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지해 주는 한 사람만 있으면 살 수 있다고-2

by 겨울밤

언젠가 나는 두세 살 무렵의 내 사진을 보고는 어쩌면 내 혈통이 아프리카에서 기인하는지도 모르겠다는 확신에 가까운 생각을 했다. 악성 곱슬머리와 까만 피부, 두꺼운 입술이 그 근거였다. 어릴 적 TV를 보는 중에 광고로 “죠죠 블랙죠” 하며 방정맞게 시커먼스가 등장할 때면 그렇게 거슬렸다. 광고 횟수가 잦으면 은근히 신경 쓰였다. 고만한 나이대의 애들이 보는 프로그램은 대체로 비슷해서 혹시나 언 놈이 저 광고를 보고 내일 학교에서 날 놀리지나 않을까 걱정했다. 다행인 건 지금의 내 키가 초등학교 때 키라 남자애들은 나를 섣불리 건드리질 못했다. 한번은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먼저 타고 있던 꼬마가 자기 엄마한테 순진한 말투로 “엄마, 저 누나도 때를 안 민 거야?”라며 물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당시만 해도 수줍은 소녀였던 시커먼스는 고개를 숙인 채 황급히 뛰쳐나갔다. 이 정도면 더 사례를 들지 않아도 내가 피부색 때문에 겪은 고초가 적지 않았음을 짐작하겠지? 다행히도 성인이 될수록 피부색은 평범한 아시아인과 비슷한 수준으로 탈색됐다. 하지만 ‘비교’를 수식어처럼 어느 말에든 잘 갖다 붙여서 공허한 대화 소재로 일삼는 어른들의 무심함은 시간이 지나도 전혀 흐릿해지지 않았다.


두 살 터울의 동생은 꽤 예쁜 편이었고 생김새만으로 어린 시절부터 어른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게다가 매사에 공격력 100인 나와는 달리 성격도 온순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눈빛만으로 동생에게 향하는 애정을 읽을 수 있었다. 한 번은 친척 어른 중 한 명이 내게 대놓고 그랬다. “예쁘면 ㅇㅇ이 예쁘지, 너가 예쁘냐?”라고. 그 말에 0.0000001초도 되지 않아 전투 게이지가 올라간 나는 “무슨 말을 그렇게 하세요?”라며 응수했다. 아이의 말에 어른은 당황했고, 이내 자리를 떴다. 내가 받은 공격은 핵폭탄급이었는데, 내가 단도로 한번 뱄다고 뒷걸음질 친 그 어른이 보인 궁색함에 분이 더 치밀었다.


그 분함은 성장기 동안 층층이 쌓인 자기혐오와 열등감, 더불어 정서적 지지자가 한 명도 없는 상태에서 가시 돋친 말들을 받아내야 했던 서러움의 발현이었다. 내 부모님은 물질적으로는 부족함 없이, 가진 범위 내에서 최대한 지원해 주려던 책임감 강하고 희생정신이 높으신 분들이었지만 정서적 지원은 서툴렀다. 정확하게는 정서적 지원의 필요를 모른다에 가까웠다. 전쟁통에서 태어난 그들에게 정서적 교류는 사치였고, 생존이 우선이었다. 부모님이 돈을 벌어 끼니를 제때 제공하고, 안락하게 쉴 공간을 만들어줬으면 그다음은 스스로 해야 했다. 어쩌면 말이 트고부터 글자를 읽는 것에서부터 뭐든 알아서 하던 첫째라 더 믿고 그랬을는지도 모른다. 속상한 일을 속상하다 말할 수 있었다면 덜 곪았으려나. 여튼 당시엔 속을 털어놓는 법조차 몰랐던지라 꾹꾹 눌러 담거나 회피하는 식으로 시간을 넘기곤 했다.


성인이 되고 처음 연애를 시작했을 당시, 남자친구이던 사람은 나와 있을 때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라 말했다. 충격이었다. 당시만 해도 사회화가 거의 안 되었던 나는, 감정을 어떻게 드러내는지 어떤 식으로 대화를 주고받아야 하는지 잘 알지 못했다. K-장녀 특유의 엄격함과 냉랭함만 가득했기 때문에 남자친구는 늘 내 눈치를 보기 바빴다. 그러다 스물셋이 되던 해에 만난 사랑이 많은 남자친구 덕에 나는 감정을 교류하고 표현하는 법을 서툴게나마 배우게 됐다. 사랑받는다는 느낌도 알게 됐다. 대체로 연애 상대는 상중하 중 중상에 가까운 내면을 지닌 사람들이어서 그들을 만나면서 나는 많이 밝아졌다(안타깝게도 나를 만나서 어두워진 사람도 있긴 했다. 어두워진 사람이 좀 더 많았던 것 같기는 하다).


마흔이 넘어 이 나이에 과연 연애가 가능하려나 싶던 때에 지금의 남자친구를 만나게 됐다. 이 사람은 지금까지 내가 만난 사람 중 베스트 오브 베스트였다. 우선 말을 예쁘게 했다. 사람 기분 나쁘게 말하는 데는 어디 가도 뒤지지 않을 나와 달리 그는 말투가 부드럽고 하는 말도 고왔다. 사귀기 시작한 첫 주 주말 전날, 데이트를 앞두고 그는 다음날 만나서 논의할 게 있다고 했다. 뭐길래 논의라는 단어를 써가며 진지하게 말을 할까 궁금했다. 다음날 그가 내 얼굴을 보자마자 꺼낸 얘기는 ‘호칭 정리’였다. 아무리 동갑이어도 연인 사이에 ‘너’라고 부르는 건 좋지 않다며 서로를 어떻게 부를지 정하자는 것이었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문제의식이었다. 애칭을 붙이기에는 아직 서먹한 관계였던 우리는, 낯 간지러웠지만 서로를 ‘자기’라고 부르기로 했다. 태어나 입 밖으로 처음 내뱉는 호칭이었고 쉽사리 말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초반엔 주어를 생략하고 부르곤 했었다.


그는 그게 뭐든 늘 내가 먼저였고, 시선은 늘 나를 향해 있었다. 어디 금이라도 갈까 덩치 큰 성인인 나를 그저 애지중지 챙겼다. 무심함이 몸에 밴 내가 그 무심함을 고쳐야겠다 마음먹을 만큼 그는 세심하고 따뜻했다. 결정적으로 그가 감자탕에 들어 있는 뼈다귀의 살을 발라서 접시에 담아 내게 주던 날, 나는 완전히 무장해제 되고야 말았다. 이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가 그의 존재에 더 큰 고마움을 느낀 건 최근 정신적으로 많이 약해졌을 때다. 아마 그가 없었더라면 나는 삶에 대한 의지를 어쩌면 잃었을지도 모른다. 살아온 그간의 시간을 돌아봤을 때 나는 앞으로의 날들이 딱히 기대되질 않았다. 청소년기부터 지금까지 인생의 변곡점이라 할 만한 큰 사건을 몇 번 겪어본 바에 의하면, 인생은 마지못해 사는 날들로 촘촘하게 이루어지다가 듬성듬성 오는 최악의 순간에 무너지다가 어쩌다 왔거나 올지 모를 행운을 기다리며 누가 더 오래 버티냐의 싸움 같았다.


매주 주말이면 보곤 하던 그는 삶에 대한 어떤 의욕도 없던 나를 슬프게 감싸안았다. 돈은 벌지 않아도 되니 건강을 위해서라도 움직여보자고 조심스레 다독였다. 동생은 지금도 간혹 남자친구의 그런 태도에, “ㅇㅇ오빠 눈에만 작고 소중한 ㅇㅇ”라며 살가운 농담을 던진다. 그는 우리 둘만 행복하게 살면 되지 않겠냐며 자기는 그저 나와 맛있는 거나 먹고 즐겁게 사는 것 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언가가 되고 싶고 허상과도 같은 성공만을 꿈꾼 내게 그의 말들은 작은 균열을 일으켰다. 그제야 내가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과 맛있는 음식을 나눠 먹으며 하루를 무탈하게 보내는 것을 생각하며 산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날 이후로 마음을 달리 먹게 되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도 더는 누워 있지 말자 다짐했다. 다짐이 실천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렸지만 다짐을 반복하는 것만으로도 효과는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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