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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상구 변호사 Mar 06. 2018

032  1987, #미투, #위드유

(2018년 2월 28일 칼럼 기고분)


근자의 #me too(미투), #with you(위드유) 운동을 바라봅니다. 과거에는 암수(暗數)에 가려있던 성희롱, 성범죄 피해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인데요. 의혹 중에 일부는 걸러 들어야겠지만, 피해자에게는 동조와 응원의 목소리가, 가해자에게는 가면 벗은 민낯을 향한 실망과 지탄의 목소리가 높습니다.


은밀한 욕망, 억압과 착취의 그림자는 정치적 성향이나 이념을 가리지 않고, 국가기관․기업․사회단체․종교계․문화예술계․체육계 등 각종 영역을 넘나듭니다.


가해자의 법적 책임을 중심으로 봤을 땐 각종 시효도 문제될 수는 있겠으나, 민사상 불법행위인 ‘성희롱’에 속하거나, 사회적ㆍ경제적ㆍ정치적 지위나 권세를 이용하여 억압하는 ‘위력에 의한 간음․추행죄’가 주류일 듯합니다(대법원 2008. 2. 15. 선고, 2007도11013 판결 등).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접할 때, 제 개인적으로는 최근 개봉되었던 영화 ‘1987’이 미묘하게 오버랩 되면서 제 대학시절의 다짐이 떠오네요.





#1. 1987년 6월이면, 제가 중학교 1학년 때입니다. 그때 저는 친구들과 파란 하늘이 맞닿은 저수지를 찾아 낚시를 즐기거나 자전거로 하루 이삼십리씩 누비고 다녔던 그 시절이네요.


하지만 어린 저로서는 큰 도시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른들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가는지 알아듣지 못하였고, 또한 별다른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친구 집에 놀러 갔다가 친구가 건네는 비디오 한 편을 보게 되었는데요. 친구 왈 ‘이거 아빠가 가지고 있던 테이프인데 몰래 봤다가 깜짝 놀랐네. 외국기자가 찍었다는데 우리는 동네 형들까지 다 같이 봤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영상 속에는 1980년 광주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나이가 들면서 그 테이프는 영화 ‘택시운전사’에 나오는 힌츠페터가 촬영한 비디오의 복제본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1980년과 1987년의 봄은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2. 1993년, 30여년만에 문민정부가 들어섰고, 그해 저는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이한열의 대형 초상화가 걸린 학생회관 앞에서 선배들은 NL․PD계열의 동아리나 학회 가입을 권했습니다. 하지만 1991년말 공산주의 실험은 실패한 것으로 판정됐고, 1993년엔 외형상으로나마 정치적 민주화가 이루어져 정의를 갈망하는 학생들에게 뚜렷한 투쟁의 대상이 보이지 않던 시기였습니다.


그 때문에 저를 포함한 신입생들의 상당수는 ‘운동권’ 합류에 소극적이었는데, 당시 유행하던 말이 ‘X-세대’, ‘포스트-모던’이었습니다.


래도 저는 ‘추억이 된 운동’을 곱씹는 일부 선배들과 고민을 함께 할 수 있었는데 그 내용은 대략 이렇습니다.


○ 적과 싸우다보면 적을 닮아 간다고, 어느 순간 우리가 그토록 증오하던 독재와 억압이 조직 내 만연하더라.


○ 경찰이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집과 하숙집을 압수수색했을 때, 들킬까봐 두려워 한 책은 불온서적이 아니라, 자본주의 끝판왕 해외포르노잡지였다.


○ 이념은 '깃발'이 아니라... '생활'이 되어야 한다.


○ 이념이나 사상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먼저 '사람'이 되자.



#3. 그렇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먼저 사람이 되는 일'이었습니다.


살다보면 애인이 바뀔 수 있는 것처럼 추구하는 사상이나 이념적 정체성도 어느 정도는 바뀔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느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란 언어와 사랑에 빠진다거나, 단순히 어떤 이념을 동경하여 이를 소유하고자 악세서리인양 자신을 치장하는데 쓰는 일좋지 않은 결과를 가져올 때가 많습니다.


큰 사람은 격물치지로 앎에 이르고,

끊임없는 자기반성을 통해 지행일치, 언행일치를 실현하려고 하는 자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그 사람이 쓴 글보다 큰 사람 없고, 그 사람이 뱉은 말보다 진실된 사람은 없다고들 합니다.


한편 악의 유혹은 박해의 시기가 아니라, 정신이 무뎌지기 쉬운 성공의 시기에, 평화의 시절에 더욱 강력합니다.



#4. 2018년 새해 벽두부터 위선자 혹은 권세를 악용하는 자들에 항거하는 운동이 일렁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비단 남을 비판하거나, 그 상대방을 옹호하는 것으로 끝날 일은 아닙니다.


우리 역시도, 

나 스스로가, 

강자에게 비굴하고 약자에게 인정사정 없는 사도-마조히스트가 아닌지,

힘을 갖게 되면 권력의 달콤함을 맛본 기존의 적들을 닮아가는 것은 아닌지,

어느 순간, 먼저 사람이 되어야 함을 잊은 것은 아닌지대해

매순간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이어가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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