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아빠도 세 살 때 미웠어요.
사실 아이가 가장 이쁠 때가 세 살 때이다. 세 살은 서툴지만 말을 하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나이다. 말을 시작하는 아이의 모습을 본 어른들은 그 순간을 가장 큰 행복으로 여긴다. 하지만, 점점 말이 늘어나고 자신의 감정 표현이 고집으로 변한다. 우리 땐 그러한 고집을 '땡깡(일본말)'이라고 불렀다. - '생떼'가 올바른 표현이지만 오래전 이야기를 다루기에 '땡깡'으로 표현했다.
난 '미운 세 살'이라는 말은 결혼 후 첫째가 태어난 후 알게 된 말이다. 아마도 결혼 전 또는 첫아기가 태어나기 전에 이 말을 듣거나 이해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그리고 첫 말을 하고 첫 감정 표현을 하는 아이에게 화를 내는 어른은 없다. 하지만, 아이의 감정 표현이 격해지고 고집이 강해지면 그때부터 어른은 아이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그때부터 그 아이는 '미운 세 살'이 된다.
"네 고집은 쇠뿔보다 쌨어! 넌 세 살 때 고집은 지금도 없어지지 않네"
어른이 된 내가 가끔 무슨 일을 고집스럽게 할 때면 부모님이 꼭 내게 하시는 말씀이다. 40년 전 나의 부모님에게도 이제 말을 시작하는 이쁜 아기의 고집스러운 행동이 '문화충격'으로 다가왔었다. 그래도 난 부모 세대에 비해 민주적인 고등 교육을 받았고 지금은 '자녀 양육'의 이해를 돕는 매체들이 많기에 마음만 있다면 지혜롭게 아이를 훈육할 수 있다지만 우리의 부모님 세대는 지금과 완전히 달랐다. 우리 부모의 세대는 아이에게 '맴매'를 들거나 차마 그러지 못해 그저 참는 것이 일반적인 훈육방법이었다. 그래도 당시는 '미운 세 살'이라는 말은 그리 많이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쩌면 없는 말이었을 수도.
'미운 세 살'의 시절은 누구에게나 있다. '미운 세 살'을 거치지 않고 어른이 된 사람은 없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듯이 세 살 때 한 인간의 성향이 만들어진다. 아이에겐 아주 자연스러운 '생떼'모습이지만 어른들에겐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황당함'을 겪고 있을 뿐이다. 그래서 아이도 부모도 아무런 잘못이 없다. 자연스러운 것이다.
"할머니가 그러는데 아빠도 어릴 때 정말 말 안 들었데. 그러니까 나도 그러는 거야"
몇 년 전 이제 5살인 첫째가 자신을 훈육하는 아빠에게 했던 말이다. 그때 난 누군가에게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난 어린 시절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께 엄마, 아빠의 어린 시절을 묻지 못했던 것이다. 난 왜 첫째처럼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물러보지 못했을까?
분명한 것은 나의 엄마, 아빠도 할아버지, 할머니에겐 '미운 세 살'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대 가족이 살던 때라 엄마, 아빠를 맡아 키운 누나, 언니, 형, 오빠가 할아버지, 할머니보다 '미운 세 살'의 무거움을 더 느꼈을 수도 있지만.
지금 나에겐 세 살 난 딸아이가 있다. 가끔 정말 밉다. 난 매일 나의 딸을 보며 심한 '문화 충격'을 겪는다. 하지만, 아이의 웃음과 애교는 순간 미웠던 마음을 잊게 한다. 그 '미운 세 살'의 웃음은 이런 아이를 미워하고 혼낸 '미운 부모'가 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