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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아무 생각 없이 걸어갔을 때

by 별빛바람

사람이 살면서 많은 일을 겪는 것은 사실이지만, 나에게 23년은 특별한 한 해 였다.

분명 나에게 있어 15년이란 삶을 투영하였던 한 회사와의 결별을 준비 하던 시간. 그리고 내가 책임져야 할 팀원들의 미래를 결정해 줘야 하는 순간. 그 모든 것들이 내 머리를 짓누르고 있던 시점이었다. 그때 나는 퇴사 및 권고사직과 관련된 글을 브런치에 연재하고 있었으며, 몇 몇 사람이 "너무 좌파적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폭언을 듣고 글을 멈추던 시점이었다. 그렇다. 명예퇴직이나 권고사직은 누구에게나 다가오는 순간이며, 그 순간은 마치 나에게는 안 올것이라 생각이 들었던 순간이었다.


나는 그 순간을 스스로 선택했다.

나를 믿고 따르던 팀원들을 나 혼자만 놔두고 떠나는 것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었다.

그저 그룹 공채라는 이유로. 핵심 부서 경험이 있었다는 이유로 나 혼자만 산다는 것이 옳은 일이었을까?

난 지금 생각해보면 지금 똑같은 상황이라도 같은 결정을 내렸으리라 생각을 한다.

당연하지만, 그 선택에 후회는 없다.


하지만, 그 때 만큼은 3월 초 였지만, 여전히 쌀쌀한 순간이었고,

내 자리를 탐 내던 부장 한 명은 열심히 나에게 카톡과 메신저를 보내가며 지금까지의 성과를 알려달라고 할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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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내 가방에는 카메라가 있었고, 작은 글을 쓸 수 있는 단말기 한 대가 있었다.

커피 한 잔을 마시며 머릿속의 복잡한 감정을 글로 옮기고 있던 그 순간. 나는 그저 정처없이 신설동의 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골목을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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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골목 안, 햇살은 건물 사이로 겨우 스며들고 있었다. 오래된 전선이 뒤엉켜 하늘을 가리고, 벽에는 손때 묻은 포스터가 반쯤 찢겨 매달려 있다. 스쿠터 한 대가 길 한가운데에 멈춰 서 있었다. 누군가 잠시 두고 간 삶의 흔적 같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내 그림자가 벽에 비치고, 어둠과 빛이 섞여 내 안의 생각처럼 뒤엉킨다. 아무 말 없이, 아무 이유 없이, 그저 걷고 있었다. 오래된 골목의 냄새가 이상하게 편안했다. 마치 잊고 있던 기억이 그 안에 머물고 있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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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벽돌길 사이로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어깨를 감싼다. 사람은 보이지 않지만, 의자와 대야, 오래된 문짝들이 그 자리를 대신 채우고 있었다. 누군가의 하루가 잠시 멈춘 자리, 그리고 시간이 천천히 굳어버린 공간. 이곳에서는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다. 오직 바람만이 골목을 따라 흐른다. 햇살이 기울면 문틈 사이로 희미한 빛이 스며들고, 먼지가 반짝인다. 오래된 삶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것이, 왠지 모르게 위로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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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얗게 빛나는 벽과 그림자 사이, 리어카를 미는 사람의 뒷모습이 보인다. 몸보다 큰 짐을 실은 채, 천천히 골목 끝을 향해 나아간다. 걸음은 느리지만 멈추지 않는다. 이 도시의 하루는 그렇게 이어진다. 어쩌면 그 사람도 나처럼, 아무 생각 없이 걷고 있었을지 모른다. 그 뒷모습을 보며 문득 내 하루가 떠올랐다. 반복되고 평범하지만, 어딘가로 향하고 있다는 감각. 그것만으로 충분할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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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닿지 않는 콘크리트 아래, 도시의 숨소리가 묻혀 있었다. 도로 위의 차들은 빠르게 지나가지만, 그 아래는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하다. 거대한 구조물은 하늘을 가리지만, 그 틈새로 스며드는 햇살은 묘하게 따뜻했다.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와 멀리서 들려오는 공사 차량의 엔진음이 섞인다. 어쩌면 이곳이 도시의 뒷면일지도 모르겠다. 눈부신 곳이 아니라, 묵묵히 그 빛을 떠받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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둔덕 아래, 트럭이 느리게 지나간다. 강바닥은 공사로 파헤쳐져 있고, 바람은 먼지를 실어 나른다. 기둥 하나하나가 묵직하게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늘 속에서도 사람들은 걷고, 일하고, 살아간다. 콘크리트의 무게 아래에 담긴 수많은 하루들. 차가운 공간인데 이상하게 따뜻하다. 어쩌면 삶이라는 건 이런 것일지도 — 낡고 거칠지만, 여전히 흘러가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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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 아래에서 바라본 건너편 풍경은, 마치 오래된 필름 속 한 장면 같다. 낡은 상가, 비스듬히 기운 간판, 그리고 그 뒤로 솟은 아파트의 실루엣. 세월이 교차하는 지점. 한쪽은 사라져가고, 한쪽은 새로 세워진다. 그러나 둘 다 같은 하늘 아래 있다. 빛과 그림자가 맞닿는 자리에서 나는 오래된 시간의 냄새를 맡는다. 변화 속에서도 여전히 살아 있는 도시의 호흡. 그것이 이 장면의 가장 묘한 아름다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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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위에 적힌 ‘순대국’, ‘머리고기’ 글씨가 바래 있다. 유리창 너머에는 낡은 무늬의 시트지가 붙어 있고, 손때 묻은 문고리가 작은 이야기처럼 느껴진다. 이 가게에는 수많은 점심시간과 겨울 저녁의 냄새가 스며 있겠지. 지금은 닫혀 있지만, 문 뒤에는 여전히 삶의 온기가 남아 있을 것만 같다. 도시의 화려한 간판들 속에서 이런 손글씨 하나가 더 오래 기억된다. 누군가의 손끝에서 만들어진 시간의 흔적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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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돌과 콘크리트, 기운 지붕, 구부러진 배관들. 이 길에는 곧 사라질 것들이 너무 많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여전히 살아 있다. 벽에 부딪히는 햇살, 바닥의 그림자,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텔레비전 소리. 낡은 공간은 이상하게 따뜻하다. 손끝으로 만져지는 삶의 결이 있다. 나는 그 속을 천천히 걸었다. 그리고 문득, 이런 풍경이 언젠가 사라질 거라는 사실이 마음을 잡아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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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천 위로 도시가 펼쳐진다. 멀리 보이는 빌딩들, 강 위의 반사된 햇빛, 그리고 걷는 사람들. 도시는 여전히 살아 있고, 그 안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속도로 흘러간다. 흑백의 세계 속에서도 온도가 느껴진다. 누군가는 산책을 하고, 누군가는 일터로 향한다.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걸었을 뿐인데, 어느새 하루의 끝에 와 있었다. 그렇게 걷는 사이, 마음속의 먼지 같은 생각들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그날 이후 나는 오래된 책장을 덮듯, 지난 시간을 천천히 정리했다. 서류철 사이에 낀 메모들, 회의 때 썼던 낙서, 함께 웃던 사진 한 장까지도 쉽게 버리지 못했다. 버리는 건 언제나 단순하지만, 놓아주는 건 결코 쉽지 않았다. 다만, 그 모든 시간 위에 내가 있었다는 사실 하나만은 지우고 싶지 않았다.

회사를 떠나며 나는 한 가지를 배웠다. ‘누군가의 인정’보다 더 중요한 건 ‘나의 확신’이라는 것. 흔들리지 않기 위해 붙잡았던 수많은 이유들이 사실은 이미 부서진 나를 붙드는 허상이었다. 이제는 그저, 나를 지탱했던 신념 하나면 충분하다.

퇴사 이후의 시간은 생각보다 고요했다. 새벽에 눈을 뜨면 회사 메일이 아니라, 내 생각이 가장 먼저 찾아왔다. 불안도 있었지만, 그 안엔 오래된 자유의 냄새가 섞여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길을 잃은 게 아니라, 다른 길을 찾고 있는 중이었다.

이제야 안다. 떠남은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기 위한 가장 인간적인 방식이라는 것을.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가 같은 자리에 서 있을 때, 나는 조용히 말해주고 싶다. “괜찮다고, 그 길 끝에서도 결국 당신 자신을 만나게 될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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