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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네맘 천준아 Jul 16. 2022

신촌 ‘홍익문고’- 소중한 가치를 지키는 사람들



입춘이 지났지만, 여전히 봄은 저만큼 있다. 신촌 연세로를 걷는다. 쌀쌀한 날씨에도 발걸음이 가벼운 것은 개강을 앞둔 대학가의 들썩임 때문이다. 연세대학교 정문으로부터 신촌 로터리까지 이어지는 이 길엔 나 또한 애착이 많다. 근방에서 학교에 다닌 것은 아니지만 20대에 줄기차게 오가던 길이다. 90년대 중반까지 신촌은 젊음과 낭만의 핫플레이스였다. 그러다 무분별한 상업화가 가속되면서 ‘독수리다방’, 학사주점 ‘훼드라’,‘녹색극장’ 등 추억의 공간들이 경영난으로 속속들이 문을 닫았다. 물론 ‘독수리다방’은 2013년에 부활했지만 말이다. ‘홍익문고’도 2012년 재개발로 인해 퇴출 위기에 직면했다. 하지만 수많은 시민의 관심으로 살아남았는데 그 배경에는 책과 서점의 가치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평일 오후, 한산한 서점 안을 들어서니 손님들이 드문드문 서서 책을 들춰보고 있다. 동네 서점이라기엔 규모가 제법 크지만 대형서점에서 느낄 수 없는 아늑함과 고요함이 있다. 기분 좋은 정적을 만끽하며 진열대 사이를 걷는다. 흥미를 당기는 안내 문구들이 정겹다. 드라마나 영화의 원작을 모아놓은 코너에는 ‘원작이 궁금하세요?’라는 문구가, 시집 코너에는 다산 정약용의 말을 인용해 ‘그대들도 마땅히 그대들의 시를 쓰게나’라는 문구가 붙어있다. 별것 아닌 듯 보여도 구석구석 세심한 손길이 느껴진다. 이 모든 것은 홍익문고의 2대 대표 박세진 씨의 애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손님들이 들어오자마자 만나는 1층에는
일부러 시, 소설, 수필 같은 문학책과
잡지, 자기계발서 코너를 배치했어요.
어떤 손님이 오시든지 취향과 무관하게
부담 없이 펼쳐볼 수 있는 책이거든요.





홍익문고에는 지하 1층부터 지상 4층까지 오십여 만 권의 책이 있다. 그중 가장 많은 판매량을 올리는 분야는 단연 수험서나 취업, 어학 분야라고 한다. 만약 박세진 대표가 판매에 중점을 뒀다면 1층에 문학 코너를 배치할 리가 만무하다. 게다가 들어서자마자 1층 정면에는 홍익서점에서만 볼 수 있는 특별한 진열대가 있다. 나름 서점의 노른자 위치라 불러도 좋을 곳에 ‘베스트셀러’가 아닌 ‘책따세 추천도서’가 꽂혀 있다.



책으로 따뜻한 세상 만들기’라는 선생님들의 모임에서
좋은 책들을 추천해주세요.
그냥 묻히기엔 아까운 책들이 많잖아요.
판매 부수로 책의 순위를 매기는 것보다
좋은 책을 더 많이 알리는 것이
홍익문고의 가치이기도 하고요.





올해로 60주년을 맞는 ‘홍익문고’는 기념으로 작은 탁상용 달력을 제작했다. 달력의 표지에는 홍익문고가 판잣집이었던 시절의 흑백사진 두 장이 인쇄돼 있다. 지금으로부터 60년 전, 창업주 故 박인철 씨가 리어카에서 행상 형태로 헌책을 판매한 것이 홍익문고의 시작이다. 리어카 아래에 과일도 함께 놓고 팔았다. 그러다 신촌 로터리에 노점 단속이 나오면 다른 자리로 잠시 피했다가 다시 돌아오는 식이었다.

그 시절엔 너무나 가난했다. 그래서 돈을 벌 궁여지책으로 생각한 것이 헌책 판매였다. 하고 많은 장사 가운데 헌책을 택한 건 유난히 책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종로에 비해 신촌 일대에는 마땅히 헌책을 구할 수 있는 곳이 당시엔 없었다. 그렇게 노점 형태로 헌책을 팔다가 작은 판잣집의 모습을 갖춘 게 1958년, 현재 홍익문고 자리에서 옆으로 10미터가량 떨어진 위치였다.



그때는 신촌을 우스갯소리로 진촌이라고 불렀어요.
지대가 낮아서 장마철에는 늘 물난리가 났거든요.
포장공사도 안 되어 있었으니 땅도 늘 질었죠.



박인철 씨와 함께 지금의 홍익문고를 만든 아내 김영애 씨가 그 시절 신촌을 회상한다. 그녀가 박인철 씨를 만난 건 1967년의 일. 홍익문고가 판잣집 형태를 갖추고 10여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얼추 가게의 모양새는 났지만 벌이는 형편없었다. 당시 한양 공대 전기과를 한 학기 남겨두고 등록금이 없어 졸업을 못 하던 박인철 씨에게 돈을 쥐여준 것도 그녀였다. 하지만 박인철 씨는 학교 정문 앞까지 갔다가 번번이 되돌아왔다. 졸업하는 것보다 그 돈으로 헌책을 사서 서점을 채우고 싶어 했다. 그럴 거면 등록금을 돌려달라고 그녀가 으름장을 놓자 그제야 떠밀리듯 등록을 하고 결국 졸업을 했다.




첫째 아들 세진이를 낳고 나서
얘가 복덩이였는지 서점도 잘 됐어요.
얘를 둘러업고 제가 동대문에 가서 책을 구입해 버스로 날랐지요.
그 후에 지금 홍익문고 건물 1층으로 들어왔고
차츰 한 층씩 확장하면서 세진이가 6학년이 되었을 때는
건물 전체가 우리 서점이 되었어요.



그 무렵 홍익문고를 포함해 일대에는 서점이 열 곳 이상 있었다. '알서림', '오늘의 책', 신촌서점’이 대표적이다. 홍익문고도 서울 곳곳에 분점만 5곳으로 늘릴 정도로 번창했다. 서점의 전성시대였다. 책에 대한 갈증이 넘쳐나던 때였다. 서점에서 책을 훔쳐가는 이들도 많았다. 그런가 하면 책을 몰래 가져가 헌책방에 도로 파는 이들도 숱했다. 그 시절, 서점에서 카운터를 보던 그녀는 누가 책을 가져가는지 지켜보느라 마치 형사처럼 눈이 매서워졌다고 기억을 더듬는다. 그리고 재미있는 풍경도 떠올린다. 만남의 장소였던 서점 앞에는 이성에게 어필하려고 어려운 책이나 영자신문을 들고 서 있는 이들도 많았단다. 그때 연세대학교에 다녔던 학생들 가운데는 그녀를 엄마처럼 따르던 단골손님들도 여럿이라 훗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다 같이 홍익문고로 인사를 하러 오기도 했다.              



박인철 씨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면서 홍익서점은 복덩이 큰아들, 박세진 대표가 맡게 되었다. 그에게 홍익서점에 대한 기억은 다섯 살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창기 부모님이 생활하셨던 서점 한쪽 골방에서 노래를 부르고 놀았던 기억이다. 아무래도 온통 책으로 둘러싸여 있다 보니 박세진 대표를 포함해 삼 남매는 성장하면서 자연스레 책과 친해질 수밖에 없었다. 책만큼은 재벌처럼 아낌없이 볼 수 있었지만 주머니 사정은 늘 빈궁했다.



서점이 잘 되던 시기였는데도 아버지는 제대로 된 옷 한 벌 사신 적이 없으셨어요. 당연히 저희 삼 남매에게도 돈을 쓰지 않으셨지요. 그 시절 죠다쉬 청바지가 유행이었는데 저는 입어본 적이 없어요. 늘 길거리에서 싸구려 옷을 사다 입히셨고 한번은 지우개가 없어서 신발 고무창을 잘라서 썼던 기억도 있어요.



아버지가 남겨주고 싶었던 유산은 책이었다. 삼 남매는 책과 친한 환경 속에서 다들 명문대를 졸업할 수 있었다. 박세진 대표는 연세대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L 기업에서 16년간 근무했다. 회장실을 비롯해 텔레콤, 데이콤 등을 거치며 총무, 회계, 재무, 인사까지 여러 가지 업무를 맡으며 부장까지 승진했다. 그러다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건강 악화로 인해 퇴사를 결정하게 된 것이다. 그때가 2009년이었다.





막상 아버지가 떠난 자리에 들어와 보니 아버지의 고뇌가 느껴졌다. 예전처럼 사람들은 더는 책에 대한 갈증이 없는 듯했다. 많은 것이 변했다. 사람들은 온라인으로 책을 주문했고 많은 서점이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즈음 시작된 것이 스마트폰 열풍이다. 경영학을 전공하고 대기업에서 부장까지 지낸 박세진 대표도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홍익서점이 위치한 서대문구 창천동 일대가 신촌 도시환경정비구역으로 지정되었다. 서울시와 서대문구청이 이 일대에 상업, 관광 숙박 시설 건립을 위해 재개발을 결정한 것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2, 3년 만에
갑자기 벌어진 일이라 어쩔 줄 몰랐어요.
그런데 아버지의 유언대로
제가 서점을 백 년 이상 지키겠다는 의지가 있으니까
많은 분이 도와주시더라고요.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버지가 수십 번을 본 책이 삼국지였다. 그중에 특히 사공명주생중달(死孔明走生仲達), ‘죽은 제갈량이 산 사마중달을 이긴다’는 일화는 특히 자주 말씀하셨다. 현명하게 대처하면 제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헤쳐 나갈 수 있을 거라는 의미에서 하신 얘기다. 홍익문고를 지키기 위한 박세진 대표의 노력에 많은 이들이 발 벗고 나섰다. ‘홍익문고 지키기 주민모임'으로 뜻을 함께한 시민단체들과 2천여 명의 사람들에 힘입어 서대문구청은 도시환경정비구역에서 홍익문고를 제외하기로 했다.



저와 아무런 연고가 없는 분들이 대다수였는데
저만큼이나 홍익문고에 애착을 갖고 계셔서 놀랐어요.
그 후에는 손님들이 더 감사하고 귀하게 느껴졌어요.
지금도 그때 도와주신 몇몇 분들과는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그 후 많은 시도가 있었다. 박세진 대표는 서점의 공간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자 직원들만 출입이 가능했던 홍익문고 5층을 개방했다. 지역 주민들과 함께할 수 있는 다양한 문화공연을 비롯해 강좌, 독서모임 등이 이곳에서 열린다. 또 서점 앞 인도에는 예쁜 피아노 한 대가 설치됐다. 홍익문고 앞을 지나는 누구나 연주할 수 있는 ‘달려라 피아노’. 서울시가 비영리민간단체와 함께 진행하는 것으로 기증받은 중고 피아노를 예술가의 손으로 새로 단장한 후 곳곳에 설치하는 프로젝트다. 많은 이들에게 즐거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에서 홍익문고도 기꺼이 동참했다. 비나 눈이 올 때 피아노에 비닐을 덮어둔다거나 악보를 챙기는 등 관리하는 일을 맡는다.



존폐 기로에 있었던 서점을 지역 시민들이 살렸잖아요.
어떤 식으로든 보답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저도 몰랐던 제 꿈을 발견했어요.
제가 서점을 지켜야겠다는 확신도 생겼죠.



서점의 존재 이유를 시민들이 확인해준 셈이었다. 50년간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군 서점이 앞으로 100년을 향해 갈 수 있는 에너지가 되었다고 할까. 그래서 어찌 보면 홍익문고의 역사는 이제 다시 시작이라고 할 수 있었다. 해서 박세진 대표는 서점에 ‘100년 서점 홍익문고’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그리고 ‘소중한 것은 시간을 넘어 이어진다’는 캐치프레이즈도 만들었다.

모든 것이 새롭게 시작되었지만, 그렇다고 서점을 세련되게 바꾸거나 하지는 않았다. 여전히 3, 4층에는 아버지가 생전에 직접 주문 제작한 낡은 책꽂이가 그대로 있다. 모르는 이들은 서점의 구식 인테리어를 지적하기도 한다. 하지만 박세진 대표는 그 또한 오래된 서점의 자부심으로 여긴다. 아버지의 흔적을 남겨둠으로써 아버지가 당부했던 말씀들을 잊지 않으려는 마음도 있다.



홍익문고의 이름은 아버지가 지으신 건데
사람들은 근처에 홍익대가 있어서 홍익이라고 지은 거냐고 묻거든요.
그게 아니고 ‘홍익인간’ 할 때의 홍익입니다.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한다는 의미에요.



아버지는 박세진 대표에게 100년까지 이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려면 네 가지를 소중히 해야 한다는 말씀도 했다. 네 가지란 고객과 직원, 거래처, 그리고 가족이다. ‘홍익’을 이루려면 먼저 내가 만나는 주변의 사람들부터 챙겨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철학이었다.

생전 박인철 씨는 청아출판사 대표, 지역의 유지들과 뜻을 모아 정기적으로 독거노인, 소년소녀가장, 다문화가정을 돕는 기부를 실천했다. 물론 지금은 박세진 대표가 아버지의 유지를 이어 기부를 계속하고 있다. 그리고 서점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직원들을 줄이지 말라는 말씀도 잊지 않았다. 현재 홍익문고에는 총 18명의 직원이 있는데 이들 중에는 30년가량 근무한 직원도 있고, 평균 10년이 넘은 직원도 여럿이다. 그들을 위해 5층에는 점심과 저녁 식사를 챙기는 식당이 있고, 매년 두 차례 급여 인상과 더불어 근무한 지 오래될수록 특별한 우대 제도도 있다.



아버지가 생전에 신촌에 넓은 공간을 하나 얻어서
가난한 사람들 밥 좀 먹였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거든요.
젊은 시절 리어카로 헌책을 팔면서 많이 굶으셨다고 들었어요.
당신이 배고픔의 서러움을 아시기 때문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각별하셨던 것 같아요.



연세대, 이화여대, 서강대, 홍익대가 인접한 대학가에 유일하게 남은 서점이 홍익문고다. 하지만 해마다 책을 구매하는 사람들은 줄어들고 있다. 직접 피부로 느끼는 체감은 실로 대단하다. 박세진 대표가 홍익문고를 운영하기 시작한 10년 전보다 20%나 감소했다고 한다. 서점이 마치 연탄가게가 된 것 같은 기분이다. 사람들이 쓰지 않는 불필요한 물건을 팔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했다. 여기에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신촌, 홍대 주변의 많은 상권이 변했고 변하고 있다. 홍익문고의 지하와 1층을 프랜차이즈 커피숍으로 내주고 다른 층 역시 임대를 한다면 지금보다 몇 배나 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연탄은 다른 것으로 바뀔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책은 대체할 수가 없어요.
책이야말로 세상을 끌고 가는 힘이에요.
그리고 홍익문고는 아버지가 물려주신 가보라고 생각해요.
가보가 낡았다고 팔지 않잖아요.
가보는 갈고 닦아 잘 보존하는 거예요.



책과 서점의 필요성에 대해 스스로 이해하지 않으면 경영하기 버겁다. 얼마든지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시류에 편승할 수 있으니 말이다. 박세진 대표는 아들에게 가보를 물려줄 생각이라고 한다. 임대업을 물려주느니,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서점을 물려주는 것이 얼마나 멋지냐고 그는 말한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으로 정보를 얻고 온라인 서점에서 필요한 책만 구매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서점에 와서 이것저것 훑어보다가 만나는 책은 특별하다. 내가 모르던 관심 밖의 분야를 만나는 의외성이 있다. 그것이 서점을 찾는 사람들만이 아는 매력이다. ‘월든’의 작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말했다. ‘한 권의 책에서 삶의 새 시대를 본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고. 나 역시 올해는 자주 서점에 나가보리라 마음을 먹는다. 책장 사이를 기웃거리다가 뜻밖의 책을 만나는 기쁨을 만끽해 보고 싶다.



_글,사진| 천준아

_서울문화재단 <서울, 人에게 묻다> (2016-2017년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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