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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처럼 일하고, 기자처럼 관리하라

[Prologue]

기자는 왜 밤을 새우는가




밤 11시 50분, 편집국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모니터의 불빛 사이로 들리는 건 키보드가 부딪히는 소리와, 종이 위를 달리는 펜촉의 마찰음뿐이다.
커피는 이미 네 잔째, 머리는 무겁고 눈은 타들어간다.
하지만 누구 하나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새벽을 향해 달려가는 이들의 표정에는 피로보다 ‘의미’가 남아 있다.


기자들은 묘한 존재다.
그들은 회사원이면서도, 동시에 자유 직업인(free agent)의 본성을 지닌다.
누구의 지시 없이 스스로 주제를 찾고, 현장을 뛰며, 원고를 완성한다.
편집장의 승인 없이 나가는 기사는 없지만, 그 기사 속 문장은 오롯이 기자 개인의 책임이다.
누구에게 떠밀려서 일하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이 알아주지 않아도 ‘쓴다’.
누군가 시켜서가 아니라, 이 일을 해야만 자신이 존재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기자는 ‘직무’가 아니라 ‘정체성’으로 일한다.
이것이 다른 직업과의 결정적 차이다.
기자에게 일은 ‘고용계약’이 아니라 ‘자기서사(Self Narrative)’다.
자신의 이름으로 나가는 한 줄의 기사에 평생의 신뢰가 걸려 있고,
그 신뢰를 위해 밤을 새워 문장을 다듬는다.


이 밤샘은 단순한 근성이 아니다.
‘기자처럼 일한다’는 것은,
자신의 일에 이름을 걸고 의미로 버티는 사람의 방식을 뜻한다.
속도보다 진실을, 효율보다 신뢰를, 지시보다 스스로의 판단을 우선한다.
그래서 기자의 일터는 언제나 ‘의미의 최전선’이다.


오늘날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일하고 있는가?
AI가 문장을 쓰고, 알고리즘이 이슈를 정리하는 시대에
“인간이 하는 일”의 본질은 어디에 남아 있을까?
기자들은 그 해답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기자는 사실을 다루지만, 본질적으로는 ‘의미’를 만든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다시 배워야 할 ‘일의 문법’이다.










기자의 일터 ― 자유와 압박이 공존하는 공간




기자조직은 ‘자유’의 상징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극단적인 ‘통제와 압박’ 속에서 작동한다.
그들은 매일 마감에 쫓기고, 경쟁사보다 몇 초라도 빨리 기사를 송고해야 한다.
한 편의 기사를 놓치면 ‘사건을 놓친 기자’로 낙인찍힌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들은 ‘명령’이 아니라 ‘압박’ 속에서 더 자유롭다.


기자의 자유는 통제의 부재가 아니라, 신뢰의 결과물이다.
편집장은 기자에게 세세한 지시를 하지 않는다.
“이 사건을 어떻게 쓸지는 네 판단이야.”
이 한마디가 기자에게 주어지는 가장 큰 권한이자 책임이다.
그 신뢰를 얻기 위해 기자는 현장에서 묵묵히 증거를 모으고,
취재원의 말 사이에 숨은 맥락을 읽는다.


이 구조에는 중요한 교훈이 숨어 있다.
자율은 방임이 아니라, 책임의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이다.
자유롭게 쓸 권한을 가진 만큼, 틀릴 수도 있다.
하지만 기자는 오보(誤報)의 대가가 얼마나 무거운지를 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를 검열하고, 다시 확인하며, 끝없이 다듬는다.
이 ‘내적 통제’가 바로 진짜 자율의 기반이다.


기자조직은 겉으로는 수평적이지만, 그 안에는
보이지 않는 ‘신뢰의 피라미드’가 존재한다.
한 기자의 신뢰가 깨지면, 데스크는 그의 원고를 더 꼼꼼히 본다.
반대로, 신뢰가 쌓이면 ‘그 사람의 판단’을 그대로 믿는다.
이것은 직급이나 근속이 아니라 ‘실력과 윤리의 누적 신뢰’로 구축되는 구조다.


이 신뢰의 구조는 결국 하나의 메시지를 남긴다.
“조직의 자유는 제도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다.”
리더가 구성원을 신뢰할 때, 구성원은 스스로 통제할 수 있다.
이것이 기자조직이 수십 년간 유지해온 ‘자율형 신뢰 시스템’의 핵심이다.










기자조직의 문화 ― 수평과 신뢰의 실험실





기자조직은 위계보다 ‘역할’이 앞선다.
정식 직함은 있어도, 현장에서는 모두 이름으로 불린다.
“부장님” 대신 “부장”, “선배님” 대신 “○○ 기자.”
이 작은 변화는 단순한 호칭의 문제를 넘어,
관계의 문법을 바꾸는 실험이었다.


호칭에서 ‘님’을 뺀다는 건 서로를 직급이 아닌 동료로 인정한다는 선언이었다.
지시 대신 토론이, 명령 대신 설득이 자리 잡기 시작했다.
기자들은 편집회의에서 자유롭게 의견을 내고,
편집장은 그 의견들을 묶어 하나의 방향으로 정렬한다.
이것이 바로 ‘편집자형 리더십(Editorial Leadership)’의 원형이다.


기자조직은 팀을 쉽게 구성하고, 쉽게 해체한다.
특정 이슈가 터지면 정치부·경제부·사진부 기자가 섞여 ‘TF팀’을 꾸린다.
이슈가 끝나면 팀은 해산된다.
하지만 다음 프로젝트가 생기면, 그들은 다시 모인다.
그 사이의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구조를 기업에서는 ‘프로젝트형 조직’이라 부르지만,
기자조직에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당연한 일상이었다.


이 수평적·유동적 조직문화는
미래 기업이 추구하는 애자일(Agile) 구조의 실험실이었다.
누가 상사인지, 누가 리더인지 명확히 구분되지 않지만
모두가 ‘공통의 의미’를 향해 움직인다.
이때의 중심축은 성과가 아니라 맥락이다.
기사 한 줄의 방향이 바뀌는 이유는 “편집장이 시켜서”가 아니라,
“그게 더 진실에 가깝기 때문”이다.


결국 기자조직의 문화는 ‘진실’이라는 공통의 가치를 중심으로
모든 개인이 스스로 조율하는 자율적 생태계다.
누구도 강요하지 않지만, 누구도 방임하지 않는다.
모두가 ‘진실’이라는 공통 목표를 위해 스스로 편집하고 조율한다.


이 수평적 신뢰의 시스템은

오늘날 기업이 말하는 자기조직화(Self-organization),
또는 자기편집(Self-editing) 조직의 전조다.
기자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좋은 조직은 관리되지 않는다. 스스로 조율된다.”










기자처럼 일한다는 것 ― 이름으로 일하는 사람들





기자들은 직함이 아니라 이름으로 평가받는 직업인이다.

그들이 ‘부장’ ‘국장’으로 불릴 때보다 ‘○○일보 △△기자’로 불릴 때, 오히려 더 큰 자부심을 느낀다.
직급은 일시적이지만, 이름은 영원하기 때문이다.
기자에게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라 신뢰의 통화(currency of trust)다.
기사 한 줄에 이름이 걸려 있다는 것은 곧 “이 사실에 내 전 생애를 걸었다”는 서명과 같다.


기자들이 그렇게 자신의 이름으로 일하는 이유는,
그 이름이 바로 정체성의 단서이기 때문이다.
회사 로고보다 자신의 이름으로 기억되는 일,
그것이 기자들이 추구하는 진짜 성취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다음 기사’에 목숨을 건다.
어제 쓴 기사는 이미 과거이고,
오늘의 기사만이 자신을 현재형으로 증명한다.


그들에게 ‘일’은 생계가 아니라 자기표현의 언어다.
그 언어를 통해 세상에 말을 걸고,
그 과정에서 자신을 발견한다.
그래서 기자에게 중요한 것은 월급이 아니라 “무엇을 쓸 것인가”라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단지 주제의 선택이 아니라 자아의 선택이다.


오늘날 젊은 세대도 비슷하다.
그들은 회사보다 자기 이름으로 살아가는 경력 구조를 원한다.
“이 조직에 속해 있다”보다 “이 프로젝트를 했다”를 더 자랑스럽게 말한다.
이것이 바로 뉴커리어(New Career) 시대의 상징이다.
기자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그 길을 걸어왔다.
그들은 자기주도(Self-directed)적으로 일하며,
자신의 가치(Value-driven)에 따라 움직이는 전형적인 프로티언형 인재다.


기자처럼 일한다는 것은,
누가 시켜서 일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일한다’는 선언이다.
그들은 조직 안에 있으면서도 자기의 언어로 세상과 대화한다.
그들의 진짜 경쟁력은 속도나 정보가 아니라 ‘진정성’이다.
기자는 매일 마감을 향해 달리지만,
그 마감은 곧 자기 이름으로 진실을 증명하는 순간이다.










기자처럼 관리한다는 것 ― 편집하듯 리드하라





기자조직의 리더는 ‘관리자’가 아니라 ‘편집자’다.
그는 구성원에게 지시하지 않는다. 대신 묻는다.

“이 기사가 우리 독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이 주제를 다르게 보면 어떤 각도가 가능할까?”


질문은 지시보다 깊은 리더십의 언어다.
편집자는 구성원의 문장을 고치되, 그 사람의 ‘의도’는 살려둔다.
이는 곧 “통제하지 않고, 조율한다”는 철학이다.
기자조직에서 리더가 하는 일은
구성원의 기사를 대신 써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생각을 한 문장으로 ‘정렬’해주는 일이다.


편집형 리더십(Editorial Leadership)은
‘결정하는 리더’가 아니라 ‘해석하는 리더’의 모습이다.
그는 방향을 제시하되, 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기자들이 어떤 사안을 다루든, 편집자는 묻는다.
“이건 사실이지만, 과연 진실일까?”
그 한 문장이 기자들의 관점을 정제시키고, 기사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현대의 리더십도 같다.
리더는 팀의 시간을 조율하고, 언어를 정렬하고, 의미를 연결해야 한다.
이것은 ‘관리(Management)’가 아니라 ‘편집(Editorship)’의 영역이다.
리더는 조직을 움직이는 ‘통제자’가 아니라
의미의 흐름을 잇는 맥락의 편집자(Contextual Editor)여야 한다.


기자조직의 리더가 ‘데스크(Desk)’로 불리는 이유는 상징적이다.
그는 서류를 결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모든 기사의 맥락이 모여드는 책상 위의 중심점이다.
그의 역할은 누군가의 판단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판단을 하나의 스토리로 엮는 일이다.


결국 기자처럼 관리한다는 것은,
사람을 바꾸려 하지 않고 ‘문맥’을 바꾸는 리더십이다.
직원에게 새로운 지시를 내리기보다,
그가 이미 하고 있는 일의 ‘의미’를 다시 편집해주는 것.
그때 구성원은 통제받지 않고도 방향을 찾는다.
이것이 바로 기자조직이 수평적 구조 안에서도
정확하게 움직일 수 있는 이유다.


“편집하듯 리드하라.”
이 한 문장은 미래 리더의 윤리이자 철학이 된다.
기자의 세계에서 편집은 권력이 아니라 신뢰의 기술이다.
조직에서도 마찬가지다.
지시하지 않고도 몰입하게 만드는 힘,
그것이 편집형 리더십의 본질이다.










뉴커리어 시대의 단서 ― 기자처럼 일하는 조직이 미래다





지금 세대는 더 이상 ‘직장’을 중심으로 경력을 정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프로젝트 단위의 자율적 생애’를 살아간다.
이동과 변화는 위험이 아니라, 성장의 증거다.
이는 바로 기자조직의 작동 원리와 닮아 있다.


기자들은 고정된 팀보다는 ‘이슈 중심으로 움직이는 사람들’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각자의 담당이 있어도
큰 사건이 터지면 부서 간 경계는 사라진다.
새로운 TF가 꾸려지고, 취재가 끝나면 해체된다.
그들은 이 순환 속에서 배운다.

“협업은 구조가 아니라 리듬이다.”


이 리듬은 곧 뉴커리어 세대의 일 방식이다.
직무보다 ‘주제’, 부서보다 ‘의미’로 움직이는 사람들.
그들은 조직보다 ‘자기 성장의 서사’를 중시하며,
한 회사 안에서도 스스로의 ‘보도거리’를 찾아다닌다.


프로티언 경력태도(Protean Career Attitude)는
자기주도성과 가치지향성의 두 축으로 이루어진다.
기자는 그 전형적인 사례다.
그는 자율적으로 목표를 세우고,
조직보다 진실을 우선시하며,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시민형 경력태도(Civic Career Attitude)’의 실천이다.


뉴커리어 세대는 조직에 충성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이 일하는 ‘방식’에 충성한다.
기자처럼,
그들은 스스로 주제를 정하고,
의미를 찾아가며,
결과보다 과정의 투명성을 중시한다.


결국 미래의 조직은 기자조직처럼 변해야 한다.
수평적 신뢰, 프로젝트 단위의 순환, 자율과 책임의 균형,
그리고 의미 중심의 리더십.
이 네 가지가 결합될 때, 조직은 스스로 움직이는 생명체로 진화한다.
더 이상 ‘관리’가 아닌 ‘조율’,
더 이상 ‘성과’가 아닌 ‘의미’가 중심이 된다.


기자조직은 오래전부터 이 길을 걸어왔다.
그들은 상명하달보다 ‘편집 회의’로 일했고,
성과지표보다 ‘신뢰’로 평가받았다.
기자처럼 일하고, 기자처럼 관리하는 조직,
그것이 곧 미래 조직의 모델이다.










의미로 버티는 사람들




기자라는 직업은 늘 모순 위에 서 있다.
자유와 통제, 자율과 압박, 진실과 오보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타기.
그러나 그 모순 속에서도 기자들이 버티는 이유는 단 하나다.
의미.


기자는 세상을 기록하지만, 사실은 자신을 기록한다.
매일 마감이라는 데드라인 앞에서,
그들은 자신의 한계와 싸운다.
그 싸움의 이유는 단순하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의미를 가진 하루’를 살고 싶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 기자들의 세계를 빌려,
오늘의 일하는 사람들에게 묻는다.
“당신은 지금, 의미로 일하고 있는가?”
기자들은 스스로의 이름으로 세상을 바꾸려 한다.
리더는 그들의 편집자처럼, 구성원의 문장을 다듬는다.
조직은 기자조직처럼, 스스로 조율하며 살아 있는 리듬으로 움직인다.


‘기자처럼 일하고 관리하라’는 말은
단지 언론의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모든 일하는 사람의 생존철학이다.
AI가 글을 쓰는 시대에도,
사람은 여전히 의미를 쓴다.
기자는 오늘도 자기 이름으로 세상을 기록하고,
리더는 그 이름들이 빛나도록 편집한다.


“기자는 정보를 다루지만, 본질적으로는 의미를 만든다.
조직도 그래야 한다.
우리가 다시 배워야 할 것은 일의 기술이 아니라, 의미의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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