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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네맘 천준아 Jul 16. 2022

낙원동 ‘원조 낙원떡집’ - 백 년을 하루같이 빚는 떡


세밑이다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올해유난히 여운이 남는 한해의 끝에 조금의 위안을 받을까 싶어 낙원(樂園)’을 찾는다시내 중심에 위치한 탑골공원이 흡사 도심의 낙원 같다 하여 일대에 붙여진 이름이 낙원동이다해는 더 짧아졌고 바람은 더욱 거세게 분다이런 때 낙원상가 주변은 더욱 을씨년스럽다건물의 1층이 자동차 도로로 사용되기 때문일까건물 벽으로 드리워진 도로의 그늘이 짙다그 도로 사이로 얼핏 스치며 보았던 낙원떡집을 안국역에서 거슬러 간다운현궁을 지나니 저 멀리 낙원상가 옆에 보란 듯이 낙원떡집이 시야에 들어온다.





2016년 세밑인 데다 2017년 새해를 맞는 시점이라 유난히 바쁠 것으로 생각했다. 한데 뜻밖에 한산하다. 몇몇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는 4대 김승모 대표를 만났다. 예전 이맘때면 떡집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는데 그것도 옛말이 된 모양이다. 연중 떡이 가장 많이 나가는 시기를 여쭤보니 추석, 그다음이 구정, 그리고 석가탄신일 순이라고 한다.


예전 같으면 회사마다 연말에
직원들에게 떡을 선물로 돌렸어요.
굉장히 바빴죠.
시험을 보거나 취직을 하거나 결혼을 하면 으레 떡을 돌렸어요.
그런데 지금은 경기가 워낙 안 좋다 보니
대량 주문이 별로 없어요.



한때 낙원동에는 떡집이 즐비했다. 4대 김승모 대표 기억으로는 30년 전만 해도 일대에 열 네다섯 곳의 떡집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4곳만 남았다. 낙원동이 떡집으로 유명해진 이유는 1910년 한일병합조약 이후 궁 밖으로 쫓겨난 수라간 나인들이 낙원동에 모여 궁중 떡을 빚어 팔기 시작하면서부터다. 일제강점기 당시 외 증조할머니인 ‘고이뻐’씨는 어려운 형편에 수라간 상궁들이 만든 떡을 가져다 낙원 시장에서 파는 행상일을 시작했다. 그러다 어느 상궁에게 직접 떡 만드는 기술을 배워 문을 연 것이 ‘낙원떡집’이다. 정확한 연도는 알 수 없다. 다만 김승모 대표가 들은 얘기로는 2대 김인동 할머니가 태어난 1919년에도 이미 떡집이 있었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잖아요.
하루하루 생계를 위해 떡을 만들어 파셨을 텐데
정확한 연도를 기억하는 게 힘들지 않을까요?
아마 외 증조할머니가 창업하신 건
그 이전이었을 거라 짐작하지만,
할머니가 태어나신 1919년을 낙원떡집의 시작으로 정했어요.





해방 이후, 2대 김인동 씨가 낙원떡집을 물려받았다. 셋째 딸이었던 그녀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말주변도 좋고 배포가 남달라 장사하는 법을 알았다. 그보다 마음 씀씀이가 유난히 크고 인정이 많았다. 거지가 찾아와도 빈손으로 보내지 않았고 고등학교 때문에 지방에서 서울로 올라온 큰아들의 친구들도 집에서 손수 먹이고 재우기까지 했다. 떡 맛도 일품이었지만 대가 없이 베푼 덕이 컸던 탓인지 낙원떡집은 숱한 떡집 가운데서도 날로 입소문이 났다. 청와대는 물론이고 故 정주영 회장을 비롯한 김종필 씨 등 정∙재계 인사들이 들르는 단골 떡집으로 유명했다. 하지만 어느 손님이 오든 항상 팔던 떡을 그대로 드리는 것이 전부다. 이처럼 낙원떡집에서는 유명하거나 높은 직책에 있다거나 혹은 대량 주문을 한다고 해서 특별한 손님은 아니다.



십여 년이 넘도록 매일 밤 9시에서 10시 사이에
방문하는 개인택시 기사님이 계세요.
아마 저녁을 택시 안에서 인절미로 때우시는 것 같아요.
특별한 손님은 그런 분들이세요.
3천 원짜리 인절미 한 팩이라도 자주 찾아주시는 분들이
낙원떡집의 특별한 손님이죠.



2대 김인동 씨는 자식 교육에도 열과 성을 쏟았다. 4명의 자녀 가운데 맏이였던 3대 이광순 대표를 제외하곤 모두 서울대, 연세대 등 명문대를 졸업했다. 떡집을 운영해서는 자녀 모두를 뒷바라지할 수 없어 맏딸인 3대 이광순 대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어머니를 도와 떡집을 운영했다. 현재 낙원떡집 간판에 걸려있는 곱디고운 이광순 대표의 사진은 지금으로부터 30년 전의 모습이다. 그 후 떡집을 운영하느라 여러 차례 고관절 수술과 허리디스크 수술을 하다 보니 칠순이 훌쩍 넘은 지금은 몸이 많이 망가졌다. 


어머니의 희생이 커요. 
떡을 일일이 만들어야 하니까 손의 관절이고 허리고 남아나질 않죠. 
저를 임신했을 때도 주문받은 떡을 만드느라 
연일 떡집에 계실 수밖에 없었거든요. 
그러다가 출산이 임박했는데 당시엔 통행금지가 있었기 때문에 
결국 새벽에 경찰차가 떡집에서 어머니를 
병원으로 데리고 가는 소동이 벌어졌다고 하더라고요.





올해로 12년째 낙원떡집을 맡은 4대 김승모 대표는 서울대학교 사범대 출신이다동기생 가운데 14명이 교수이고, 3명은 장학사가 되었다그도 얼마든지 교직에 몸담을 수 있었다하지만 모든 결정은 3개월의 교생실습이 바꾸어 놓았다막상 학생들을 마주하니 입시 위주의 교육시스템 안에서 과연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 들었다고 한다교육은 절대적으로 사명감과 통해야 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교직을 그저 직업으로 보고 고수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물론 대다수 사람이 저처럼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압니다.
그런데 좋아하는 마음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건 내 길이 아니다 싶었죠.



그는 처음에 비즈니스호텔을 운영했다. 그러다 12년 전에 자연스레 떡집 운영도 함께 하기 시작했지만 호텔업은 저녁부터 바쁘고, 떡집은 새벽부터 바쁘다 보니 도통 쉴 틈이 없었다. 해서 호텔 운영을 접고 떡집을 이어받았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떡집은 가업이라기보다는 그저 일상에 가까웠다. 어린 시절 연탄불로 떡을 찌던 화로 옆에서 고사리손으로 바쁜 일손을 돕던 기억이 여전히 생생하다. 유년을 되새김해보면 그 자리엔 늘 바쁜 어머니와 아버지의 모습이 있다. 학교 시험이 언제인지, 소풍이 언제인지 부모님은 항상 몰랐다.


원망하지 않았어요.
너무나 힘들게 일하시는 걸 눈으로 봐왔거든요.
저희 형제들은 밤이나 대추, 잣 같은 부재료 손질을 굉장히 잘해요.
늘 저희도 옆에서 도왔으니까요.
그런 상황이 오히려 독립심을 키우는 데 도움이 됐어요.




1919년부터 시작했으니 97년째 이어져 온 떡집인 셈이다. 오랜 세월에 걸맞게 낡은 물건들도 낙원떡집 안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여전히 사용하고 있는 나무금고는 언제 만들었는지도 모를 만큼 나무판자를 몇 번이고 덧댔다. 게다가 인절미를 썰어주는 칼은 얼마나 쥐었는지 손잡이 가운데가 움푹 들어간 데다 넓적했던 칼날도 닳고 닳아 너비가 좁아졌다. 4대 김승모 대표는 떡집을 이어받으면서 오래된 떡집의 유물은 남겨두되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고 자각했다. 바로 낙원떡집을 대표할 로고를 만드는 일과 상호등록을 하는 일이었다.



그냥 검정 비닐봉지에 떡을 담아줬어요.
저건 아니다 싶었죠.
낙원떡집 로고를 만들고 쇼핑백과 봉투, 떡 담는 포장재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정식으로 낙원떡집 상호와 상표 등록을 했어요.
그러면서 알게 된 건데
전국에 낙원떡집이 400여 개가 있더라고요.



해외를 제외하고 전국에만 400여 개의 낙원떡집이 존재한다. 그것만으로 충분히 낙원떡집의 가치가 입증된 셈이다. 더는 예전의 규모로 운영해서는 미래가 없다는 판단이 섰다. 조금 더 규모를 키워서 발전적인 방향을 모색하고 싶어서 인사동에 분점을 냈다. 낙원떡집이 문을 연 이래, 80년 만의 일이다. 그리고 기존대로 한 팩씩 같은 떡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손님들이 먹고 싶은 떡을 낱개로 골라 한 팩에 담아 판매하는 새로운 전략을 시도했다.


사실 귀찮은 일이에요.
그런데 생각해보면 같은 떡을 한 팩 모두 먹기가 힘들거든요.
인절미도 먹고 싶고, 절편도 먹고 싶고,
송편도 먹고 싶고 그렇단 말이에요.
그런 식으로 판매하니까 손님들이 굉장히 좋아하세요.




평생 떡집을 들락날락했던 김승모 대표지만 막상 운영하다 보니 부딪침이 많았다. 거의 매달 별별 일이 터졌다. 한번은 하필 잣 알레르기가 있다는 손님에게 잣이 든 것도 모르고 떡을 판매했다가 난리가 났었다. 또 한 번은 어느 기업 행사 때 시루떡을 2단으로 쌓아 달라는 부탁을 받아 손수 시루떡을 일일이 쌓아서 가져갔는데 떡이 너무 뜨겁다 보니 도착했을 때는 다 주저앉아 엉망이 되어버렸다. 이런 실수들은 모두 시간과 경험에 비례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대책 없는 손님들도 많다. 떡을 먹다가 치아가 깨졌다고 손해배상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매달 한 명씩은 꼭 있다.


어느 날 경찰서에서 연락이 왔어요.
가게를 돌아다니면서 몇십 만 원씩 갈취하는 사기꾼을 잡았는데
조사하다 보니 낙원떡집에서도 돈을 뜯어낸 사람이라고.
다 유명세 때문에 겪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음식물 배상보험을 들었어요.



우여곡절을 겪으며 김승모 대표가 알게 된 가장 중요한 가치는 떡을 제대로 만드는 일이다. 현재 낙원떡집은 낙원동 1번지 공장에서 8명의 종업원이 새벽 4시부터 작업해 점심 즈음 모든 떡을 만들어낸다. 미리 주문받은 것이 있다면 자정부터 시작한다. 하지만 예전에 비하면 떡 제조 방법도 많은 부분에서 바뀌었다. 가장 큰 변화는 화력과 기계다. 과거 연탄으로 떡을 쪘던 것이 석유, 도시가스 순으로 바뀌고 최근에는 전기보일러를 이용한 수증기로 떡을 찐다. 그리고 예전에 큰 대야에 쌀을 담아 사람 손으로 직접 쌀을 씻던 것이 이제는 쌀 세척기가 있어 편해졌다. 또 쌀을 빻아 가루로 만드는 기계는 물론이고 떡을 치는 펀치 기계에 완성된 떡을 포장하는 기계까지 있으니 손이 확실히 덜 가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전 과정을 자동화할 수 없는 것이 바로 떡이다.


쌀을 빻는 건 기계가 해줄 수 있지만,
그 과정을 오롯이 전문가가 지키고 서서 봐야 해요.
밀가루는 강력분, 중력분으로 나오잖아요.
하지만 쌀가루는 직접 만들어야 합니다.
같은 시간으로 쌀을 불려도 매일 기온이 다르고 습도가 다르잖아요.
그렇다 보니 직접 쌀가루를 만져보고
더 빻을까, 덜 빻을까, 곱게 쓸까, 두껍게 쓸까,
일일이 레버 간격을 결정해야 합니다.
그게 가장 힘들고 노하우가 요구되는 기술이에요.



매뉴얼이 없다. 같은 요리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최대한 기계의 힘을 덜 빌리는 것이 좋은 떡을 만드는 가치다. 혹자는 낙원떡집의 떡이 예쁘지 않다고 핀잔을 준다. 모양도 아기자기하고 색깔도 알록달록한 떡을 만들 수 없냐고. 김승모 대표의 생각은 다르다. 그는 모양은 부차적인 것이라 못 박는다. 제대로 된 쌀가루를 만들어 떡을 빚는 것이 근간이라고 말한다. 그다음으로 중요한 것이 수증기로 얼마나 쪄내는가 하는 것인데, 쌀가루에 따라 매번 시간이 달라진다. 그렇게 해서 매일 만드는 떡의 종류가 40여 가지. 그 가운데서 김승모 대표가 가장 좋아하는 것도 손님들이 가장 많이 찾는 것도 ‘쑥 인절미’다. 숙 인절미는 쑥 가루가 아닌 ‘생 쑥’을 넣어서 만든다. 다른 첨가물이 전혀 없이 오로지 쑥, 소금, 쌀 세 가지만으로 만들기 때문에 입맛을 당기는 매력이 있다.


생 쑥을 씻고 말린 후에 찹쌀과 함께 통째로 넣고 돌려요.
그래서 먹다 보면 쑥의 줄기가 가끔 씹히기도 하는데
쑥 가루가 아니니까 손님들이 굉장히 좋아하시죠.





앞으로의 낙원떡집을 물었다. 김승모 대표는 ‘지금이 위기’라고 말한다. 3대 이광순 대표가 운영했을 때는 1년에 한두 번 쌀 25~30가마니를 몇 날 며칠 밤을 새워서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하지만 요즘은 그런 주문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렇다 보니 하루 평균 두 가마니 정도 만든다. 그것도 계절을 타서 여름에는 주문이 전혀 없고 그나마 행사가 많은 가을이 나은 편이다. 지금 그에게 남은 과제가 산적해 있다. 경기불황은 둘째 치고 2~30년 된 직원들이 환갑을 바라보는 나이기 때문에 낙원떡집을 영구 지속시키려면 직원의 세대교체를 이뤄내야 한다. 그리고 직영점을 넓히고 백화점에도 입점하는 등 보다 공격적인 방법을 동원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시급한 것은 바로 손님이라고 그는 말한다.


손님들이 찾지 않으면 없어져야 돼요.
붓이나 벼루를 찾는 사람이 없다면
아무리 훌륭한 장인이라도 더는 만들 이유가 없거든요.
조금이라도 이용해주셔야 살아남을 수 있어요.
시대적 흐름이라고는 하지만 좋은 날 떡을 돌리고
서로 나눠 먹는 문화가 점차 사라지는 게 안타깝습니다.



낙원떡집을 나오면서 혹시 떡의 어원이 ‘덕(德)’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동네에 잔치가 열리면 떡을 한 시루 쪄서 사이좋게 나눠 먹었던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물론 실제 어원은 ‘찌다’의 옛말 ‘떠기’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곧 새로운 해가 시작된다. 떡국 한 그릇 먹으며 나이도 한 살 더 먹고, 우리 모두 그만큼 ‘덕’을 베푸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하는 소망이다.



_글,사진| 천준아

_서울문화재단 <서울, 人에게 묻다> (2016-2017년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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