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리 탐구 06] 데카르트 vs 경험론자(로크, 흄)
저녁 무렵, 한 대학 캠퍼스의 세미나실. 청년 학생들로 가득한 공간 한쪽 스크린에는 최신 인공지능 챗봇이 띄워져 있다. 학생들은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진다.
“당신은 스스로 생각한다고 말할 수 있나요?”
잠시의 정적. 이어 화면 속 AI가 또렷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저는 주어진 데이터를 바탕으로 계산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사유’라고 부를 수 있을지는 논쟁의 여지가 있습니다.”
이 답변에 학생들은 웃음과 탄식을 동시에 터뜨린다. 누군가는 “거 봐, 그냥 계산기일 뿐이잖아”라고 말하고, 다른 이는 “그래도 우리보다 더 똑똑하게 대답하는데, 사유라고 볼 수도 있지 않나?”라며 반문한다.
그 순간, 나는 오래된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데카르트가 17세기에 던졌던 이 선언은, 불확실한 시대에 인간이 스스로의 존재를 확실히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모든 것을 의심해도 의심하는 나 자신만은 의심할 수 없다는 역설. 그 한 문장은 근대 철학의 서막을 열었고, 인간을 ‘사유하는 존재’로 세상에 다시 세웠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청년 세대가 서 있는 자리는 다르다. ‘나는 생각한다’는 고백은 여전히 유효한가? 아니면 AI의 알고리즘 속에서 점차 희미해지고 있는가?
오늘날 청년들의 일상은 AI와 분리될 수 없다. 강의 시간표를 짤 때도, 아르바이트 구직을 할 때도, 심지어 연애 상대를 고를 때조차 추천 알고리즘이 개입한다. SNS가 보여주는 ‘나의 취향’은 사실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수많은 데이터 패턴이 구성한 결과물이다.
한 학생은 이렇게 말했다.
“가끔은 내가 무언가를 ‘선택한다’기보다, 이미 AI가 정해둔 선택지 안에서 움직이는 것 같아요.”
이 고백은 가볍게 들리지 않는다. 자율적 판단이 점차 데이터의 유도 속에서 흐려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여기서 질문이 다시 고개를 든다.
“나는 진짜로 생각하는가, 아니면 누군가의 계산된 선택을 따라가는가?”
이 문제는 낯설지 않다. 사실 고대와 근대를 거쳐 철학자들은 줄곧 이 질문을 다뤄왔다. 데카르트는 “명석판명한 인식”이라는 기준을 세우며 인간 사유의 확실성을 강조했다. 반면 경험론자 로크와 흄은 “우리는 감각과 경험이 아니고서는 아무것도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오늘의 청년 세대는 이 두 목소리 사이에서 흔들린다. “내가 스스로 사고하는 인간인가?”(데카르트)와 “나는 결국 경험 데이터의 산물에 불과한가?”(경험론)라는 물음은 곧 AI 시대의 물음과 겹쳐진다.
특히 정체성을 찾아가는 청년들에게 이 질문은 절박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야 하는 시점에, 스스로의 선택이 데이터의 반영인지, 아니면 진정한 자기 성찰의 결과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순간이 많다. 취업 준비를 하며 AI 면접 프로그램 앞에 서면, “나는 진정한 나로 평가받고 있는가, 아니면 시스템이 원하는 모양으로 맞춰진 존재인가?”라는 의문이 생긴다.
청년 세대의 삶은 점점 더 ‘나는 생각한다’와 ‘나는 계산된다’ 사이에 놓여 있다. 바로 이 경계에서 철학의 질문이 다시 필요하다.
오늘 우리가 묻고자 하는 것은 단순히 데카르트와 로크·흄의 과거 논쟁을 되풀이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사유를 오늘의 청년 세대, 그리고 AI가 주도하는 사회에 다시 불러내는 일이다.
데카르트는 묻는다: “그대는 스스로 사유하는가?”
경험론자들은 반문한다: “그대의 사유는 결국 경험과 데이터의 산물이 아닌가?”
청년들은 덧붙인다: “그렇다면 AI의 연산과 우리의 사고는 무엇이 다른가?”
이 질문은 단순한 학문적 논쟁이 아니라, 청년 세대가 자기 정체성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와 직결된 문제다.
AI가 점점 더 똑똑해지는 시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문장은 더 이상 철학 교과서 속에만 머무르지 않는다. 그것은 청년 세대의 일상, 진로, 인간관계, 정치 참여에 이르기까지 깊숙이 스며든 삶의 물음이다.
이제 우리는 이 여정의 첫걸음을 떼려 한다. 데카르트와 경험론자들의 오래된 논쟁을 오늘의 청년 현실 속으로 불러내어, “나는 생각한다”의 의미를 다시 묻는 여정을 시작하는 것이다.
17세기 유럽은 혼돈의 시기였다. 종교 전쟁의 불씨가 꺼지지 않았고, 과학 혁명은 전통적 세계관을 흔들고 있었다. 인간은 더 이상 신과 교회의 권위만으로 세상을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가 무엇을 확실히 알 수 있는가?”라는 근본적 질문은 철학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바로 이 자리에서 합리론과 경험론이라는 두 흐름이 갈라져 나왔다.
합리론의 대표 주자는 르네 데카르트였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방법적 회의를 통해, 단 하나의 명제를 찾아냈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데카르트에게 이성은 인간 존재의 핵심이었다. 감각은 종종 우리를 속인다. 멀리 있는 건물이 작아 보이는 것도, 물속의 막대기가 휘어져 보이는 것도 감각의 오류다. 그러나 생각하는 나 자신은 결코 의심할 수 없다. 따라서 확실한 지식은 이성적 사유, 곧 ‘명석판명한 인식’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러한 사유는 수학적 정신과도 맞닿아 있었다. 수학처럼 분명한 원리 위에서 지식을 세우고 싶었던 그는, 이성만이 불확실한 시대를 헤쳐 나갈 수 있는 나침반이라고 믿었다.
데카르트 이후 스피노자, 라이프니츠로 이어지는 합리론자들은 “진정한 지식은 이성의 연역적 구조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믿음을 발전시켰다. 그들에게 이성은 불변의 토대였다.
반면 영국에서 태동한 경험론은 전혀 다른 길을 제시했다. 존 로크는 “인간의 마음은 태어날 때 백지(tabula rasa)”라고 주장했다. 우리가 아는 모든 것은 경험을 통해 쓰여진다. 즉, 감각과 경험이 없다면 지식도 없다.
데이비드 흄은 한 발 더 나아갔다. 그는 우리의 인식이란 결국 감각 인상의 습관적 연결일 뿐이라고 설명했다. 우리는 태양이 매일 떠오른다고 믿지만, 이는 필연적 법칙이 아니라 단지 반복된 경험의 기대일 뿐이다. 흄의 주장은 충격적이었다. 우리가 ‘확실하다’고 믿는 많은 것들이 사실은 경험적 습관의 결과라는 것이다.
경험론자들에게 지식은 이성의 연역이 아니라, 세계와 부딪히는 경험에서 비롯된다. 현실은 감각을 통해서만 다가오며, 그 이상은 인간의 상상일 뿐이다.
합리론과 경험론의 차이는 단순한 학문적 입장이 아니라, 인간 존재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였다.
합리론: 인간은 이성적 존재다. 확실성은 이성 속에서 찾을 수 있다.
경험론: 인간은 감각적 존재다. 지식은 경험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 대립은 이후 칸트의 비판철학으로 이어져 ‘이성 + 경험’의 통합을 모색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여전히 철학사 속에서 두 흐름은 서로 다른 목소리로 남아 있다.
이 오래된 논쟁은 오늘 청년 세대에게 새로운 무게로 다가온다.
- 합리론적 질문: “나는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가?”
→ 청년들은 여전히 자기만의 주체적 사유를 갈망한다. 내가 어떤 직업을 선택하는지, 어떤 삶을 살지 결정하는 순간, 이성적 자기 확신은 필수적이다.
- 경험론적 질문: “나의 생각은 결국 내가 겪은 경험과 데이터의 산물일 뿐 아닌가?”
→ 오늘날 청년들의 삶은 SNS 알고리즘, 빅데이터 추천, AI 필터링을 통해 경험이 ‘설계’된다. 그 속에서 ‘내 생각’이라 믿었던 것이 사실은 플랫폼이 유도한 경험일 수 있다.
즉, 데카르트와 로크·흄의 논쟁은 오늘날 “나는 생각한다 vs 나는 계산된다”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반복된다.
AI는 인간보다 더 빠르고 정확하게 계산한다. 그러나 그것이 곧 ‘생각’인가?
청년 세대는 이 물음에 직면해 있다. AI가 글을 쓰고, 음악을 만들고, 심지어 철학적 질문에 답하는 시대에, 인간만의 사유는 무엇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데카르트의 합리론은 “스스로 사고하는 나”의 중요성을 상기시킨다. 반면 로크와 흄의 경험론은 “우리가 경험과 환경의 산물일 수 있다”는 겸허한 자각을 일깨운다. 청년 세대가 자신의 정체성을 세워가려는 순간, 두 목소리는 여전히 강력한 울림을 갖는다.
합리론과 경험론은 단순한 과거의 논쟁이 아니다. 그것은 AI와 함께 살아가는 청년 세대가 자기 정체성을 어떻게 세울 것인가라는 문제와 직결된다. 우리는 여전히 묻는다.
“나는 생각하는가, 아니면 데이터가 나를 대신 생각하는가?”
이 질문을 품는 순간, 철학의 오래된 대립은 오늘날 청년들의 현실 속에서 다시 살아난다.
17세기 유럽의 지성사 한가운데, 르네 데카르트는 불안정한 시대를 헤쳐 나갈 철학적 나침반을 제시했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명령으로부터 출발했다. 당시 유럽은 종교적 갈등, 과학 혁명, 정치적 혼란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교회가 제시하는 권위도, 감각이 제공하는 세계도 더 이상 확실하지 않았다. 데카르트는 자신을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묻는다.
“도대체 무엇이 확실한가?”
데카르트는 먼저 감각을 의심했다. 눈으로 본 사물은 때때로 왜곡된다. 멀리 있는 탑이 원형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사각형일 수 있다. 손을 물속에 담갔을 때 곧은 막대가 휘어 보이는 것도 감각의 착각이다.
그는 또 꿈을 예로 들었다. 꿈속에서 우리는 마치 현실처럼 생생한 경험을 한다. 그러나 깨어보면 모두 환상일 뿐이다. 그렇다면 지금의 경험이 꿈이 아님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는가?
이 모든 회의는 급진적이었다. 심지어 그는 “악마가 나를 속이고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극단적 가정을 세웠다. 전능한 악마가 거짓 세계를 꾸며내 우리에게 믿게 만들었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모두 거짓일 수 있다.
이처럼 모든 것을 의심으로 몰아넣었을 때조차, 데카르트가 도달한 단 하나의 확실성이 있었다. 바로 “의심하는 나 자신은 존재한다”는 명제였다.
이 지점에서 데카르트는 확실한 토대를 발견했다.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말은 단순한 자기 확인이 아니었다. 그는 의심조차 사고의 한 형태임을 발견했다. 내가 잘못된 것에 속고 있다 하더라도, 속고 있는 ‘나’가 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따라서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존재한다.
데카르트는 이 깨달음을 철학과 과학의 모든 지식 체계 위에 놓을 새로운 기초로 삼았다. 수학처럼 명석판명한 확실성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는 선언은 인간이 자기 존재를 확인하는 최초의 증거이자, 모든 지식의 출발점이 되었다.
데카르트는 인간의 이성이야말로 진리의 근원이라고 확신했다. 감각은 흔들릴 수 있지만, 이성적 사유는 흔들리지 않는 기반을 제공한다. 그는 기하학적 방법을 철학에 적용하여, 하나의 분명한 원리에서 출발해 차근차근 지식을 연역하려 했다.
그의 목표는 단순히 철학적 명제 몇 개를 세우는 데 있지 않았다. 그는 불확실한 시대에 흔들리지 않는 확실한 기반을 세우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은 오직 사유하는 주체, 이성적 인간 안에서만 가능했다.
오늘날 청년 세대는 데카르트가 살던 시대와 다른 형태의 불확실성 속에 있다. AI가 글을 쓰고, 알고리즘이 우리의 취향을 설계하며, 빅데이터가 우리의 선택을 예측하는 사회다. “내 생각”이라고 믿었던 것이 사실은 SNS의 추천 시스템이 유도한 경험일 수도 있다.
이럴 때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선언은 다시금 청년들에게 울림을 준다.
- 주체적 사고의 선언: 데이터와 알고리즘이 대신 사고하는 시대에도, 사유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스스로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 비판적 사고의 힘: 단순히 소비자가 아니라, 끊임없이 질문하고 검증하는 주체로 설 때만 흔들리지 않는다.
- 정체성의 근거: 타인의 시선, 플랫폼의 피드백, AI의 답변에 앞서, “나는 생각하는 존재”라는 자기 확신이 정체성의 중심이 된다.
청년 세대는 종종 이렇게 묻는다. “AI가 나보다 더 똑똑하다면, 나는 어떤 의미로 존재하는가?”
데카르트의 답은 분명하다. AI는 계산할 수 있지만, 사유하지 않는다. 그것은 알고리즘적 처리일 뿐이다. 그러나 인간은 의심하고, 질문하고, 불안해하면서도 스스로 존재를 확인하는 주체다.
따라서 “나는 생각한다”는 명제는 AI 시대의 청년에게 이렇게 바뀌어 다가온다.
“나는 단순히 계산되지 않는다. 나는 질문하고 성찰하는 존재로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합리론은 단순한 철학적 원리가 아니다. 그것은 오늘날 청년 세대가 흔들리지 않고 자기 정체성을 세울 수 있는 힘의 원천이다. 불확실성과 데이터의 홍수 속에서도,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선언은 여전히 우리를 지탱한다.
그것은 하나의 초대다.
“그대는 단순히 계산되는 존재로 살 것인가, 아니면 생각하는 존재로 설 것인가?”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강력한 선언으로 합리론의 토대를 놓았을 때, 영국의 철학자들은 고개를 저었다. 그들은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내면에 확고한 진리를 지닌다고 보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믿었다. 그 길의 출발점에 존 로크가 있었고, 그 끝에서 회의주의에 다다른 인물이 데이비드 흄이었다.
존 로크(1632~1704)는 데카르트의 합리론을 정면으로 비판했다. 그는 인간의 마음을 “타불라 라사(tabula rasa)”, 즉 백지로 비유했다. 사람은 태어날 때 아무런 선천적 관념도 지니고 있지 않으며, 오직 경험을 통해 지식을 채워 간다는 것이다.
- 감각 경험: 우리가 세계와 접촉하는 가장 기본적 경로. 냄새, 색깔, 소리, 온도 같은 직접 경험.
- 반성(reflection): 감각 경험을 토대로 내적 작용을 되돌아보며 지식을 정리하는 과정.
로크에게 지식은 태생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습득되고 구성되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신학과 권위적 교리에 맞선 대담한 발언이기도 했다. “인간은 스스로 경험을 통해 학습한다”는 선언은 오늘날 교육학과 심리학의 기초가 되었다.
청년 세대에게 로크의 메시지:
오늘날 청년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 속에 놓여 있다. AI, 글로벌 시장, SNS 문화가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낸다. 로크식 관점에서 보면, 청년들의 정체성은 “선천적 본질”이 아니라 “경험의 총합”이다. 즉, 내가 어떤 플랫폼에서 무엇을 보고, 누구와 대화하며, 어떤 도전에 뛰어드는가가 곧 나를 정의한다.
로크의 뒤를 이은 데이비드 흄(1711~1776)은 경험론을 더욱 급진적으로 밀어붙였다. 그는 인간이 가진 지식 가운데 가장 확실하다고 믿었던 것조차 사실은 경험의 습관일 뿐이라고 주장했다.
- 인과율의 문제:
우리는 불을 보면 “뜨겁다”고, 빗방울을 보면 “땅이 젖는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흄은 이렇게 되물었다. “정말 불이 뜨거움을 ‘필연적으로’ 일으킨다고 확신할 수 있는가? 우리는 단지 불을 볼 때마다 뜨거움을 경험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원인과 결과’라는 믿음은 반복된 경험에서 생긴 습관일 뿐, 절대적 진리가 아니다.”
- 자아의 문제:
데카르트가 “나는 생각한다”를 통해 자아의 확실성을 주장했다면, 흄은 “그 자아조차 하나의 환상일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상 수많은 감각 경험과 기억이 모여 형성된 의식의 다발(bundle)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은 충격적이었다.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는 원인·결과,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확신까지도 절대적 진리가 아니라 경험적 습관이라는 것이다.
청년 세대에게 흄의 메시지:
오늘날 AI와 알고리즘은 끊임없이 “원인과 결과”를 데이터로 제시한다. 하지만 흄식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절대적 법칙이 아니라 패턴의 반복일 뿐이다. AI가 내일의 주가를 예측하거나 내 소비 습관을 맞추는 이유는 “진리를 아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과거 경험(데이터)을 학습해 습관화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청년들이 느끼는 ‘자아의 혼란’—SNS 속 정체성, 현실 속 자아, 온라인 아바타 사이의 불일치—는 흄의 ‘의식 다발론’과 연결된다. ‘나’란 고정된 실체가 아니라 경험이 쌓이며 변하는 흐름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찾고자 했던 것은 흔들리지 않는 확실성이었다. 그러나 로크와 흄은 이렇게 말한다.
“인간에게 그런 확실성은 주어지지 않았다. 우리가 가질 수 있는 것은 오직 경험과 그로부터 나온 확률적 믿음일 뿐이다.”
이 대립은 철학사에서 거대한 축을 이뤘다. 합리론은 이성의 힘을 강조하며 보편적 진리를 찾으려 했다. 경험론은 현실의 사실을 강조하며, 지식이란 결국 경험적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늘날 청년 세대는 이 오래된 논쟁 한가운데 서 있다.
- 합리론적 질문: “내가 확실히 붙잡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
- 경험론적 질문: “내가 경험하는 현실이 곧 나를 만든다. 그렇다면 어떤 경험을 선택하고 축적해야 하는가?”
AI는 엄청난 데이터를 기반으로 인간보다 빠르고 정확하게 패턴을 찾아낸다. 그러나 흄이 말했듯, 그것은 절대적 진리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습관적 연속성을 보여줄 뿐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청년 스스로가 어떤 경험을 선택하고, 그 경험을 어떻게 자기 삶 속에서 의미화하느냐이다.
로크와 흄은 데카르트의 코기토에 대항하는 듯한 새로운 명제를 남긴다.
- 로크는 말한다. “나는 경험한다, 그래서 나는 성장한다.”
- 흄은 덧붙인다. “나는 경험의 다발 속에서 존재한다.”
이는 AI 시대 청년들의 삶과 놀랍도록 닮아 있다. 취업, 연애, 공부, 사회참여, 심지어 SNS 활동까지—모든 경험이 ‘나’라는 존재를 구성한다. 확실성을 찾으려 애쓰기보다, 경험을 선택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이 곧 청년의 철학적 과제가 된다.
서울 시내 한 대학 강당. 주제는 “AI 시대, 나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청년 세대 200여 명이 모여 앉아 있다. 무대 위 스크린에는 세 인물의 초상화가 홀로그램처럼 떠오른다.
- 중앙에는 확고한 눈빛으로 서 있는 데카르트.
- 왼쪽에는 차분하지만 단호한 어조의 존 로크.
- 오른쪽에는 미소 띤 얼굴로 회의적 질문을 던지는 데이비드 흄.
사회자가 말한다.
“오늘 우리는 고전 철학자들과 함께 AI 시대의 청년 정체성에 대해 토론합니다. 자, 시작해볼까요?”
데카르트:
“여러분, 세상은 불확실합니다. AI가 예측한다 해도, 그 자체가 참임을 보장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생각하는 나’입니다. 의심조차 나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청년 여러분, 혼란 속에서 길을 잃을 때, 다시 자신에게 물으십시오. ‘나는 지금 생각하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순간, 당신은 존재합니다. 확실성의 기반은 여기서 시작합니다.”
청중 일부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곧 손을 든 한 청년이 질문한다.
청년 A:
“하지만 저희는 매일 수많은 경험을 통해 변합니다. 대학에서 전공을 바꾸거나, 새로운 프로젝트를 할 때마다 ‘나’라는 생각조차 달라집니다. 그렇다면 데카르트 선생님 말씀처럼 고정된 ‘나’가 정말 있는 건가요?”
로크:
“좋은 질문이오. 나는 데카르트 선생님의 확실성에 동의하지 않소. 인간은 태어날 때 백지와 같다. 경험이 글씨를 새기듯, 우리의 정체성도 경험을 통해 형성되지. 청년 여러분이 느끼는 정체성의 변화는 당연하다. 그것은 불안정이 아니라 성장의 증거다.
AI 시대를 살아가는 여러분은 무수한 경험 속에 놓여 있다. 온라인 강의, 해외 인턴십, 심지어 SNS 댓글 하나도 여러분의 자아를 새롭게 만든다. 그러니 ‘나는 생각한다’는 고정된 선언보다, ‘나는 경험한다, 그래서 변한다’라는 사실을 더 직시해야 한다.”
청중은 웅성거린다. 몇몇은 고개를 끄덕이며 메모를 한다.
이때 흄이 미소를 지으며 끼어든다.
흄:
“나는 더 급진적으로 말하리다. ‘나’라는 존재조차도 실체가 아닐 수 있소. 우리가 ‘나’라고 부르는 것은 사실상 기억과 감각 경험이 이어지는 의식의 다발일 뿐이오. 청년들이 SNS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자신을 표현할 때, 그것은 자아가 분열된 게 아니라, 애초에 자아가 단일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오.
그리고 인과율? AI가 미래를 예측한다지만, 그것은 절대적 법칙이 아니오. 단지 과거 데이터를 반복 관찰했을 뿐. 우리가 내일도 해가 뜰 것이라 믿는 이유도 경험이 반복된 습관 때문이오. 그러니 여러분, 확실성을 찾으려 애쓰기보다, 습관적 믿음의 한계를 자각하는 태도가 필요하오.”
청년 B가 손을 든다.
“선생님 말씀은 이해되지만, 그렇게 보면 너무 허무합니다. 아무것도 확실하지 않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요? 청년들에게는 진로와 미래가 정말 중요한데요.”
데카르트:
“보시오. 흄 선생의 말은 결국 인간을 혼돈 속에 빠뜨릴 뿐이오. 확실한 기반이 없다면 삶은 허무에 빠진다. 청년 여러분은 AI가 무엇을 말하든, 스스로의 사유를 통해 확실한 토대를 세워야 하오.”
로크:
“그러나 데카르트 선생, 지나친 확실성의 추구는 현실을 무시하는 위험을 낳소. 청년들이 경험을 통해 배우지 못한다면, 아무리 ‘나는 생각한다’ 해도 공허하지 않겠소? 경험이 없는 이성은 텅 빈 그릇과 같소.”
흄:
“그리고 경험조차 절대적 진리를 주지 않는다. 그러니 청년들이 가져야 할 태도는 겸손이오. 확실성에 매달리지 않고, 경험이 주는 습관을 인식하며 그 한계를 인정하는 것. 나는 이것이 현대 청년들에게 더 필요한 자세라고 보오.”
사회자가 청년 패널에게 발언권을 준다.
청년 패널 C:
“저희는 AI를 경험하면서 동시에 혼란을 느낍니다. AI는 저희보다 더 많은 데이터를 바탕으로 결정을 내립니다. 그렇다면 ‘나는 생각한다’라는 말은 이제 AI가 가져가 버린 것 아닐까요? 반대로 저희는 데이터를 소비하는 존재, 즉 ‘나는 경험한다, 고로 존재한다’가 더 맞는 말 아닐까요?”
데카르트:
“AI는 결코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계산할 뿐이다. 생각은 의심하고, 스스로 존재를 자각하는 행위다. AI는 자기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다. 그러니 ‘나는 생각한다’는 여전히 인간의 몫이다.”
로크:
“하지만 청년 패널의 지적은 타당하다. 오늘날 인간의 경험은 AI와 분리되지 않는다. 여러분의 검색, 클릭, 대화가 데이터로 남아 다시 여러분의 경험을 형성한다. 경험은 이제 인간과 기계가 얽힌 하이브리드 경험이 된 셈이다.”
흄:
“그렇소. AI는 단지 반복된 경험을 학습하는 존재일 뿐. 하지만 인간도 다르지 않소. 우리 역시 습관과 반복에 의존한다. 그러니 AI는 오히려 우리를 비추는 거울일지도 모른다.”
청중은 놀라움과 긴장 속에 서로의 의견을 속삭인다.
사회자가 토론을 정리하며 청년들에게 질문을 던진다.
“오늘 대화를 통해 드러난 것은, 확실성과 경험 사이의 간극입니다. 데카르트는 확실한 토대를, 로크는 경험의 힘을, 흄은 그 경험마저도 불완전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AI 시대의 청년들에게 남는 질문은 무엇일까요?”
청년 패널 D가 조용히 말한다.
“아마도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는 확실성을 붙잡는 것과 경험을 쌓는 것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찾을 것인가일 겁니다. 생각 없는 경험은 공허하고, 경험 없는 생각은 추상적이니까요.”
무대의 세 철학자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 순간, 토론장은 단순한 학문적 대화가 아니라, 청년 세대가 자신의 존재와 미래를 사유하는 철학적 장場이 된다.
오늘날 청년들은 스스로를 설명할 때 종종 “검색 기록, SNS 피드, 학습 데이터” 같은 흔적을 떠올린다. 우리는 매일 무의식적으로 AI 알고리즘에 자신을 투영하고 있다. 넷플릭스의 추천 영화, 유튜브의 자동 재생 영상, 인스타그램의 맞춤 광고는 단순한 콘텐츠 제안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취향, 성향, 심지어 정체성의 단편을 반영하는 거울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청년들의 자아가 ‘내가 생각하는 나’가 아니라 ‘데이터로 규정된 나’로 점점 옮겨가고 있다는 점이다. 데카르트가 말했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선언은, 이제 “나는 데이터화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불편한 문장으로 바뀐 듯하다.
대학을 갓 졸업한 한 청년은 이력서를 준비하면서 자꾸만 자신의 경험을 데이터화하려는 습관을 발견한다. 고용24 사이트에 입력된 자격증, 교내 비교과 활동, 프로젝트 참여 이력이 ‘정량화된 점수’로 환산된다.
그는 자신을 “생각하는 존재”가 아니라 “스펙의 총합”으로 바라보게 된다.
이 상황은 데카르트와 로크의 갈등을 생생히 드러낸다.
- 데카르트적 관점에서는 “나는 생각한다”라는 자각 속에서 진정한 자아가 형성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청년은 자기 사유보다 외부 평가 시스템에 의해 존재가 증명된다.
- 반대로 로크적 시각에서는, 다양한 경험이 청년의 자아를 새롭게 쓴다. 인턴 경험, 동아리 활동, 창업 도전 같은 경험들이 실제로 그의 성장을 이끌었기에, 데이터화된 ‘스펙’도 단순히 억압적 장치만은 아니다. 문제는 이 경험들이 지나치게 수치화와 서열화의 논리에 갇히면서, 청년 스스로가 ‘살아 있는 경험’보다는 ‘데이터 점수’로만 자신을 이해하게 된다는 점이다.
또 다른 청년은 하루 대부분을 유튜브와 인스타그램에서 보낸다. AI 추천 알고리즘은 그의 취향을 정교하게 분석해 비슷한 콘텐츠를 연속적으로 제공한다. 처음엔 단순한 재미였지만, 어느 순간 그는 자기 생각이 점점 “추천된 것”의 범위 안에 갇혀 있음을 깨닫는다.
여기서 흄의 회의적 통찰이 살아난다. 흄은 “인간의 믿음은 경험의 반복에서 나오는 습관”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청년이 매일 반복적으로 소비하는 추천 콘텐츠는 그에게 하나의 습관적 신념을 형성한다. 정치적 성향, 사회 이슈에 대한 태도, 소비 취향까지 AI가 보여주는 경험의 집합에 따라 규정된다.
그는 묻는다. “나는 스스로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알고리즘이 제시한 경험 속에서 습관적으로 반응할 뿐일까?” 이 질문은 곧 데이터 사회 속 자아의 위기를 상징한다.
최근 청년 세대의 정치 참여가 늘어나고 있다. 청년 의원들이 등장하고, 온라인 서명 운동과 SNS 캠페인이 활발해졌다. 그러나 여기에도 데이터의 그림자가 있다.
정치인들은 청년들의 요구를 직접 듣기보다 빅데이터 여론조사와 SNS 트렌드 분석에 더 의존한다. “청년이 무엇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은 청년들의 생각을 듣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 그래프를 읽는 문제로 변질된다.
이런 맥락에서 청년들은 ‘사유하는 주체’와 ‘데이터 소비자’ 사이에서 혼란을 겪는다.
데카르트적 청년이라면, 정치적 참여를 통해 스스로 사고하고 발언하며 존재를 확인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경험론적, 더 나아가 흄적이다. 여론조사라는 경험 데이터의 반복이 ‘청년의 생각’처럼 취급되면서, 청년 개개인의 목소리는 묻히고 만다.
이 사례들을 통해 우리는 AI·데이터 사회에서 청년 세대가 직면한 정체성의 세 가지 위기를 정리할 수 있다.
1. 사유의 위기 – 생각하기보다 데이터로 규정된다. (“나는 생각한다” → “나는 데이터화된다”)
2. 경험의 왜곡 – 살아 있는 경험이 아니라 알고리즘이 설계한 경험에 의해 자아가 형성된다. (“나는 경험한다” → “나는 추천된 경험을 따른다”)
3. 자아의 분산 – 흄이 말한 것처럼 자아는 의식의 다발일 뿐인데, 이제는 디지털 플랫폼 속 수많은 ‘분신 계정’과 ‘온라인 프로필’로 흩어진다.
결국 청년들은 다시 묻게 된다.
“데카르트처럼 확실한 사유의 기반을 붙잡아야 하는가? 아니면 로크와 흄처럼 경험을 인정하고 그 불완전성을 자각해야 하는가?”
데이터 사회에서 이 질문은 단순한 철학적 논쟁이 아니다. 그것은 곧 청년들의 삶과 진로, 정체성을 결정하는 가장 현실적인 과제다.
데카르트는 사유의 확실성을 붙잡으려 했고, 로크와 흄은 경험의 불가피성을 강조했다. AI와 데이터가 일상의 모든 순간을 포착하는 오늘, 청년들은 두 입장 모두의 빛과 그림자 속에서 살고 있다.
- 사유만 중시하면 현실 경험이 무시되고, 추상적 자기 확신에 갇힌다.
- 경험만 중시하면 알고리즘과 데이터 흐름에 휩쓸려 스스로의 기준을 잃는다.
결국 필요한 것은 사유와 경험을 함께 끌어안는 균형 프레임이다.
철학적 균형은 단순히 두 입장을 절충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질문을 통해 실천적 지침을 세우는 일이다. 청년들이 데이터 사회에서 스스로를 지켜내기 위해 가질 수 있는 세 가지 질문은 다음과 같다.
1. 나는 왜 그렇게 믿는가? (데카르트적 질문)
내 판단의 근거가 내 사유에서 비롯된 것인가, 아니면 단순히 ‘많이 본 것’과 ‘추천된 것’에 불과한가?
비판적 자기 성찰을 통해 확실성을 점검한다.
2. 내 경험은 충분히 다양했는가? (로크적 질문)
나의 세계관과 정체성이 소수의 경험(혹은 알고리즘이 제시한 경험)에 의해 편향되지 않았는가?
다양한 경험을 쌓고, 의도적으로 다른 관점에 노출되어야 한다.
3. 습관이 나를 지배하지는 않는가? (흄적 질문)
매일 반복되는 디지털 습관이 내 정체성을 고정시키고 있지는 않은가?
습관적 믿음과 진리 사이의 간극을 점검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철학적 균형을 시각적으로 정리한다면, 다음과 같은 피쉬본 다이어그램을 그려볼 수 있다.
- 중심 축: “청년의 정체성”
- 왼쪽 뼈대: 사유의 부족 → 자기 확신 상실, 데이터 의존, 자아의 파편화
- 오른쪽 뼈대: 경험의 왜곡 → 알고리즘 편향, 습관화된 판단, 타인의 기준 내면화
- 해결 방향: 사유와 경험을 함께 점검하는 자기 균형 습관
결국 청년 세대가 AI 시대에 가져야 할 태도는,
- 데카르트처럼 자기 사유의 기반을 놓치지 않는 것,
- 동시에 로크와 흄처럼 경험과 습관의 영향력을 인정하며 그것을 조정하는 것이다.
즉, “나는 생각한다”와 “나는 경험한다”를 모두 자각할 때, 비로소 “나는 존재한다”라는 자기 확신이 가능하다.
데카르트의 선언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Cogito, ergo sum)” ― 는 근대 철학의 출발점으로 꼽힌다. 그는 흔들리는 세계 속에서 오직 사유하는 나 자신만은 의심할 수 없는 근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AI 시대의 청년에게 이 명제는 다른 질문을 던진다.
“나는 진짜로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AI가 보여주는 정보에 반응할 뿐인가?”
검색창이 대신 답을 주고, 알고리즘이 선택지를 좁히는 사회에서 ‘사유’는 더 이상 당연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청년 세대에게 “나는 생각한다”는 단순한 진술이 아니라, 끊임없이 회복해야 하는 실천적 과제다.
청년들의 일상은 데이터로 가득 차 있다. AI가 추천하는 영상, SNS에서 떠도는 글, 뉴스 알고리즘이 보여주는 기사. 이 흐름 속에서 ‘내 생각’은 점점 줄어들고, ‘반응하는 습관’만 강화된다. 흄이 지적했듯, 습관은 인간을 지배한다. 하지만 문제는 여기 있다. 습관적 반응이 쌓이면,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능력이 위축되고 정체성마저 데이터의 거울 속에서만 확인하게 된다.
“나는 생각한다”가 아니라 “AI가 생각해 주니, 나는 따라간다”로 변질될 위험. 이것이 오늘 청년 세대가 직면한 진짜 위기다.
그러나 희망은 있다. 앞선 균형 프레임에서 보았듯, 청년은 합리론적 사유와 경험론적 현실을 동시에 끌어안는 길을 택할 수 있다.
- 데카르트처럼 묻기: “내가 지금 보고 있는 정보는 의심할 여지 없는가?”
- 로크처럼 확인하기: “내 경험은 충분히 다양하며, 실제로 검증된 것인가?”
- 흄처럼 성찰하기: “내 믿음은 단순히 반복된 습관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가?”
이 세 가지 과정을 반복하는 것 자체가 ‘나는 생각한다’의 오늘적 실천이다.
결국 청년에게 필요한 것은 철학적 시민으로 서는 일이다. 단순히 직업을 갖고 생존하는 차원을 넘어, 미래 사회의 설계자로 참여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정치에서는 단기적 선동에 흔들리지 않고, 비판적으로 정책을 해석할 수 있는 힘.
사회에서는 가짜뉴스와 과장된 담론 속에서도, 무엇이 사실인지 묻고 검증하는 태도.
개인의 삶에서는 끊임없이 “나는 왜 이렇게 선택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습관.
이것이 바로 “나는 생각한다”가 청년에게 요구하는 새로운 의미다.
21세기의 코기토는 단순히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 머물지 않는다. 오늘날 청년들이 외쳐야 할 새로운 코기토는 이와 같을 것이다.
- “나는 질문한다, 고로 존재한다.”
- “나는 경험을 검증한다, 고로 존재한다.”
- “나는 습관을 성찰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 세 가지 문장은 결국 하나로 수렴한다. “나는 끊임없이 사유하고, 경험하고, 성찰하기에 존재한다.”
청년이 이 태도를 잃지 않는다면, AI와 데이터가 아무리 거세져도 인간은 여전히 자기 자신으로 설 수 있다. 진정한 자유와 정체성은 자동화된 정보가 아니라,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