈 개집만 남아 있었다. 울며불며 해피 데려오라고 소리 지르는 나에게 엄마는 해피를 시장 아주머니에게 팔았다 했다. 그날 저녁, 엄마는 아빠가 몸이 허하다며 고린내 풀풀 풍기는 보신탕을 상에 내어왔다. 그날부로 나는 한동안 엄마를 아주 죽도록 미워했다. 동화 속 어떤 마녀보다도 엄마는 내게 악독한 괴물이었다. 그래도 희망의 끈을 놓을 수는 없었다. 어쩌면 엄마를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날 이후 시장에 갈 때면 눈을 부릅뜨고 해피를 찾았지만 그곳에 살아 있는 개는 없었다. 그때만 해도 개고기가 돼지고기처럼 대놓고 팔리던 시절이었다.
일 년이 지나고 초등학생이 되었을 때다. 하교 후 정문 앞에서 황토색 박스에 담겨 있던 병아리들을 보고 눈을 떼지 못하고 한 마리를 데려왔다. 병아리는 닭이 될 때까지 넓은 마당에 닭똥을 잔뜩 눠가며 자유롭게 잘 컸다. 토실토실 닭이 살이 오르던 어느 날, 집에 오니 닭똥 흔적만 있고 내 병아리는 자취를 감췄다. 그날 저녁 우리 집 밥상엔 닭볶음탕이 올라왔다. 나는 한 숟갈도 먹지 않고 내내 엄마를 노려봤다. 분해서 눈물이 났다.
늘 혼자 놀아 조용하면서도 누구보다 극성맞았던 나는 높은 곳에서 뛰어내리거나 달리기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때는 등교 시간 두 시간 전이면 일어나 혼자 아파트 주변부터 학교 운동장까지 한 바퀴를 크게 달렸다. 달릴 때마다 어쩜 그렇게 강아지들과 인연이 깊은지, 한 달에 한 번씩은 꼬질꼬질한 유기견을 안고 집으로 들어왔고 그때마다 엄마에게 등짝을 뒤지게 맞았다. 엄마는 인정머리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냉혈한이 분명했다.
엄마는 아파트로 이사 오고부터 그곳을 새하얀 병원처럼 아침이고 저녁이고 걸레로 닦았다. 넓은 거실엔 텔레비전만 달랑 있었고 그 어떤 소품 하나 밖으로 내놓질 않고 구석구석 넣어두었다. 집안을 무균실로 만드는 게 엄마의 꿈이었는지 유기견만 보면 무슨 병균 덩어리라도 보는 것마냥 기함하며 베란다로 몰았다. 그러면서 얼른 저 출처를 알 수 없는 생물체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라며 소리를 쳤다. 매번 만남과 이별의 연속이었다.
초등학교 시절 늘 내 적수는 엄마였다. 엄마를 상대하려면 기세에서 밀리지 말아야 했다. 죽도록 맞아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리고 잘못했단 말도 절대 안 했다. 엄마는 늘 힘으로 날 제압하는 폭군이었고, 나는 자유의지를 외치는 민주시민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 엄마는 나와의 말싸움에서 절대 이길 수 없다며 항복했다(나에게 직접 말하진 않았고 누군가와의 전화통화에서 내 흉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엄마와 나는 그렇게 가깝고도 먼 관계였다(물론 엄마가 개입하지 않은 일상은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엄마에게 대부분을 의지하기는 했다. 문제집 사는 것부터 학원 등록이며 모두 엄마에게 부탁했고 엄마는 그런 내 요청을 모두 들어주기는 했다).
내가 관계에 서툴다는 것을 서른 중반이 되어서야 자각하면서 나는 심리상담을 받게 됐다. 선생님은 내게 유년시절에 관한 질문을 많이 했다. 특히 엄마 아빠와의 관계에 대해 묻고 했는데 부모님과 정서적 교류가 거의 없었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됐다. 연년생인 동생이 태어나고 나서부터 나는 늘 큰애였다. 엄마나 아빠와 밀착해 속얘기를 터놓거나 충만한 스킨십을 받아본 적도 없었다. 그건 늘 동생 몫이었다. 나는 혼자서도 알아서 잘하는 큰애였기 때문에 어리광을 부리지 않는 게 당연했다.
유년기의 불안정한 애착관계와 사회성 미숙 때문인지 나는 늘 사람이 어려웠다. 간혹 상대에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난처할 때도 많았고,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거치며 연기를 하기도 했다. 대부분은 책이나 영화, TV 프로그램을 통해 배웠다. (2부에서 계속)
*브런치에 쓰는 글들은 재미를 위해 다소 거칠어 보일 수 있는 과장을 덧붙였습니다.
저는 엄마를 매우 사랑하고 존경한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