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의 해부>
영화 <추락의 해부>를 봤다. ‘언젠가는 꼭 봐야지 영화’였는데, 요즘 읽고 있는 책이 <해부학자>라서 보게 된 것은 아니지만 무의식 중에 계속 신경 쓰이긴 했던 것 같다. 괜히 안 보면 안 되는 영화들이 있다. 이 영화도 그런 영화 중 하나였는데 아마도 제목 때문일 것이다. 제목이 저런데 어떻게 안 봐요.
<추락의 해부>는 보기 전에 기대했던 것과는 좀 다른 영화로 - 기대하기로는 좀 더 시니컬하고 분석적일 거라 생각했다- 꽤나 시적인 프랑스 영화였다. 즉 음악과 내용이 불가분의 한 몸을 이루고, 제목이 작품의 지분을 5할 이상 차지하는 그런 작품이다. 다 보고 나면 음악을 다시 찾아 듣게 되는데 그래봤자 그건 같은 음악이 아니다. 그 음악은 그 영화 속에서만 그 음악인 것이다. 그런 영화들이 있다. 분위기는 전혀 다르지만 역시 프랑스 영화인 <타인의 취향> 같은 영화가 이 영화와 비슷한 류의, 시적인 영화다. 강렬하고 효과적이며 거의 모든 것인 제목과, 영화 속에서만 ‘그 음악’이 되는 ost를 지닌 영화.
책 <해부학자>에는 저자가 직접 시체를 해부한 경험이 묘사되는데, 이 영화의 제목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설명해 준다. 해부는 두렵고, 축축하고, 집요하고, 끝나고 나면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한 번에 모아 태워버리지 않으면 안 되는 온갖 장기류-한때는 그 인간을 빛내거나 괴롭히며 생명을 유지시켰을 그것들-만이 시체가 되어 누운 채 속속들이 털려버린 한 인간이 살아있었음을 증명할 뿐이다. ‘그리고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결국 모든 인생은 그런 결말을 향해 달려가는 것이다. 좋은 영화는 그 점을 반드시 짚고 넘어간다. 그건 인생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의 의도를 가진다. 본질은 결과나 결말이 아닌 과정에 있다는 것을 각자의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