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필름 카메라를 손에 들고 걷다가 멈추다.

by 별빛바람

'22년 3월의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의 한 거리.

귀에 꽂혀있는 이어폰에는 한 대통령 후보의 연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후보의 연설과 민중의 환호는 내 가슴도 벅차게 했지만 결론적으로 그 당시 선거에서 그 후보는 낙선의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나는 거친 후보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이문동의 한 거리를 걸어가고 있었다.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그저 두 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거대한 정치의 언어 대신, 발밑의 그림자와 골목의 작은 표정을 뒤쫓아 가고 있었다.


2203040005_1A.jpg

이문동의 골목은 한없이 좁고 얽혀 있었다.
담장 위로는 전선이 뒤엉켜 하늘을 가렸고, 계단은 무심하게 벽돌 건물 사이로 이어져 있었다. 빛은 그 틈새를 찾아 흘러내리며 그림자를 만들고, 오래된 벽돌 위에 시간의 흔적을 드리웠다. 정치의 거대한 구호가 흘러나오던 순간에도, 이 골목은 변함없이 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세상은 언제나 거대한 소리와는 별개로 흘러간다.

내가 셔터를 누른 건, 아마도 그 조용한 진실 때문이었을 것이다.


2203040006_2A.jpg

낡은 스쿠터 한 대가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스티커는 색이 바래 있었고, 바퀴에는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누군가의 발걸음을 오랫동안 대신했을 이 작은 기계는, 지금은 멈춤의 시간을 견디고 있었다.

정치는 늘 속도와 변화를 말한다. 하지만 멈춤에도 이야기가 있다.
내 눈에 비친 이 스쿠터는, 마치 잠시 정치의 소음을 멀리 두고 숨 고르기를 하는 우리 삶의 모습 같았다.


2203040007_3A.jpg

조용한 골목을 걸어가는 뒷모습 하나.
멀리서 걸음을 옮기던 그 사람은 어쩌면 무언가 일 거리를 찾아 해매는 중이었을까, 아니면 단순히 집으로 돌아가던 중이었을까. 나는 그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셔터를 눌렀다.

사진은 언제나 뒷모습에 많은 것을 담는다. 앞모습의 표정보다 더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기 때문이다.
그날의 이문동, 그 뒷모습에는 우리의 삶처럼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2203040008_4A.jpg

골목의 벽에는 낡은 자전거들이 연이어 세워져 있었다.
바퀴는 반쯤 바람이 빠져 있었고, 리어카에는 생활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도시는 이런 자잘한 풍경들로 유지된다. 누군가의 노동, 누군가의 땀, 그리고 그 흔적이 쌓여 만들어진 것이다.

정치인들은 ‘민생’을 말하지만, 정작 민생은 이렇게 벽돌 담장 밑에서, 바람 빠진 타이어 옆에서 묵묵히 살아간다. 그 당시 한 후보는 권투 글러브를 끼며 열심히 주먹을 날리며 무언가를 바꿀 것 같은 메시지를 던졌다. 그리고 그 메시지 덕분에 누군가는 그 후보를 향해 표를 던졌다. 하지만, 누군가의 땀, 누군가의 흔적을 이야기 한 그 후보는 그저 묵묵히 단상을 내려올 수 밖에 없었다. 정작 우리가 바라본 것은 누군가의 흔적이 아닌, 거대한 퍼포먼스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순간에도 Leica MP의 뷰파인더는 그 조용한 민생의 풍경을 잡아냈다. Ilford XP2 400 필름의 입자는 그 무게를 더 선명하게 새겨 넣었다.


2203040009_5A.jpg

창살이 덧대어진 작은 창과 닫힌 문이 보였다.
문 위에는 오래된 전단지와 스티커가 겹겹이 붙어 있었다. 마치 시간이 그 위에 계속 덧칠된 것 같았다.

닫힌 문은 언제나 묘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안쪽에는 어떤 삶이 있을까? 열리지 않은 창 너머로 무슨 목소리가 오가고 있을까?
나는 그 답을 알 수 없지만, 필름은 그 순간의 질문을 고스란히 기록해 두었다.


2203040013_9A.jpg

길바닥에는 방향을 가리키는 화살표가 그려져 있었다.
왼쪽과 오른쪽을 동시에 가리키는, 모순적인 표시였다.
그날의 공기와 묘하게 닮아 있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둔 한국 사회도 비슷했다. 좌와 우, 전진과 후퇴, 수많은 방향으로 갈라진 목소리들.
그 가운데 서 있는 나는, 한 장의 화살표를 찍으며 내 마음의 갈피도 함께 남겼다.


2203040015_11A.jpg

담벼락 아래 줄지어 놓인 항아리 세 개.
누군가의 장독대였을지도 모른다. 이 골목에서 수십 년간 가족의 밥상을 책임져 왔을 작은 그릇들.
지금은 쓰임을 다했는지 먼지가 내려앉아 있었다.

사진은 언제나 사라져 가는 것들을 붙잡으려 한다. 항아리 세 개를 바라보며, 나 역시 사라져가는 것들을 붙잡고 싶었다.
그것이 바로 필름을 든 이유였을 것이다.


2203040020_16A.jpg

하늘을 가득 메운 전선들, 그리고 철조망처럼 얽힌 가지들.
뒤엉켜 있지만, 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정리되지 않은 질서, 그것이 도시의 또 다른 얼굴이었다.

내 Leica는 그 뒤엉킴 속에서도 하나의 리듬을 찾아냈다.
흑백 필름은 그 질서를 더욱 극적으로 드러냈다.
마치 삶이란 언제나 얽혀 있지만 결국 어딘가로 흘러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날, 나는 정치인의 연설을 들으며 골목을 걸었다.
거대한 구호가 흘러나왔지만, 내가 셔터를 누른 건 오히려 작은 풍경들이었다.
도시는 늘 그런 모습으로 존재한다.
역사와 정치, 사회와 사건은 언젠가 기록 속으로 사라지겠지만,
낡은 담벼락, 스쿠터 한 대, 항아리 세 개, 얽힌 전선은 지금 이 순간에도 그대로 남아 우리 삶을 지탱하고 있다.

걷다, 멈추다, 그리고 기록하다.
그 단순한 행위 속에서, 나는 오늘도 필름 한 롤을 채웠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