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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

by 별빛바람

후보의 연설을 들으며 길을 걷던 그 날은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거대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지만, 나는 오히려 그 목소리가 닿지 않는 곳을 향해 걸었다.

조용한 골목, 오래된 건물, 그리고 낮게 떨어지는 햇살.

이문동의 공기는 느리게 흔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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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사라진 이문동의 철길은 그 때만큼은 건널목을 향해 바라볼 수 있었다.

마침 필름의 빛샘도 함께 진행되었는지 슬며시 카메라의 다크룸을 향해 빛은 그 사이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철길은 도시의 가장자리 같았다.
기찻길을 따라 이어진 풍경은 낡고, 그 위로는 전선이 얽히고, 녹슨 구조물이 그림자를 드리웠다.
누군가는 이곳을 지나쳐갔고, 누군가는 멈춰 섰다.
그날 나는 그 중간쯤에 있었다.
빛샘이 스며든 필름 한 장에는, 시간의 틈새로 새어 들어온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의도치 않은 빛의 흔적은 마치 “이건 실수가 아니라 기억이야.” 라고 말하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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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에 조용히 남아있는 낡은 나무 전봇대.

그리고 화분 하나.

그리고 자전거들...


골목의 끝에는 오래된 자전거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그 옆으로는 작은 화분이 빛을 머금고 있었다.
이제는 흔적조차 모를 나무 전봇대에 걸린 전선들,
그리고 그 아래에 놓인 낡은 놀이기구 하나.
모두 제자리에 멈춰 있었다.

정치의 소음이 멀리서 울려 퍼졌지만, 이곳의 공기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듯 고요했다.
사람들이 사라진 자리, 그 자리에 남은 물건들이 하루의 무게를 대신 견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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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걸어가자 골목은 어둡게 꺾였다.
햇살은 건물 사이로 갇혀, 빛보다 그림자가 더 짙게 남았다.
벽에 기대 선 자전거 하나, 닫힌 창문, 무심히 걸린 간판들.
모든 것이 잠시 멈춰 있는 듯했다.


그 순간,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이 시간에 나는 왜 셔터를 누르고 있을까?”

아마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기억하고 싶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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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을 들어 올리자, 건물 옥상에는 철계단과 난간, 그리고 비스듬히 얹힌 화분들이 보였다.
빛은 계단의 그림자를 따라 흘러내리고, 그 아래에는 누군가의 빨래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았던 흔적들. 살아 있음의 기호들이었다.

정치는 거대한 변화를 이야기하지만, 삶은 언제나 이렇게 미세한 흔적들 속에 있다.
그 미세함을 필름 속에 남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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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식 슬레이트 지붕과 균열이 간 벽.

누군가의 시간이 쌓이고, 다른 누군가의 기억이 벗겨져 나간 자리였다.

햇살이 닿지 않는 부분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러나 그 벽에는 삶이 흘렀던 온도가 남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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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발걸음을 멈춘 곳에는 천으로 덮인 통 하나와 종이 쪽지가 있었다.
손글씨로 쓰인 문장 하나.


‘군고구마만 팝니다.’


그 단어들이 이상하게 따뜻했다.
누군가는 오늘 하루를 그렇게 버티고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는 그 문장을 읽고 잠시 멈춰 섰을 것이다.

그날 나는, 정치의 언어 대신 이 짧은 문장을 마음속에 옮겨 적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 이게 진짜 하루의 온도구나.”




세상이 요란하게 움직이던 날, 나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골목을 걸었다.

빛은 스쳐갔고, 그림자는 길어졌다.

그리고 그 모든 순간이, 조용히 필름 속에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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