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의 칼바람이 매서운 1월, 광화문 광장에 섰다. 해가 바뀌었지만, 우리를 휘청하게 만들었던 국정 농단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애간장이 탄다. 하루라도 빨리 시원하게 ‘속풀이’ 할 수 있길 염원할 뿐이다. 시끄러운 속과 어지러운 머리엔 ‘해장’만 한 것이 없다. 광화문 옆 청진동으로 걸음을 옮긴다. 재개발 이전 피맛골이었던 이곳엔 오래된 해장국집이 있다. 지금은 르메이에르 빌딩의 1층으로 이전한 ‘청진옥’이다. 1937년부터 지금까지 3대에 걸쳐 서민들의 쓰린 속을 달래주고 있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인데도 손님들이 제법 많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나무틀이 격자로 된 창문과 나무 테이블까지 옛 추억에 잠기게 하는 인테리어가 정겹다. 이곳이 고층빌딩의 1층이었음을 순간 잊어버렸다. 피맛골 시절 ‘청진옥’을 가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오랜 단골들이 하루라도 빨리 적응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인테리어에 고심했다는 3대 최준용 대표를 만났다.
점심시간이 한참 지난 시간인데도 손님들이 제법 많다. 미닫이문을 열고 들어서자 나무틀이 격자로 된 창문과 나무 테이블까지 옛 추억에 잠기게 하는 인테리어가 정겹다. 이곳이 고층빌딩의 1층이었음을 순간 잊어버렸다. 피맛골 시절 ‘청진옥’을 가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이런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짐작해 본다. 오랜 단골들이 하루라도 빨리 적응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인테리어에 고심했다는 3대 최준용 대표를 만났다.
24시간 열려있지만 점심시간에는 직장인들,
오후엔 연세 드신 단골손님들이 많고요.
저녁에는 주로 2차, 3차로 오시고
새벽에는 늦게 귀가하는 분들과
일찍 출근하는 분들이 함께 있어요.
‘청진옥’해장국을 처음 먹는다. 뚝배기 한가득 소 내장과 선지, 우거지가 푸짐하다. 무엇보다 구수한 국물 냄새가 기가 막힌다. 사골을 24시간 우려내 된장으로 간을 한다는데 그래서 이렇게 깊고 진한 냄새가 나나 싶다. 첫술을 들기 전부터 국물 냄새 하나로 포만감이 든드는 것을 보니 80년이라는 세월 동안 사랑받는 이유가 이해가 간다.
‘청진옥’의 시작은 1937년 일제강점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땔감으로 군불을 때고 밥을 짓던 시절 청진동에는 나무 시장이 있었다. 지금의 경기도 고양시에서 땔감용 나무를 한가득 짊어진 나무꾼들이 무악재를 넘어 새벽녘 청진동으로 모여들었다. 밤길을 걸어 도착한 새벽시장에서 주린 배를 채워준 것은 ‘평화관’의 국밥이었다. 그것이 ‘청진옥’의 첫 이름이다.
나무꾼들이 막걸리에 국밥을 먹었는데,
그러다 보니 술국으로 불리게 되고,
그렇게 해장국이 되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평화관’이라는 이름 자체가
국밥, 술국을 파는 곳이라고 하기엔 거창해서
‘청진옥’으로 상호를 바꾼 것이 해방 전후라고 하더라고요.
시장 한쪽에 천막을 쳐놓고 허기진 나무꾼들에게 국밥을 팔았던 청진옥의 1대 최동선, 이간난 부부. 먹을 것이 귀한 시절이라 술국의 주재료는 소의 부산물과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우거지였다. 점차 입소문이 나면서 천막은 가게 모양을 갖추게 되었고, 2층짜리 가게가 된 것은 1960년대, 그리고 70년대 들어서 가게 옆에 살림집도 차리게 되었다. 그곳이 종로구 청진동 89번지. 재개발 이전 옛 청진옥이 있던 자리다.
‘청진옥’을 창업한 할아버지, 할머니의 그 시절 얘기를 전해준 것은 다름 아닌 단골손님 故 이을식 옹이었다. 무려 100세가 넘도록 한 달에 두어 번은 반드시 가게를 찾았다. 강남에서부터 청진동까지 오는 오랜 단골을 위해 최준용 대표는 친할아버지를 맞듯 드시기 좋게 손수 깍두기를 잘게 썰어드렸다. 그리고는 마주 앉아 그 옛날 ‘청진옥’이야기를 여쭤보곤 했다.
이을식 선생님은 전남도지사를 지낸 분이셨어요.
그분 말씀으로는 김구 선생님도, 윤보선 대통령도
그분이 직접 저희 가게에 모시고 왔다고 하시더라고요.
한동안 발걸음이 뜸하셔서 걱정했는데
얼마 뒤에 신문에 난 부고를 접했어요.
종종 그분 생각이 납니다.
‘청진옥’이 3대째 대물림하는 동안 단골들도 대물림이 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함께 찾았던 손님이 이제는 손자들을 데리고 함께 오기도 한다. 병상에 있는 부모님이 좋아하셨다며 포장을 해가는 손님도 있다. 결국, 80년 세월은 손님들이 만들어준 역사다.
‘청진옥’의 규모를 키운 것은 2대 최창익 씨였다. 그는 창업주인 아버지 최동선 씨를 도와 자연스럽게 가게 일을 거들다가 2대 대표가 되었다. 하지만 주위에서는 걱정 어린 시선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한량 같은 기질에 친구도 워낙 많았던 그가 가게를 제대로 돌볼 수 있을까 싶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기우였다. 그가 본격적으로 운영하면서 손님도 배로 늘었고 가게 규모도 커졌다. 한때 신문기자 출신으로 연예부 기자생활을 한 인연 때문에 당대 유명한 연예인들이 가게를 많이 찾았다. 코미디언 이주일을 비롯해 하청일, 가수 태진아와 나미 등등 내로라하는 연예인들과 함께한 ‘청진옥’의 옛 사진은 이제 가게의 가보가 되었다.
아버지는 늘 감사해야 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가족의 복이라고 하셨죠.
어린 시절부터 저희 삼 형제에게
언젠가 가업을 꼭 이어가야 한다고 은근한 압력을 주셨어요.
막연하게 삼 형제 중 누군가는 가게를 잇게 될 거로 생각했는데 그 시기가 느닷없이 찾아왔다. 밤낮으로 ‘청진옥’에 열과 성을 쏟았던 최창익 씨가 쓰러진 건 2004년 폐암 때문이었다. 손쓰기엔 너무 늦어 병상에 있는 아버지를 대신해 누군가는 가게를 돌보지 않으면 안 됐다. 당시 첫째 형은 기자생활을 거쳐 공직에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상황이었고 둘째 최준용 씨는 대학원에서 사진을 전공하고 사진 관련 일을 하고 있었지만, 형에 비하면 운신의 폭이 컸다. 일단은 가게 일을 돕다가 안정이 되면 다시 사진 일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처음에는 가게에 항상 카메라를 가지고 나왔어요.
수시로 만지작거렸죠.
한 번은 대학원 때 지도교수님이 가게에 오셨는데
제가 카메라 가방을 메고 왔다 갔다 하는 걸 보고
‘너 아직도 가지고 다니는구나’하며
흐뭇해하시더라고요.
카메라를 영영 손에서 놓게 된 것은 2005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온전히 혼자 가게를 맡게 되면서였다. 아버지는 유언으로 ‘상중(喪中)이라도 국솥의 불을 끄지 말라’ 당부했다. 그만큼 가게에 남다른 애착을 보인 아버지에게 누가 될까 3대 최준용 씨의 어깨는 무겁기만 했다고 한다. 한데 가게 일이 채 손에 익기도 전에 피맛골 재개발 결정이 났다. 2008년의 일이다. 청천벽력 같았다. 서둘러 가게를 이전해야 했다. 인근에서 좋은 가게 터를 물색했지만 땅값이 터무니없이 올라 쉽지 않았다. 종로3가까지 둘러보았지만 마땅한 곳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때가 고비였어요.
하루에도 몇 번이나 도망가고 싶었어요.
내가 왜 가게를 책임진다고 했을까 후회를 했죠.
막막했습니다.
하지만 청진동을 떠날 수는 없었다. 해서 급한 대로 지금의 르메이에르 빌딩 1층으로 가게를 이전한 것이다. 처음에는 단골손님들도 어리둥절해 했다. 재개발로 인해 주변 환경이 급작스럽게 변해버린 것이다. 전혀 다른 동네가 되었다. 그 옛날 해장국 골목의 정겹던 분위기도 대형 빌딩들 틈에서 길을 잃었다. 백 년 가게를 꿈꾸던 ‘청진옥’의 앞날도 캄캄하기만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공들여 쌓은 가게잖아요.
백 년 이상을 바라보려면
남의 가게에서 임대료를 내면서 장사할 수는 없거든요.
계약을 연장하면서 비싼 임대료를 내는 것도 부담이고
그렇다고 매번 가게를 옮겨 다닐 수도 없고요.
지난해, 최준용 대표는 종로구청 앞에 ‘청진옥’ 신관을 열었다. 본관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현재 본관의 계약 기간은 2년 남짓 남았다. 2년 뒤엔 어찌 될지 알 수가 없는 노릇이다. 해서 먼 훗날을 위해 온전히 ‘청진옥’만을 위한 가게를 마련한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가게를 물려받고 12년 만이다.
최준용 대표에게 ‘청진옥’과 관련된 어릴 적 기억은 네다섯 살 때부터다. 가게라기보다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살던 집이었다. 된장으로 간을 한 해장국은 어린아이가 먹기에도 무리가 없었다. 그 후 수시로 가게를 오가며 아버지,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다. 옆에서 지켜본 음식 장사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최준용 대표도 물려받으면서 나름 각오를 했다. 하지만 때때로 각오를 뛰어넘는 상황들이 펼쳐졌다.
해장국이 주된 메뉴이니 대다수 손님이 취객이다. 거나하게 취한 손님들이 직원들에게 하릴없이 시비를 걸었고 제 스트레스를 가게에서 풀었다. 개중에는 상습적인 단골들도 여럿이다. 그래도 손님이니 당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힘에 부쳤다. 아버지가 새삼 존경스러웠다.
음식 장사의 고단함은 맛에 대한 평가에 있는 것 같아요.
재개발 후에 이곳으로 이전하고 나서는
10명 중 9명은 맛이 달라졌다고 하시더라고요.
50여 년 동안 함께해 온 주방장도 그대로이고
달라진 것이 없는데 왜 그런 것일까,
정말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맛에 대한 얘기가 쏙 들어간 것은 이전 후 2~3년이 지나서였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국밥집 냄새가 나는 것이 관건이었다. 새 가게에 음식 냄새가 배는 건 석 달이 필요했다. 그 후엔 손님들이 이전한 가게에 적응하는 시간이었다. 아무래도 단골손님들에게 청진옥 해장국은 추억의 음식이니 말이다.
청진옥 주방에는 두 개의 대형 솥이 있다. 솥 하나에는 사골로 24시간 육수를 우려내고 다른 솥으로 육수를 옮겨와 소의 내장과 양지, 선지, 우거지를 넣고 끓이면서 된장으로 가볍게 밑간을 해서 내놓는다. 그것이 전부다. 특별한 비법이란 게 없다. 아버지로부터 가게를 물려받은 후, 최준용 대표는 하루도 거르지 않고 해장국을 먹었다. 같은 해장국에 간을 조금씩 다르게 해서도 먹어보고, 막걸리를 곁들이면 제일 맛있다는 손님 얘기에 그렇게도 먹어봤다. 어떻게 하면 해장국을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나 고민하며 1년이 지났다. 그렇게 1년을 먹다 보니 해장국이 무엇인지, ‘청진옥’의 가치가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것만 같았다. 그것은 남다른 비결이나 요령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사실 해장국의 간은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바뀝니다.
공장에서 찍어낸 맛이 아니니까요.
주방장 세 명이 교대로 하는데
2~3백 여분씩 한꺼번에 간을 보니까
각자의 컨디션과 입맛에 따라서 다를 수 있어요.
하지만 가장 좋은 재료로 만드는 것만큼은 변하지 않아요.
저렴한 재료를 쓰고 음식값을 내리면 잠시 잠깐 손님이 들끓을 수는 있겠지만 오래 갈 수는 없다. 잘 안 되는 음식점을 보면 요령을 피우고 쉽게 하는 비법을 찾는 경우가 많다. 조금 비싸더라도 맛이 좋아야 선순환이 되는 법이다. 1대 최동선 씨가 2대 최창익 씨에게 당부한 것은 좋은 재료를 쓰는 것이었다. 생일날 가족들이 둘러앉아 다 같이 먹는 음식이라고 생각하고 가장 좋은 재료를 쓰라고 말이다. 할아버지에서 아들로 그리고 손자로 이어진 그 당부만이 청진옥의 비법이자 가치다.
최준용 대표에게 ‘청진옥’ 백 년에 관해 물었다. 햇수로 80년을 맞고 보니 100년에 대한 욕심이 생긴다고 그는 말한다. 하지만 100년으로 가기 위해서는 준비할 것들이 너무나 많다. 우선 신관을 알려 나가는 것, 그리고 형제들과 함께 분점을 운영하면서 100년 이후를 모색하는 것도 고민 중이라 한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80년 역사를 만들어준 손님들에게 더 좋은 재료로 보답하는 일이라고. ‘상중(喪中)이라도 국솥의 불을 끄지 말라’던 아버지의 유언은 요즘 같은 시기에 더더욱 와 닿는다고 한다. 24시간 언제든 손님들이 끓는 속을 달래고 엉킨 머릿속을 풀 수 있게 돕는 것이 ‘청진옥’의 의미라고 말이다. 2017년은 이제 막 시작했다. 갈 길이 멀다. 어수선한 속을 ‘해장’하고 다 같이 힘을 내 보면 어떨까.
_글,사진| 천준아
_서울문화재단 <서울, 人에게 묻다> (2016-2017년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