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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왜 고통을 막아주지 않으셨을까?

욥의 절규에서 예수의 십자가까지

by 나그네 한

그날 대화는 생각보다 오래 기억에 남았다.


“하나님은 왜 그렇게 잔인해 보여?”


아들이 그렇게 말했을 때, 나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정직한 물음 앞에 내가 줄 수 있는 건 정직한 마음뿐이었고, 그래서 우리는 그저 그 자리에서, 조용히 생각을 나누었다. 예전 같으면 ‘그건 신앙이 부족해서 그래’라고 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안다. 신앙이란, 모든 걸 아는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모르는 것을 끝까지 붙드는 용기라는 것을.


아들의 질문은 어쩌면, 그 믿음의 시작이었다. 며칠 후, 아들은 또 다른 질문을 꺼냈다. 이전보다 더 조심스럽게, 그러나 훨씬 깊이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책상에 앉아 이어폰을 빼며 말문을 열었다.


“아빠, 그냥 궁금해서 그런데... 왜 사람들은 그렇게 고통을 겪는 걸까?”


나는 잠시 멈춰 아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 안에는 단지 호기심이 아니라, 혼란, 불편함, 그리고 내적인 동요가 섞여 있었다. 이건 한두 가지 사례에서 비롯된 질문이 아니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쌓이고 쌓여, 마침내 입 밖으로 흘러나온, 신앙의 벽을 두드리는 물음이었다.



고통을 향한 물음 앞에서



아빠: 무슨 일 있었어? 왜 그런 생각이 들었어?


아들: 그냥... 요즘 뉴스를 보다 보니까. 팔레스타인 사람들 죽는 거, 인도에서 또 폭동 일어난 거, 또 지진으로 마을 전체가 무너졌다는 기사도 봤고... 그냥 너무 많아. 너무 커서 뭐라 말하기도 힘든 고통들이. 그중엔 애들도 있고, 죄 없는 사람들도 있고...


아빠: 응. 많지. 그리고 말하자면 끝이 없지.


아들: 나는 그냥 그런 거 보면... 이 세상은 너무 이상한 것 같아. 그리고 그걸 설명해 주는 어른도 없어. 교회에서는 그냥 “그들을 위해 기도합시다” 하고, 학교에서는 “뉴스 보면서 생각해 보자” 하고. 근데 아무도 왜 그런 일이 벌어지는지를 말해주진 않잖아.


아빠: ‘왜’는 무겁지. 말하기도 어려운 질문이야. 그건 쉽게 말할 수 있는 게 아니거든.


아들: 근데 그게 말이 돼? 기독교는 진리를 말하는 종교잖아? 근데 정작 이런 질문에선 다 조용해. 그냥 “기도해라”, “하나님의 주권을 신뢰하고 믿어라” 이런 말로 끝나. 솔직히... 난 좀 회의감이 들어. 기도가 그냥 도망처럼 느껴지기도 해.


아빠: 그 말, 귀하게 들린다. 그리고 아주 중요해. 믿음이란 네가 지금처럼 불편함을 붙드는 것에서부터 시작될 때가 많아.


(아빠는 소파에 앉아 조용히 성경책을 폈다. 아들도 조용히 곁에 앉았다.)


아빠: 우리 이렇게 해보자. 먼저 고통에 대해 “왜 그런가”를 바로 설명하지 말고, 성경에서 고통을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지부터 보자. 하나님께서 고통을 대하는 태도, 사람들이 고통을 겪을 때 어떤 고백을 했는지, 그것부터 함께 찾아보자.


아들: 응. 단순히 설명보다... 그 말씀이 진짜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직접 보고 싶어. 요즘 그런 생각이 많았거든. 우리가 너무 쉽게 위로하거나 판단해 버리는 거 아닌가 하고.


아빠: 좋은 시작이네. 성경에서 고통이 처음 등장하는 장면은 창세기야.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불순종한 후, 하나님은 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셔.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또 아담에게 이르시되... 너는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세기 3:16–19)


아빠: 출산, 노동, 죽음. 이건 이후 모든 인간의 삶에 기본처럼 들어가 버린 고통이야. 하나님 없이 살기로 선택한 인간이 맞닥뜨린 결과, 즉 고통은 하나님의 본래 창조 의도가 아니라, 관계의 단절에서 비롯된 현실이지.


아들: 그렇네. 고통이 마치 당연한 듯 여겨졌지만, 성경은 그게 처음부터 있던 게 아니라고 말하는 거잖아. 그리고 이건 그냥 형벌이라기보다, 우리가 만든 길에서 피어난 결과처럼 느껴져.


아빠: 그렇게 받아들이는 게 맞아. 그리고 실제로 이 고통 안에서 살아간 대표적인 인물이 있어. 바로 욥. 욥은 의롭고 하나님을 경외하던 사람이었는데도, 말도 안 되는 고난을 당하지.


“어찌하여 내가 태에서 죽어 나오지 아니하였던가...” (욥기 3:11) “여인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사는 날이 적고 괴로움이 가득하며, 꽃과 같이 자라나나 시들고, 그림자처럼 지나가며 머무르지 못하나이다.” (욥기 14:1–2)


아빠: 정말 깊은 절망이지. 근데 하나님은 욥의 이런 말들을 탓하지 않으셨어. 도리어 끝까지 그의 이야기를 듣고, 만나주셨어. 그 절규 자체가 믿음의 표현이었던 거야.


아들: 그런데 신기하다. 그토록 정직한 말들이 성경에 그대로 남아 있다는 게. 난 성경이 좀 더 단정한 책일 줄 알았거든. 근데 이런 말들이 오히려 날 안심시켜. 내가 그렇게 말하면 안 되는 줄 알았는데... 욥도 그렇게 말했네.


아빠: 맞아. 욥의 입에서 나온 말은 비난이 아니라 기도였어. 그리고 그걸 가장 잘 보여주는 게 시편이야. 다윗은 고통 중에 이렇게 노래하지.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 내 눈이 근심으로 말미암아 쇠하며...” (시편 6:6–7) “내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어찌 나를 멀리하여 돕지 아니하시나이까?” (시편 22:1)


아빠: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이 시편의 말씀을 인용하셨어. 하나님의 아들도 그렇게 외로움과 버려짐의 고통을 느끼셨어.


아들: 그게 충격적이야. 예수님이라면 고통 위에 계신 줄만 알았는데, 실제로 고통의 한가운데에서 그 절규를 하셨다니. 하나님이 나랑 진짜 가까운 데 계시다고 처음으로 느껴져.


아빠: 그래서 히브리서에서는 예수님을 이렇게 말해.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시는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히브리서 4:15)


아빠: 고통이 없는 완벽한 존재가 아니라, 고통을 아시는 분이 우리를 위로하실 수 있는 거야. 그래서 예수님은 단지 위에서 명령하신 분이 아니라, 우리 곁에서 울어주시는 하나님이셨던 거지.


아들: 하... 이건 좀... 와닿는다. 지금까지 들은 설교 중 어떤 것보다 마음에 남는다. 고통이 있어도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이 계셔도 고통이 있다는 말이… 이제 조금은 이해가 돼.


아빠: 전도서에서도 이런 말씀이 있어.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 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전도서 3:1, 4) “초상집에 가는 것이 잔칫집에 가는 것보다 나으니... 산 자는 이것을 그의 마음에 둘지어다.” (전도서 7:2)


아빠: 고통은 무의미한 게 아니야. 때로는 그 슬픔 속에서 진짜 중요한 것들을 깨닫게 되지. 전도서는 그런 시간을 ‘지혜의 때’라고 불러.


아들: 생각해 보면, 나도 가장 많이 고민하고 질문했던 때가 마냥 행복할 땐 아니었어. 힘들고 납득 안 되는 일이 있을 때였지. 근데 그런 시간도 성경이 인정하는 ‘때’라니... 그 말 하나로 위로가 된다.


아빠: 그리고 시편에는 이런 말씀도 있어.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를 가까이하시고, 중심이 통해 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시편 34:18)


아빠: 하나님은 멀리 계시지 않아. 오히려 부서진 마음을 향해 가까이 다가오시는 분이야. 너도 혹시 그런 마음을 느꼈던 적이 있을지도 몰라.


아들: 아빠, 대화하면서 느낀 건데... 하나님이 고통을 설명하려는 분이 아니라, 그 고통을 같이 앉아 들어주시는 분 같아. 솔직히... 조금 숨 쉬게 됐어. 지금까지는 왜 그러냐고 따지기 바빴는데, 이젠 그 물음 자체를 하나님께 드려도 된다는 게 감사해.


아빠: 그렇지. 믿음은 대답을 가지고 시작하는 게 아니라, 대답이 없을 때 질문을 멈추지 않는 데서 시작되니까.


아들: 그럼 다음엔, ‘왜 어떤 고통은 막아주시지 않았을까’, ‘하나님이 고통을 허락하신 이유는 뭘까’ 그런 것도 이야기해 볼 수 있을까?


아빠: 당연하지. 그 질문은 지금껏 믿음을 가진 사람 모두가 던져온 질문이야. 우리도 같이 던져보자. 정답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더 깊이 알기 위해서 말이야.


아들: 좋아. 오늘처럼, 나도 같이 찾아가고 싶어.






인간은 왜 고통을 허락하셨을까



며칠 전, 우리는 고통에 대해 성경이 어떻게 말하는지 함께 살펴보았다. 그 고통은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것, 하나님은 그 자리에 계시다는 사실이 어쩌면 처음으로 아들의 마음에 닿았던 것 같다. 그날 대화가 끝날 무렵, 아들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그런 고통을 애초에 막아주시지 않았을까?”


그 질문은 단지 신학적인 탐구가 아니라, 살아가는 이들 모두가 품고 있는 깊은 탄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우리의 대화는 다시 시작되었다.



아들: 아빠, 며칠 전에 얘기했던 거 계속 생각났어. 하나님이 고통 속에 계신다는 건 이제 좀 알 것 같은데... 그렇다면 왜 그런 고통이 생기도록 내버려 두셨는지 여전히 이해가 안 돼. 막을 수도 있었잖아. 그게 하나님이시라면.


아빠: 응, 그 질문은 아빠도 오랫동안 해왔어. 사실 우리 믿음 안에서는 이 문제를 여러 방향으로 이야기해 왔거든. 간단하게 말하자면, 사람들은 이 문제를 두 가지 관점으로 보려고 해. 하나는 하나님은 선하시니까 우리를 항상 지켜주신다는 확신이 있고,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는 고통이 있다는 현실을 직면해야 하니까.


아들: 그 두 개가 서로 부딪히는 것 같아.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신다고 믿는데, 실제로는 너무 아프고 잃고 부서지기도 하니까... 그러면 그 보호가 진짜인 건지도 헷갈려.


아빠: 맞아. 그런 생각할 수 있어. 근데 성경은 그 질문을 회피하지 않아. 오히려 시편 91편 같은 말씀에서 하나님은 우리를 “안전하게 지키신다”라고 하셔. 하지만 그 ‘안전’이 꼭 고통이 없다는 뜻은 아니야.


아들: 그럼 고통이 있어도 안전할 수 있다는 말이야?


아빠: 그래. 팀 켈러라는 목사님이 그런 해석을 해주셨는데, 그 말이 아빠에겐 참 인상 깊었어. 사탄은 자꾸 우리 귀에 속삭여. “하나님이 진짜 너를 사랑하신다면, 왜 이런 고통을 허락하시겠어?” 하고. 하지만 성경은 오히려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이 우리를 더 깊이 보호하시고, 우리 영혼을 지키신다고 말해.


아들: 잠깐만. 그럼 하나님은 고통을 막으시는 게 아니라, 고통 속에서도 뭔가를 이루시는 거야?


아빠: 그렇지. 대표적인 예가 요셉 이야기야. 형들에게 팔리고, 감옥에도 갇히고... 근데 나중에 요셉이 형들에게 이렇게 말하지.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셨나니.” (창세기 50:20)


아들: 고통이 없어지진 않았지만, 그 고통이 다른 방향으로 쓰인 거구나.


아빠: 맞아. 바울도 이렇게 말했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로마서 8:28)


모든 것이 선하다는 말이 아니야. 나쁜 일도 있지만,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엮어서 결국 선을 이루셔.


아들: 근데 그건 ‘결국’이잖아. 지금 당장 아픈 사람한테는 너무 멀리 느껴질 수 있지 않아?


아빠: 맞아. 그래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도 중요해.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고난이 있을 거라고 말씀하셔.


“심지어 부모와 형제와 친척과 벗에게 넘겨지겠고... 그러나 너희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아니하리라.” (누가복음 21:16–18)


아들: 맞는 말이야? 배신도 당하고 죽임도 당하는데...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는다고?


아빠: 이건 몸의 안전보다 깊은 의미야. 하나님보다 더 소중한 걸 붙들면 우리는 흔들릴 수밖에 없어. 하지만 하나님이 가장 소중한 분이 되면, 세상에서 어떤 걸 잃어도 본질은 안 무너지게 되는 거야.


아들: 그게... 좀 어렵지만, 어렴풋이 알 것 같아. 하나님이 고통을 허락하셨다는 게 단순한 방치가 아니라, 그 안에서 뭔가 더 깊은 걸 이루시려는 의도가 있다는 거지?


아빠: 그래. 다음에는 그런 의도에 대해 더 이야기해 보자. 왜 어떤 고통은 설명되지 않고도 허용되는지, 욥 이야기도 깊이 들여다보면 참 많은 걸 알려주거든.


아들: 응, 욥 이야기... 그거 꼭 자세히 듣고 싶어. 그 사람은 진짜 이유도 없이 당한 거잖아. 그런 걸 보면, 고통이 그냥 벌은 아닌 거 같은데.


아빠: 맞아. 사실 고통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말할 수 있어. 하나는, 우리가 뭔가 잘못했을 때 생기는 고통. 예를 들어 신호 위반을 해서 사고가 나는 것처럼. 이건 결과지. 책임의 결과라고 볼 수 있지. 그런 경우는 성경에서 잠언이 자주 다뤄.


아들: “게으른 자는 가난하게 된다(잠언 10장 4절)” 이런 거?


아빠: 그렇지. 그건 세상이 어느 정도는 질서 있게 움직인다는 생각에서 나온 말이야. 그런 질서를 믿는 전통적인 신앙관에서는, 고통이 생기면 ‘네가 뭔가 잘못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기 쉬워.


아들: 그런데 그게 항상 맞지는 않잖아?


아빠: 맞아. 그래서 욥이 중요한 인물이야. 그는 도덕적으로도, 종교적으로도 흠잡을 데 없는 사람이었는데, 하루아침에 모든 걸 잃었지. 그런 욥의 이야기는 우리가 이유 없는 고통도 있다는 걸 보여줘. 이런 고통은 설명하려고 할수록 더 큰 실수를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아.


아들: 그럼 욥은 아무 잘못도 없이 고통을 겪은 거야?


아빠: 그래. 욥기 시작 부분에 보면, 하나님이 욥을 사탄에게 자랑하시잖아. 그러자 사탄이 이렇게 말해. “욥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건 다 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도 결국 자기 이익 때문이라는 거야.


아들: 그 말... 꽤 뼈 아픈데. 사실 나도 힘들면 기도 더 열심히 하고, 뭔가 잘 되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거든. 근데 나 스스로 하나님을 사랑해서 그러는 건지, 아니면 그냥 잘되길 바라서 그러는 건지... 헷갈릴 때 있어.


아빠: 그 솔직함, 너무 좋다. 사실 이건 믿는 사람 누구나 겪는 내면의 갈등이야. 하나님은 욥을 통해 “사랑 때문에, 아무 대가 없이 하나님을 믿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우리에게 던지신 거야. 그 질문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 믿음의 본질을 흔들지.


아들: 그럼... 욥의 고통은 하나님이 일부러 허락하신 거네?


아빠: 응. 근데 그게 복수나 괴롭힘이 아니라, 사랑이 대가 없이 가능한가, 인간은 고난 중에도 하나님을 붙잡을 수 있는가에 대한 아주 깊은 물음이었지. 사실 옛날에는 하나님이 고난을 주시는 이유가 있어야 한다고 믿었어. 사람이 죄를 지어서든, 뭔가를 배우게 하시려고 든. 근데 요즘 사람들은 그렇게 단순하게 보지 않아. 설명되지 않는 고통, 의미 없이 찾아오는 아픔도 있다고 말하지. 그걸 받아들이는 태도도 믿음의 일부가 된 거야.


아들: 그러면 지금은 설명보다 받아들이는 게 더 중요한 거야?


아빠: 어쩌면 그래. 어떤 사람들은 말해. “하나님은 고통을 허락하신다. 하지만 그 고통 안에서도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신다.” 예전에는 고통이 잘못의 징표처럼 여겨졌다면, 지금은 고통이 사람을 깊게 만들고, 삶을 다시 세우는 자리가 될 수 있다고 보는 거지. 아빠는 그 두 시선이 모두 필요하다고 생각해.


아들: 근데 욥도 진짜 흔들렸잖아. 심지어 “태어난 날을 저주한다”고까지 했잖아.


아빠: 그래서 난 욥기가 더 소중하다고 느껴져. 그건 단지 정답이 아니라, 실제 고통 중인 사람의 반응을 기록한 책이야. 그리고 친구들이 처음 7일간은 말없이 곁에 있었지만, 그 뒤엔 욥에게 “너 분명 뭔가 잘못했지”라고 몰아세우지.


아들: 그건 진짜... 너무 상처될 거 같아. 고통 속에 있는 사람한테 “네가 죄지었으니까 그런 거야”라는 말은...


아빠: 그게 바로 당시 일반적인 신앙의 틀이었어. “의인은 복을 받고, 악인은 벌을 받는다.” 그 말이 다 틀린 건 아니지만, 세상은 절대 그렇게 단순하게만 흘러가지 않지. 욥기는 그 틀을 흔들어주는 책이야. 고통을 무조건 ‘누구 탓’으로 돌리지 않도록 우리를 멈춰 세우지.


아들: 그럼 성경 안에도 서로 다른 시선이 있는 거야?


아빠: 응. 잠언은 세상이 정직하게 돌아간다고 말하고, 욥기는 그 질서가 항상 그렇지 않다고 말해. 그러니까 정답이 하나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지혜가 달라진다는 걸 보여줘. 성경도 세상이 항상 단순하게 돌아가는 건 아니라는 걸 인정하는 거야. 어떤 땐 열심히 살아도 힘든 일이 생기고, 어떤 땐 나쁜 일을 한 사람인데도 잘 되는 것처럼 보일 때가 있잖아. 그런 일들도 성경 안에서 다뤄지고 있다는 거지.


아들: 근데 아빠, 그렇게 따지면 욥은 거의 실험당한 거 아니야? 사탄이랑 하나님 사이에서 그냥... 대상이 된 거잖아.


아빠: 정직하게 말하면 그렇다고 봐야지. 그래서 이 문제는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괴로워하는 부분이야. 어떤 사람은 그걸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하고, 또 어떤 사람은 그 안에서 더 깊은 질문을 시작해. “하나님은 고통을 허락하신다. 하지만 그 고통을 통해 우리가 더 깊은 삶을 만나게 하신다.” 그 말이 위로가 되지 않는 순간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더 깊어졌다고 고백하는 사람들도 있어.


아들: 그러면 그 고통은... 삶을 부수는 게 아니라, 어쩌면 삶을 다시 짓는 시작이 될 수도 있는 거야?


아빠: 맞아. 아빠가 감동 있게 읽었던 가톨릭 신부님 요하네스 브란첸이라는 분의 책에서 “고통은 인생의 학교다”라고 말했어(고통이라는 걸림돌 중). 요즘 사람들은 고통을 피하려고만 하잖아. 감추고, 부끄러워하고, 마치 실패한 것처럼 여겨. 하지만 고통은 우리가 사람으로 살아가는 데 반드시 필요한 시간이라고 그는 말하지. 그건 하나님 없이도 통찰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그 시간이 ‘의미 없는 고통’으로 끝나지 않게 돼.


아들: 그 말도 이해는 돼. 근데... 그걸 진짜 내 고통으로 받아들이는 건 또 다른 문제야. 알겠지만... 쉽진 않지.


아빠: 당연하지.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욥처럼 고백하는 것을 원하실 지도 몰라.

“... 주신 분도 하나님,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 그분의 이름을 찬양할 뿐이다.(욥기 1장 21절)”

그건 모든 걸 이해해서 나오는 말이 아니라, 모든 걸 다 잃고도 하나님을 여전히 붙든 사람의 고백이지.


아들: 그 말은... 너무 크고 깊어서, 말로 쉽게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아. 솔직히... 내가 그런 상황이라면 과연 저런 고백을 할 수 있을까?


아빠: 나도 같은 생각을 해봤어. 정말 모든 걸 잃은 그 자리에서, 나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솔직히 말하면 자신이 없더라. 그런데도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해서가 아니라 그 질문을 붙든 채로라도 하나님을 바라보길 원하시는 분 아닐까 생각해 봤어. 그 고백은 믿음의 결과가 아니라, 믿음의 여정 속에서 나오는 걸지도 모르지.


아들: 그럼 다음엔... 욥이 끝내 하나님께 뭐라고 말했는지, 또 하나님은 어떤 대답을 하셨는지, 그 이야기까지 꼭 해줘.


아빠: 좋아. 다음엔 그 대화를 이어서, “고통 속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셨는가” 함께 살펴보자.





고통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일까?



아들: 아빠, 그럼 결국… 하나님은 욥에게 뭐라고 말씀하신 거야? 그렇게까지 심하게 고통을 겪게 하신 이유를, 진짜로 설명해 주신 적이 있어?


아빠: 그게… 참 묘해. 우리가 기대하는 식의 답은 끝내 주시지 않으셨어. 욥은 온몸이 무너질 정도로 고통을 당하면서, 계속해서 하나님께 묻고 또 물었지.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난 겁니까?”

“내가 뭘 잘못했는지 알려주시기라도 하셔야죠.”

“하나님은 왜 침묵하시는가?”


이런 말들을 쏟아내며 하나님을 향해 항의하고 절규했어.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이 등장하시는데... 그 장면이 정말 압도적이야.


아들: 정말로 나타나셨어?


아빠: 응. 욥기 38장부터 보면, 하나님께서 회오리바람 가운데 나타나셔서 말씀하시거든. 근데 그 말씀이 우리가 생각하는 위로의 말이나 해명은 아니었어. 하나님은 이런 식으로 질문을 시작하셔.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에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욥기 38:4)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거의 전부 질문이야.

“바다의 문을 누가 닫았느냐?”
“별들의 길을 아느냐?”
“사자의 먹이를 누가 마련하느냐?”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그들을 먹이는 이는 누구냐?”

이런 식의 질문이 수십 개 이어지지.


아들: 그건 좀 의외다.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거지? 욥은 자기가 왜 고통받았는지를 묻고 있는데, 하나님은 자연 이야기만 하시는 것처럼 보이는데...


아빠: 그게 바로 핵심이야. 하나님은 욥에게 ‘왜 고통을 당했는지’를 설명하지 않으셔. 대신, 하나님께서 온 세상을 어떻게 다스리고 계시는지, 그 질서의 끝을 인간이 다 헤아릴 수 없는지, 욥이 서 있는 자리가 얼마나 작은지, 그걸 보여주신 거야.


아들: 그럼... 욥은 결국 아무 답도 못 들은 거잖아?


아빠: 아니야. 겉으로 보기엔 답이 없어 보이지만, 사실 욥은 그 자리에서 가장 본질적인 답을 받은 셈이야. 그가 바랐던 건 “설명”이었지만, 하나님은 그 대신 자신을 보여주셨어. 그리고 그 앞에 선 욥은 결국 이렇게 고백하지.


“내가 죽게 돼 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기 42:5)


그 말은 곧, “예전에는 하나님에 대해 들은 이야기로만 알았는데, 지금은 내가 직접 하나님을 만났습니다”라는 뜻이야.


아들: 와... 그 말 좀 울컥한다. 설명을 받은 게 아니라, 하나님을 만났다는 거네. 그런데... 나 같으면 설명이 더 필요할 것 같아. 고통을 당한 사람이 왜 그런지 알고 싶어 하는 건 당연한 거잖아.


아빠: 그 말 맞아. 그리고 하나님도 그 마음을 무시하지 않으셔. 하지만 하나님은, 설명 대신 임재를 선택하셨어. 너의 질문을 다 이해하고, 다 듣고 계신 하나님이 직접 그 자리에 오셨다는 사실. 그게 때로는 어떤 대답보다 더 깊은 위로가 될 수 있는 거지.


아들: 그렇다고 해도... 솔직히 나는 아직도, 왜 그런 고통을 미리 막아주시지 않았는지 이해되지 않아. 그걸 아는 게 더 중요하게 느껴질 때가 많아.


아빠: 그건 너무나 당연한 마음이야. 아빠도 욥기를 여러 번 읽고 또 읽었지만, 마음이 완전히 편해진 적은 한 번도 없어. 머리로는 조금씩 정리가 되는 것 같다가도, 막상 뉴스에서 억울한 죽음을 보거나, 친구가 힘든 일을 겪는 걸 보면... 그냥 다시 무너지는 느낌이 들어.


아들:맞아. 오늘은 뭔가 이해될 것 같다가도, 내일 아픈 사람 이야기만 들어도 또 흔들릴 것 같아. 그리고 그런 마음이 드는 내가 이상한 건가 싶기도 하고...


아빠: 전혀 이상하지 않아. 오히려 그게 진짜 믿음의 자리야. 요하네스 프란첸은 다시 이렇게 말했어.


“고통은 때로 인생의 가장 깊은 진실을 비추는 자리”


고통은 우리 삶의 표면이 아니라, 가장 속 깊은 부분을 드러내는 순간이야. 우리가 평소에 묻지 않았던 것들을 묻게 만들고, 붙잡지 않았던 것을 붙잡게 만들지.


아들: 그럼... 지금 우리가 이렇게 묻고 대화하는 것도, 그 진실을 마주하고 있는 시간인 거네?


아빠: 그렇지. 하나님은 모든 걸 설명하시기보다, 그 고통의 자리에서 우리가 당신을 만나도록 부르시는 분이셔. 그래서 성 아우구스티누스도 이런 말을 했지.


“하나님, 당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당신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이해보다 중요한 건 관계야. 그분을 모른다고 해서, 그분을 향한 물음까지 멈출 필요는 없어.


아들: 그 말 좀... 위로된다. 지금 내 안에 있는 질문들이 믿음 밖에 있는 게 아니라, 믿음 안에 있다는 말 같아서.


아빠: 정확히 그거야. 믿음은 모든 걸 다 아는 상태가 아니라, 모르면서도 여전히 하나님을 향해 입을 여는 용기야. 우리는 지금, 그 길 한가운데 서 있는 거고.


아들: 그럼... 욥은 마지막에 뭐라고 고백했어? 하나님은 그 고백에 어떻게 응답하셨고... 예수님은... 그 모든 고통에 어떻게 함께하셨을까?


아빠: 좋은 질문이야. 그 세 가지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하나의 흐름처럼 이어져. 욥의 마지막 고백, 하나님이 주신 응답, 그리고 그 응답이 예수님 안에서 어떻게 온전히 드러났는지까지. 욥은 결국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고백했지.


“내가 죽게 되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스스로 거두어들이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하나이다.”(욥기 42:5–6)


그 고백은 단순히 “죄송합니다”가 아니었어. 욥은 잘못한 게 없었고, 하나님도 그걸 부정하지 않으셨지. 하지만 욥은 하나님의 크심 앞에서, 자기 이해의 한계와 인간 존재의 깊은 미약함을 깨달은 거야. 그건 두려워서 무릎 꿇은 게 아니라, 하나님의 광대함 앞에서 존재 전체로 마주한 경외감의 고백이었어.


아들: 그러면... 하나님은 그 고백에 어떻게 대답하셨어?


아빠: 놀라운 건, 하나님이 욥에게 “그래, 잘했다”고만하지 않으셨다는 거야. 오히려 욥의 친구들을 책망하셨지.


“너희가 나를 가리켜 말한 것이 내 종 욥의 말 같이 옳지 못하였느니라.” (욥기 42:7)


하나님은 욥의 분노, 절규, 질문조차 더 정직하고 진실된 신앙으로 보신 거야. 반면 친구들은 겉으론 바르게 말했지만, 고통의 현실 앞에서 하나님의 마음을 오히려 오해하고 왜곡했지. 그리고 마지막엔 하나님이 욥의 삶을 회복시키셔. 잃어버린 것보다 더 큰 것으로 갚아주시고, 욥이 친구들을 위해 기도했을 때, 그 기도도 응답하셔.


아들: 그럼, 욥의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는 거야?


아빠: 욥기의 끝은 단순한 해피엔딩이 아니야. 설명 없이 시작된 고통이, 설명 없이 회복되는 이야기. 하지만 그 사이에 뭐가 있냐면, 하나님과의 진짜 만남이 있어. 하나님은 “고통은 다 내 뜻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어. 그 대신 “나는 네가 아파하는 자리에 있다”라고 하신 거야. 그리고 바로 그 응답이, 예수님의 고난 속에서 가장 깊이 드러나.


아들: 예수님도... 그런 고통을 직접 겪으신 거지?


아빠: 그래.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면서도, 세상에서 가장 깊은 고통의 자리에 스스로 들어오신 분이야. 욕을 당하고, 배신당하고, 고문당하고,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셨지. 그리고 마지막 순간엔 이런 외침을 하셨어.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태복음 27:46 / 시편 22:1)


그 절규는 단지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의 고통을 피하지 않으셨다는 증거야. 예수님은 고통을 멀리서 바라보지 않으시고, 그 안으로 들어오셨어. 사람 대신 십자가를 지셨고, 그 십자가는 하나님이 고통을 사랑으로 감당하신 자리가 되었어. 그리고 이 고백은 20세기의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이 이렇게 표현했어. 그는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에서 말하지.


“하나님은 전능함으로 고통을 건너뛰지 않으셨다. 오히려 전능함으로 그 고통 속에 머무셨다.”


몰트만은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하나님 자신이 고통받는 하나님이 되셨다고 말해. 그만큼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그 한가운데까지 내려오신 분이라는 거야.


아들: 하나님은... 고통을 그냥 내려다보시는 분이 아니라, 고통을 직접 걸어가신 분이네.


아빠: 맞아.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말할 수 있어.

“하나님은 고통을 설명하지 않으셨다. 대신 그 고통을 함께 지셨다.”

그게 복음의 중심이고, 신앙이 말하려는 가장 깊은 진실이야.


아들: 그러니까... 고통을 설명하려고만 애쓰는 게 아니라, 그 안에서 누가 함께 있는지를 묻는 게 더 중요한 거네.


아빠: 그래. 우리는 때로 답을 원하지만, 하나님은 관계를 주시고, 우리는 설명을 요구하지만, 하나님은 함께 걸어가시는 사랑을 보여주시지.


아들: 그 말이 좀 위로가 된다. 아직도 이해 안 되는 게 많지만, 그게 다 이해돼야 믿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조금은 알 것 같아.


아빠: 그 마음이면 충분해. 믿음은 정답을 가진 상태가 아니라, 정답이 없어도 하나님을 붙드는 손이 하나라도 남아 있는 상태니까. 우리, 계속 같이 질문하며 걸어가자. 고통의 끝에서 만나는 하나님은 우리를 무너지게 하는 분이 아니라, 다시 세우시는 분이니까.






그날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아들은 조용히 책상에 엎드려 있었고, 아빠는 성경책을 덮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서로 말을 잇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꼭 무슨 말을 더 해야 할 것 같지도 않았다. 밖은 벌써 어두워지고 있었고, 방 안엔 조용히 생각이 흘렀다. 말은 멈췄지만, 마음속에서는 여전히 물음이 이어지고 있었다. 완전히 끝난 게 아니라, 잠시 멈춘 시간 같았다.



아들: 아빠, 오늘 이야기... 좀 이상했어.


아빠: 왜? 너무 어려웠어?


아들: 아니, 그게 아니라... 마음이 좀 이상해. 이해된 건 아닌 것 같은데, 이상하게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졌다고 해야 하나...


아빠: 음... 그건 참 귀한 감정이야. 이해는 아직 멀어도, 이해하려고 묻는 그 마음 안에서 하나님은 이미 일하고 계시니까.


아들: 사실 예전엔 “왜 이런 일이 생겨요?”라는 말이 믿음 없는 질문처럼 느껴졌거든. 그런데 오늘 얘기 나누면서, 그 질문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는 길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알았어.


아빠: 맞아. 믿음은 정답을 안다는 뜻이 아니라, 정답을 모른 채로도 하나님 앞에 서는 용기니까. 그리고... 그 앞에서 멈춰 서 있는 네가 참 대견하다.


아들: 그래도 여전히 어렵긴 해. 하나님이 고통을 왜 막지 않으셨는지, 왜 아예 없애주시지 않는지... 그 질문은 여전히 마음에 있어.


아빠: 그 질문은 당분간, 아니 어쩌면 평생 함께 갈지도 몰라. 하지만 그게 잘못된 게 아니야. 예수님도 십자가 위에서 "왜?"라고 물으셨잖아.


"왜 나를 버리셨나이까?"


아들: 그 말... 오늘 제일 기억에 남는 말이야. 예수님이 그런 절규를 하셨다는 게... 어쩐지 좀 외롭지 않게 느껴졌어.


아빠: 고통을 모른 척하지 않으시고, 고통 안으로 들어오신 하나님. 그분이 우리가 믿는 분이라는 건, 참 감사한 일이야.


아들: 그러니까 지금 내가 다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은 거지?


아빠: 충분히 괜찮아. 그 질문을 놓지 않고, 하나님께 계속 말 걸고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믿음의 진짜 한가운데에 있는 거야.


아들:... 아빠. 오늘 대화, 잊지 않을게.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 이 질문을 통해 하나님을 만났다고 말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아빠: 그럴 거야. 그때가 언제든, 그 길을 혼자 가지 않아도 된다는 걸 꼭 기억해 줘. 하나님도, 그리고 나도, 네 곁에 있을 테니까.



마무리 묵상

고통은 늘 질문을 던진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하나님은 어디 계신가? 성경은 그 물음에 빠른 해답을 주지 않는다. 대신, 고통 속에서 묻고 울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남긴다. 욥은 결국 이렇게 고백했다.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욥기 42:5)

하나님은 설명 대신, 자신을 보여주셨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왜?”라고 물으셨다. 하나님은 우리의 질문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오히려 그 자리까지 함께 내려오신 분이다. 믿음은 모든 걸 아는 것이 아니라, 모르면서도 하나님을 놓지 않는 것이다. 그 한 걸음이 지금, 우리에게도 가능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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