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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상구 변호사 Nov 15. 2017

023 기업의 사회적 책임 (CSR)

(2009년 12월 11일 칼럼 기고분)

5각형과 6각형의 가죽 32조각, 1620회의 바느질. 월드컵의 감동을 만들어낸 진정한 주역은 굳은살 박인 아이들의 작은 손이다. 전 세계 수제 축구공의 70퍼센트를 생산하는 인도와 파키스탄 1만 5천 명의 아이들. 그들이 만든 축구공 1개의 값은 15만 원, 하루 종일 축구공을 꿰매는 아이들의 일당은 300원. 일당 2000만 원을 받는 프리킥의 마술사 데이비드 베컴은 “이 세상에서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은 단 하나, 공을 차는 것이었다.”라고 하고, 일당 300원을 받는 인도와 파키스탄의 아이들은 “우리는 한 번도 축구공을 가져본 적이 없다. 그저 하루 종일 바느질만 할 뿐”이라고 한다(지식채널e-축구공 경제학). 



상법상 '기업(회사)'을 정의하자면 '영리 목적의 법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기업의 태생적 존재 이유는 최대의 이윤으로 경영자 또는 주주의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입니다. 단순 명료하지요. 그리고 그러한 기업경영의 과정에서 노동자는 밥 먹고 살고 이것저것 소비하며 가정을 꾸려 살고, 소비자 입장에서는 여러 기업이 내놓은 좋은 제품들을 비교적 저렴하게 사다 씀으로써 문명의 이기를 누릴 수도 있을 것입니다. 기업이나 가계에서 낸 세금으로 국가는 국민들에게 여러 혜택이 돌아가도록 정책 집행을 할 수도 있습니다. 결국 기업이 잘되면 기업은 물론 가계와 국가까지 서로 윈-윈 하는 모양새를 갖출 수도 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대기업이 경영자 중심으로 자기만 살겠다고 이익창출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면, 시장을 독점하려 하거나 협력업체에 저가 공급을 강요하거나 다수의 노동자를 비정규직화하거나 창출된 이익을 사적으로 소유하기 위해 빼 돌릴 테고, 그 같은 과정에서 소위 낙수효과(tricle down effect)란 것은 기대하기 어렵겠죠. 그래서 대기업 오너일가는 배 불러 뒤뚱거리는데 노동자, 중소기업, 지역사회는 피골이 상접하기 십상입니다.


실제로도 냉전 종식 이후 전세계적으로 만연된 신자유주의의 바람은 사회 양극화를 가속화시키면서 사회 전반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특히, 다국적 기업과 같이 기업활동이 세계화되면서 그 영향력 역시 글로벌화되어, 다국적 기업이 진출한 나라의 경제·환경·고용 나아가서는 그 국가의 주권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는 데다가, 이윤 극대화 논리를 앞세운 비윤리적인 경영(환경파괴, 노동착취, 경제적 이익의 독식 등)이 만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에 시민사회가 대기업들에게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라는 말도 모르냐? 엔간히 해 먹어야지! 최소한 남들에게 피해는 주지 말아야지!"하고 정중히 다그치니, 대기업들은 "난 귀족도 아니고 태생이 장사치이어서 그런 말 모른다."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보냅니다. 시민사회가 참다못해 생태주의·박애주의·민주주의 기타 등등의 가치를 일일이 열거하며 다음과 같이 어르고 달래게 되었는데, 이때 논의된 주제를 가리켜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이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세상에 너 혼자만 있는 거 아니잖아. 너도 사회 구성원 중 일원인데, 혼자 잘 살겠다고 하지 말고 더불어 사는 방법을 도모해 보자. 지져스 크라이스트께서도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오는 게 부자 놈이 천국에 가는 것보다 백배는 쉽다'고 얘기하셨잖냐? 천국에 가든 말든 내 알바 아니지만 좋은 말 할 때 들어... 너 계속 그런 식으로 하면... 우리도 가만히 안 있는다.>>


머리글에서 언급한 축구공 사례와 같이 다국적 스포츠 회사의 아동 노동 착취 문제는 그 비윤리성과 비인간성 때문에 대중의 거센 비난에 부딪혀 불매운동으로까지 이어졌고, 유엔국제아동보호기금(UNICEF)과 국제노동기구(ILO) 또한 이를 심각한 아동학대 사례로 결론짓기도 했습니다. 그즈음부터 대기업은 시민사회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고,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더 이상 '의무'가 아니라 생존하기 위한 또는 더 큰 이익창출을 위한 방책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즉 ‘기업 이미지 제고’, ‘지속 가능한 기업경영’이라는 경영학적 관점에서 논의되기도 했던 것이지요.


시간이 흐름에 따라 ‘기업의 사회적 책임’은 단순히 영업이익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거나(사회적 환원, 사회적 책임투자[SRI] 등) 기업이 본업 이외의 사회봉사활동에 참여하는 것에 국한되지 않고, “기업이 영업활동의 기반인 사회에 대하여 부담하는 당연히 책임져야 할 부분으로서 기업활동에서 사회적 공공성, 공익성, 윤리성, 환경에 대한 배려 등을 적극 실천하는 것”으로 폭넓게 이해되고 있습니다. 


[코멘트] 이러한 개념을 반영하여 국제표준기구 ISO가 2010. 11. 1. 발표한 <ISO 26000>에는 신뢰성, 투명성, 윤리적 행위, 이해관계자의 이익 존중, 법 존중, 국제행동규범 존중, 인권 존중 등 7가지 원칙을 천명하면서, 조직의 지배구조. 인권. 노동관행. 환경. 공정운영관행. 소비자 이슈. 지역사회 참여와 발전에 관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노동·인권·지배구조·소비자보호 등에 관한 상당수의 내용이 이미 국제협약이나 국내 실정법(근로기준법, 독점규제 및 공정거래법, 하도급공정화법, 지속가능발전법 등)으로 이미 법규범화되어 있어 기업은 그 법규에 구속되기도 합니다. 


돌이켜 보면 산업혁명 이후 영국에서는 보다 많은 석탄을 캐기 위해 몸집이 작은 어린아이들은 탄광에 보냈고, 이에 페스탈로치와 같이 아동인권을 주창하던 사람들이 기업에 반기를 들었던 역사가 있었습니다. 그 이후 현시대를 사는 페스탈로치의 후예들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외치는 한편, ‘공정무역’, '착한소비·책임소비', '그린컨슈머' 운동을 하고 있기도 합니다. 


하지만 예쁜 꽃이 독을 뿜을 수도 있듯이 우리가 방심하는 사이 나타나는 부작용에 유의해야 합니다.

어느 얍삽한 기업은 친환경주의, 녹색경영, 공정유통을 위장하기도 합니다(green-washing).

소비자는 제조업체. 유통업체의 광고만 믿고, 자신이 '착한 소비를 선도하는 개념있는 세계시민'이라 자위하고 더 이상의 것은 캐묻지 않습니다.


[코멘트] 칼럼 기고 당시 정부의 경제정책은 '녹색성장'이었는데 이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지요. 한편 최근 들어 4차 산업혁명이 화두로 떠오르면서 전세계적으로 플랫폼 기업의 주가가 신고가를 갱신하고 있는데, 그 기업들 역시 자신이 신지식인이라는 자만감과 우월감에 빠지지 말고 플랫폼을 통한 사회적 순기능 증대에 역량을 기울이고 그와 관련된 책임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연말연시입니다.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상황에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말씀드리는 것은, 기업뿐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다른 사람으로 인해 먹고살고 있는 만큼 주변을 더 둘러보았으면 하는 바람에서 입니다. 커다란 악행을 저지르는 악덕기업에 사회적 책임을 묻는 것은 그 사회적 영향력을 고려할 때 전혀 소홀히 해선 안 될 일이지만, 정작 피해자이자 소시민이라 하는 우리 자신은 악덕기업을 닮아 있진 않았는지 돌이켜 봐야 할 것입니다.  


천안시청에 ‘명덕식’이라는 분은 30여 년 동안 천안시청 컨테이너 박스에서 구두방을 해오셨습니다. 명덕식 씨는 ‘명국장’으로 불립니다. 국장으로 대우하는 이유는 구두를 닦는 경력이나 시청 내 인지도 때문도 있겠지만, 평소 구둣방 장판 밑에 동전들을 모았다가 불우이웃과 소년소녀가장을 돕는 선행 때문이라 합니다. 넉넉치 않은 살림에 흔치 않은 선행을 하면서도 항상 부끄러워하시고 미안해하시는 ‘명국장’님을 거울 삼아 돌이켜 봐야 할 때인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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